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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이 피어난다

4.17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by 강산





국화꽃이 피어난다

4.17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국화가 피어난다 국화꽃이 피어난다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도 피어난다

반월산에서 만난 큰형과 대화를 한다


멀리 행경리가 보인다 차일봉 아래

저수지 아래 내가 태어났다는 행경리

징검다리 건너 월경리 외딴집으로

알고 있었던 나의 태생지가 바뀐다


나의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있었던

천정에서 비가 새서 세숫대야를 놓던

벽이 기울어진 물가에 위태롭게 있던

바로 그 행경리 집 같지 않은 오두막

그 오두막이 나의 탯줄임을 알아낸다


그래 맞아, 나의 기억은 바로 거기서

새롭게 다시 또 출발하기 시작한다

반월산에서 바라보는 행경리가 좋다

가지런히 잘 정리된 논두렁이 참 좋다

반듯하게 잘 경지정리 된 논들이 좋다


내가 취로사업 나가서 만든 저수지도

월경리와 행경리 사이 진등산에 있다

내가 흥미롭게 지켜보던 호남고속도로

오르락내리락 수없이 반복하던 왕산의

불도자, 포클레인이 등장하기 전에

활발하게 길을 만들고 길을 닦던 불도저


땅을 푹푹 파내는 포클레인이 아니라

중간에 장착된 큰 쟁기날로 밀어내던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 한물 간 불도저


나는 어쩌면 저렇게 한물 간 불도저

땅을 푹푹 파먹다가도 고상한 학이 되는

저 아름다운 포클레인이 아니라 불도저


국화꽃이 피어난다 들국화가 피어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가려운 것이냐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가려운 것이냐


자꾸만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도 가렵다


염상진의 마누라 죽산댁의 입담이 참 좋다

공산당 하려면 장가를 들지 말든가

장가를 들어도 아이를 낳지 말든가

아, 오늘도 안창민과 하대치

이태식과 조원재, 하대치와 들몰댁이 피어난다






https://m.blog.naver.com/shpoem/224040284071




또다시 떠오르는 달과 순식간에 지는 꽃 사이에서: 김선영론 / 이승하



공서고금을 망라해 달과 꽃보다 더 자주, 더 많이 노래된 시적 대상은 없었을 것이다. 달은 제주도 무속신화 중 천지왕 본풀이에서부터 나타난다. 해도 달도 둘씩 있어서 재앙이 왔는데 천지왕의 첫째 아들 대별왕이 천근의 활과 천근의 살을 준비하여 해와 달을 한 개씩 쏘아 떨어뜨려 재앙을 물리쳤다는 옛이야기가 재미있다. 그 뒤로 『삼국유사』의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 광덕과 염장의 설화, 신라 향가 중 「원왕생가」와 「찬기파랑가」, 백제가요 중 「정읍사」, 조선조 초기의 악장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수많은 시조에서도 달은 시인들의 시적 대상이 되었다. 달은 음(陰)의 대표적 상징물로써 해와 대척적인 의미에서 대지, 어둠, 정적, 여성 등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조상은 정월대보름에 볏짚이나 솔가지로 달집을 짓고 그것을 태우며 한 해의 행운을 빌었다. 대보름이나 한가위에 원을 그리며 추는 ‘달의 춤’이 강강술래이다. 계수나무 아래 토끼가 방아를 찧는 그림인 「토구도」나 궁궐의 옥좌 뒤에 있는 그림 「오봉일월도」, 「일월곤륜도」에는 달이 떠 있다. 달은 화옹의 「월매도」, 김두량의 「월하산수도」, 김홍도의 「소림명월도」, 신윤복의 「월하정인」 등의 화폭에도 두둥실 떠 있다.


김선영 시인은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선집을 제외하고 이번에 내는 시집이 열 번째 시집이니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가 달과 꽃과 돌이 아니면 물과 산, 별, 바람 같은 자연 대상물을 소재로 한 것이다. 시집의 제일 앞머리에 놓인 시부터 보자.



우리 집 왔다가

돌아가는 달

섭섭해 배웅하며

대문 밖에 서네

언덕에 서네


저어리 가는 달에

크게 말했네

서녘에서 올 때도

기다린다고


달이 제 마음을

달빛만큼 퍼 주고 갔네


―「달을 배웅하며」 전문



시인에게 있어 달은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벗이기도 하고 언제까지나 함께하는 생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교감의 대상이면서 내 감정이입의 대상이기도 하다. 한용운에게 ‘님’이 있었듯이 김선영 시인에게는 ‘달’이 있었다. 시인은 자신이 그리워하는 대상을 ‘달’로 설정하여 노래한다.



