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空想)―
내 마음의 탑(塔)
나는 말없이 이 탑(塔)을 쌓고 있다.
명예(名譽)와 허영(虛榮)의 천공(天空)에다,
무너질 줄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無限)한 나의 공상(空想)―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自由)로이 헤엄친다.
황금(黃金), 지욕(知慾)의 수평선을 향하여.
_ (1935년 10월 이전 추정, 윤동주 18세)
5. 공상(空想)(시) _ 1집, 삼판
* 윤동주 시인의 첫 활자화된 시
1935년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한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게재
얼마 전에 이어도문학회 단톡방에 이승하 교수님께서 들어오셨다. 덕분에 나는 존경하는 이승하 시인의 시와 산문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인연이란 참으로 신묘한 것이다. 이승하 시인께서 올리신 신춘문예 당선 책자에 나의 이름까지 올려져 있었다. 덕분에 나는 요즘 참 많은 반성을 하고 있다. 이승하 시인뿐 아니라 황인숙 시인과 안도현 시인의 이름도 보인다. 그리고 김기택 시인과 나희덕 시인도 보인다. 이제부터라도 더욱 분발해야겠다.
어디서 우 울음 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우 울음 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이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동화同化야 도 동화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이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경북 의성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同 대학원을 졸업.
1984 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사랑의 탐구』(1987), 『우리들의 유토피아』(1989),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1991), 『폭력과 광기의 나날』(1993), 『박수를 찾아서』(1994), 『생명에서 물건으로』(1995)가 있고,
시론집으로 『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1997), 『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1999), 『한국 현대시 비판』(2000), 『한국 시문학의 위기를 극 복하기 위하여』(2001)와
그밖에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1997)과 시선집 『젊은 별에 게』(1998) 등과
평전으로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청춘의 별 윤동주』가 있음.
지훈상, 시와 시학상, 편운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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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절묘하다. 절실하다. 한때 말을 더듬었던 이승하 시인이 더듬는 말투로 무삭제 완역판으로 자신을 시로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가슴에 절절하게 파고드는 시가 어디에 있으랴. 절창의 시다. 그리고 그는 사랑의 바이러스, 행복의 바이러스를 세상에 뿌리고 다니는 시인 천사다. 말로만 천사가 아니라 실천을 앞세운 어진 천사다. 먼발치에서 내가 늘 보아 왔으므로 그가 어두운 터널의 세상을 알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그 어둠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본질적인 사랑이 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바닥이 마르지 않는 화수분 같은 사랑이 그의 가슴에 있다. 그의 시가 난류같이 세상에 따뜻하게 흐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한 편의 시, 그리운 시】/ 김왕노 시인
【이 한 편의 시, 그리운 시】 화가 뭉크와 함께/ 이승하 : 시인뉴스 포엠
글머리에
1 윤동주 조상의 만주 이주
2 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3 죽은 뒤에야 시인이 되다
4 윤동주는 어떤 동시를 썼나
5 시에 세 번 나오는 순이는 누굴까?
6 정지용 시인과 만나다
7 히라누마로 성을 고치다
8 도쿄에서 교토로 전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9 체포에서 투옥까지
10 생체 실험용 주사를 맞다
11 묘소와 시비는 어디에?
12 지금까지의 윤동주 연구
부록 윤동주의 시 세계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죄의식과 죽음 의식
윤동주 연보
1932년에 윤동주는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용정(龍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명동에서 테러 사건을 일으켜 치안이 불안해지자 윤동주 일가와 친척들이 용정으로 이사해 와서 살게 되었다. 용정은 명동에서 20