아, 오늘 밤

달 찼군요



달에서

돌들을

다아 끌어내립시다



달에서

무게를 뺍니다



무無의 본적

거기

당신만 남았군요



그대.


―「아, 오늘 밤 달이 찼군요」 전문




제1연을 보면 달이 대보름의 만월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달을 지구에서 84만 3,400km 떨어져 있는 그 달로 보기 어렵다. 달에서 돌들을 다 끌어내리고 무게를 빼니까 “무의 본적”, 거기에 당신만 남는다고 한다. 달은 내 감정의 표상이기도 하고 내 감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만월을 보며 어떤 사람을 떠올린 것일까?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 다른 세상으로 먼저 간 사람? 차면 기우는 법, 달은 찼지만 그대는 어디 먼 곳으로 가버렸나 보다. “우물 속에 둥실 누운/ 달을 건지셔”서 “만월을 물동이에 이고 오신”(「어머니가 달을 이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달은 곧 어머니였다. 달을 보며 시인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했던 것이니, 달이 이처럼 시에 많이 등장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번에는 달을 두고 의인화를 시도한 시를 보자.




삽으로 퍼낸 구덩이마다

달의 푸른 눈물 고입니다.

달 아래 꽃을 뉘었습니다

눈감은 꽃을 뉘었습니다

실눈 뜬 어둠을 뉘었습니다



달이 내려와

꽃과 함께 나란히 누웠습니다.

꽃잎의 잠을 따라 달이 갔습니다,

구름같이 바람같이 따라갔습니다,


―「달의 푸른 눈물」 제2, 3연




이 시에서 달은 천상의 이미지, 즉 영원과 무한과 구원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천상의 달이 지상의 모든 슬픔과 아픔의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꽃잎도 구름도 바람도 인간처럼 유한하지만 달은 이 유한한 것들의 생성과 사라짐을 지켜보는 거룩한 존재이다. 그 달이 지상의 온갖 비극을 보고는 밤하늘을 밝히며 푸른 눈물을 흘린다. 이제 달빛을 묘사한 시를 보자.




달빛이 너무 꽝꽝하여

집 무너질까 염려되네

순은의 달빛을

튼실한 세상의 어깨로 메고 가

근심 가진 사람들께 나누어 부어주네

달빛은 순은 백냥, 순은 천냥이요

꽝꽝하니

집집마다 넉넉하리 그득하리


―「달빛 해일」 제1연




달은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엄청나게 커지고 무진장 밝아져서 ‘달빛 해일’을 일으키고 있다. 달빛은 대개 은은하다, 희부옇다, 어슴푸레하다, 요요하다, 교교하다 등으로 표기되어 왔다. 그런데 시인은 달빛이 너무 꽝꽝하여 집이 무너질지 걱정된다고 한다. 순은의 달빛이 그대로 순은 백냥이 되고 천냥이 된다. 달빛은 제2연에 가서 ‘달빛 파도’가 된다. 집도 절반쯤 ‘달물’에 잠긴다. 저 달까지 올라가 달을 데려다가 마을 지붕 위에 그대로 두면 달빛은 마침내 해일을 일으킨다. 기존의 달빛 묘사와 달리 시인은 달빛이 대낮의 햇빛 이상으로 환하다고 표현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만월이 뜨면 우리는 밤길도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에게는 달이 전 생애의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 이미지였던 것처럼 김선영 시인에게서도 중심 이미지의 역할을 한다. ‘달’이라는 하나의 시어가 거의 절반의 시에 나오니, 김 시인을 이제 달의 시인이라고 불러야겠다.




나는 먹을 갈 듯

말을 갈고 있다

달이 사는 배나무 한 그루 뿌리째 캐어

내 백지에 옮겨 심는다

달이 내 백지에 산다


―「매일 보아도 그리운 달아」 제4연




돌에서 태어난 달은

꽃 같은 얼굴로

하늘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나

만월의 그물로

세상을 건져 올리고 있다.


―「달을 그렇게 부르지 않으리」 마지막 연




앞의 시를 보면 달은 시인이 시를 쓸 수 있도록 하는 등잔불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달을 보며, 달로 말미암아, 달에 의해, 달과 함께 살아가며 시를 쓰고 있다. 시인은 달을 “질료적 물질적 호칭으로만 부르지 않”겠다고 한다. 즉, 달은 천체의 일부이지만 돌과 바위와 모래로 된 지구 위성으로서의 의미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달을 “만월의 그물로/ 세상을 건져 올리고 있”는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달 안에서 달빛 향기를 입고 춤을”, “황홀한 달 안에서의 춤”(「달 안에서 춤을 춘다」)을 춘다. 달은 멀리에 있지 않고 내 곁에 있고 내 마음속에 있다. 시를 쓰는 이유도 달이 좋아서이다.




삶에서 달아나는 달이

바람 따라 흘러가 나를 만나듯

삶에서 물러가는 산이 나를 만나듯

어디에서든 내 곁에 사는

달이 좋아 시를 쓴다.


―「달이 좋아 시를 쓴다」 끝부분




김선영 시인에게 있어 달이 이렇게 중심 이미지 역할을 하게 된 연유가 밝혀져 있는 부분이다. 우리네 일상적 삶이란 시간의 제약을 받아 일회적이고 유한하다. 그러나 달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물론 매일 모습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하늘에 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성스러운 존재이다. 영원을 꿈꾸는 시인이라면 마음의 표상이 필요한 법인데 시인은 달을 그것으로 삼았다. 기독교인이 성호를 긋고 나서 기도를 하듯이 시인은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고는 펜을 들곤 했던 것이다.


인류가 멸할지라도 달은 또다시 떠오를 것이다. 인류의 출현 훨씬 전부터 달이 밤을 밝혔던 것처럼. 하지만 花無十日紅이라고, 꽃은 10일 이상 피어 있는 것이 없다. 영원을 상징하는 것이 달인 반면,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 꽃이다. 인간은 달과 꽃 사이에서 몇십 년(사람마다 수명이 다르지만) 살다가, 앓다가, 죽는다.




꽃들은 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떨어진다.

신에게 연장의 시간을 구걸하지 않는다.

꽃같이 깨끗이, 미지의 시간을 단념할 수 있을까


―「달이 좋아 시를 쓴다」 제1연




꽃은 우리 인간처럼 오래 살려고 발버둥이치지 않는다. 죽을 때가 되면 금방, 깨끗이 죽는다. 시인에게 있어 하루 24시간이란 “거대한 미래”이기도 하고 “꿈꾸는 소멸”이기도 하다. 하루살이에게만 하루가 긴 것이 아니다. 우리한테도 내일 하루는 거대한 미래인데, 하루를 살면 하루만치 죽는다. 이윽고 때가 되면 우리는 “무거운 꽃을 벗는다”. 기막힌 일은 한순간에 지는 꽃이 영원히 하늘을 지킬 것 같은 달을 밀고 간다는 것이다. “시간은/ 강물같이 흐르지만/ 시간은/ 그림 속 장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그림 속 장미」)고 한다. 시간은 또 봄 여름 가을 겨울에게 말을 걸지 않고 째깍째깍, 또박또박 지나간다. 시간도 달도 초월적이면서 현세적이다.




마음 몰고 다니던 바람 잠잠해진다

산자두꽃 향기

세상을 한 바퀴

휘이 돌고 나면

세상이 평정되리



바람 한 번 불자

산자두꽃 향기

달을 밀고 간다


―「달에 산자두꽃 펴서」 제2, 3연




이제는 산자두꽃이 수동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달을 밀고 가는 행동의 주체가 된다. “산자두꽃빛이/ 달에 부어져서/ 함께 은하수로/ 내려간다”는 이 시의 결구는, 순간과 영원의 경계를 지우려는 시인의 시간관과 우주관의 산물이다. 순간이 모여 영원이 되고 영원이 나누어져 순간이 된다. 인간이 모여 사회가 되고 사회가 모여 지구촌이 된다. 항성과 혹성이 모여 태양계가 되고 태양계가 모여 우주가 된다. 인간 각자가 소우주이며, 소우주는 우주의 일부이다. 시인의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 시가 「마음의 터널」이다.




땅에 내린 낙화, 스스로 마음 상해 으깨어져

밟으면 유리처럼 발이 아프다

지는 꽃은 붉어 가슴처럼 붉어

그믐달 실눈 뜨고 내다본다


―「마음의 터널」 제2연




낙화하는 것을 보며 마음 아파하면 한도 끝도 없다.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파스칼)이므로 달을 보며 마음을 달래야 한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잎이 떨어지는 생명체의 법칙 혹은 우주의 순환 논리를 생각하며 땅에 내린 낙화(생명의 죽음)를 보고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시인이라면 “봄이 돌아갈 비단길 닦아주는 일”을 해야 한다. 시간에 얽매이지 말고 자연의 이치를 독자들에게 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 생명체의 생로병사는 슬픔일 수도 있지만 위안이 될 수도 있다. “들판을 건너는 내 등에/ 어린 태양이 유년의 아들처럼 업힌다”(「어린 태양을 등에 업고」)고 노래하는 시인에게 생, 생명, 생명체, 생로병사는 슬픔일 수 없다. 우리는 신의 섭리, 혹은 자연의 이치를 ‘순리’라고 한다. 땅에서 태어난 식물이 땅으로 돌아가듯이 물(양수)에 있다 태어난 우리 인간은 죽으면 추깃물을 흘린다. 물에서 태어나 물로 가는 것이다.



산은 물을 붙잡지 않고

그냥 보내서 좋고

물은 떠날 줄 알아서 좋다



산은 말을 절약해서 좋고

물은 천진스런 아이처럼

맑아서 좋다

말이 많아도 좋다


―「산, 이윽고 물」 제3, 4연




그래서 옛사람들은 요산요수(樂山樂水)니 산자수명(山紫水明)이니 청산녹수(靑山綠水)니 하는 말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은 물과 어울려야 푸르러지고 물은 산 그림자가 담기면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물은 고요히 흘러가도 좋고 소리 내며 흘러가고 좋지만 산에는 나무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름드리나무가.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이며 자연의 자연스러움이다.




굳게 닫힌 하늘의 문을 열자

하얗고 붉은 꽃이 몸에서 피어나왔다

어떤 고통이나 슬픔에도

울지 않고 지지 않는 꽃이 피었다


―「꽃이 길 얻다」 마지막 연




김선영 시인처럼 우리도 생명체의 사라짐을 마냥 슬퍼할 일이 아니다. 생명체로 태어나 잠시 잠깐이나마 이 지상에 머물었던 것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어떤 꽃이든 좋다. 그 꽃 한 송이가 피어나기까지는 수백만 년 지구의 역사가 필요하였고, 수억 만 년 우주의 역사가 필요하였다. 낱낱의 생명체는 그 자체가 우주의 역사(歷史)와 조물주의 역사(役事)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만물은 유전(流轉)하는 것이며 우주는 영원회귀(永遠回歸)하는 것이다. 영원회귀의 축소판이 사계절이다. 낙화는 꽃의 종말이 아니라 개화를 위한 준비운동이다. 시인이 「남의 고향 마당에 살구나무 심은 뜻은」 「고향은 봄과 같아서」 「스스로 고향이 되어」 「고향산 같아서」 등 고향을 그리워하며 시를 많이 쓴 것도 영원회귀의 사상과 관련이 있다.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때가 되면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런 본능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하는데, 어찌 보면 모든 생명체의 고유한 본능이 아닐까. 자, 이제는 돌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돌이 고통 주어서

조개가 울면

울음에 놀란 돌 덩달아 눈물 흘리네

언어 안에 들어온 돌이 고통 주어서

언어가 울면

그 울음에 슬픈 돌 함께 우네


―「진주」 앞부분




작은 돌 하나가 조개에게 고통을 주면 조개는 그 돌이 주는 고통을 인내함으로써 진주를 만들어낸다. 우는 것은 조개만이 아니다. 돌도 운다. 그런데 시인은 “언어 속에 우는 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 돌은 “통곡으로 빛이 되”는 곡비(哭婢)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다. 수명이야 어떠하던지 간에 달처럼 찬란한 빛을 뿌리지도, 꽃처럼 향기로운 냄새를 뿌리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감탄하거나 내려다보며 찬탄하지도 않는, 대체로 버려진 존재이다.




태초에 태어나

내가, 떠나는 날

나에게로 와서야

겨우 내 이름 하나

업을 돌

그 돌.



나에게

그동안 고단했겠다고

편히 쉬라고 다독이며

내 이름 하나

상처처럼

가슴에 새긴 채

서서 늙어갈 돌

그 돌.



얼굴도 모르는 채

이승에서

피안을 업고

살아갈 돌

슬픈

그 돌.


―「그 돌」 전문




금강석 같은 보석이 아닌 다음에야 돌은 가장 흔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돌은 내가 떠나는 날 묘비가 되어 내 앞에 서 있을 수도 있다. 돌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마모되는 것인데 시인은 “상처처럼/ 가슴에 새긴 채/ 서서 늙어갈 돌”이라고 했다. 길바닥에 구르는 돌 하나는 천년의 세월 혹은 만년의 세월을 돌로 존재해 왔겠지만 대다수 인간은 백 년 미만을 살다 죽는다. “이승에서 피안을 업고/ 살아갈 돌/ 슬픈/ 그 돌”도 역시 인간의 유한을 말해주기 위해 끌어온 객관적 상관물이리라. 인간은 유한할지라도 무한을 꿈꿀 수 있으니, 정신 혹은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는 김선영 시인의 시론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마음의 시를

한 말쯤 펴서

달빛에 붓는다

이랑이랑 붓는다

달밤이 출렁인다

알알이 쏟아지는 달빛과

알알이 쏟아지는

나의 시가 함께 궁그르며

은하수 큰 강에 밀려간다




오늘 밤

한 사발

이걸 떠서

달과 시를 주신

대우주의 주인께

드리러


―「잔치」 전문



대우주의 주인을 조물주라고 하자. 창조주인 그는 시인에게 달과 시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은 달이 있었기에 시인은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달, 달밤, 달빛, 은하수……. 이런 것들을 엮어서 시를 써온 시인이기에 “반짝이고 반짝이는 문자 둘을/ 백억 광년에서 골라내어// 내,/ 이 반짝임으로써/ 그대에게 닿아 가리라.”로 마무리 지은 「길」의 부제가 ‘시를 위하여’이다. 시인 자신의 몸이야 때가 되면 시계 초침이 멎듯이 멎겠지만 시는 밤하늘의 달처럼 오래오래 빛을 뿌릴 것이다. 돌멩이처럼 여전히 지상의 한 귀퉁이에 놓여 있을 것이다. 꽃처럼 향기를 풍길 것이다.




밤여울이 넓은 밤하늘을

파고 흘러서

은하수 쪽으로 밤구름 내려온다,



나는 펜촉대로 말의 씨앗을 튼다,

나는 말의 부자

금방 씨 뿌리고 수확한다,



흰 자두꽃 하얀빛에

내가 적은 시를 읽는다,

내 음성 듣고 모이는 봄의 향기

아직은 꽃이여 지지 말아라.


―「아직은 꽃아, 지지 말아라」 후반부




시인은 한밤중에 뜰에 나가서 탄원한다. 내 더 살아 더 좋은 시를 쓰겠으니, 아직은 꽃이여 지지 말아 달라고. 나는 말의 부자인지라 펜촉대로 말의 씨앗을 트고, 말의 씨를 뿌리고 수확한다. 그래서 나오게 된 시집이 『달빛 해일』이다. 이번에 내는 제10시집이 아무쪼록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의 해일을 일으키기를 기원해본다. (*)











김선영 시인은 1938년 5월 17일 개성시 고려동에서 출생했다. 개성여자정화학교 6년 시절 한국전쟁이 일어나 온 가족이 부산으로 피난갔다. 서울사범,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수도여사대 대학원, 성신여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다. 서울사범 재학 당시, <동아일보>의 고등학교 학생 문예란을 통해 작품을 다수 발표, 서울사범 본과 2학년, 《여원》지 창립 2주년 기념 문예 현상모집에 시 「달」이, 같은 해에 고려대학교 주최 '전국 고등학교 문예작품 현상 모집'에 시 「파랑새」가, 수석 당선되었다. 1957년 미당 서정주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5월호에 시 「파랑새」가 첫회 추천되었고, 1961년 《현대문학》 9월호에 시 「메아리」가 2회 추천, 1962년 2월호에 시 「계절의 낙서」가 최종회로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1963년 한국문단사상 최초의 여성 동인 ‘청미’ 결성에 참여, 1998년까지 김숙자ㆍ김혜숙ㆍ김후란ㆍ박영숙ㆍ이경희ㆍ임성숙ㆍ추영수ㆍ허영자 제씨와 동인 활동을 하였다. 1976년부터 2001년까지 세종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73년 장시 「탈출하는 살」로 《현대시학》 제4회 작품상, 2008년 한국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자문위원이며 한국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이다. 시집으로 『사가』 『허무의 신발가게』 『풀꽃제사』 『환상의 문지기』 『밤에 쓴 말』 『라일락 나무에 사시는 하느님』 『사모곡』 『쓸쓸한 것들을 향하여』가 있으며, 시선집으로 『작파하다』를 상재했다. 산문집으로는 『순결한 예술가의 초상』 『사랑은 마주 울리는 메아리입니다』 외 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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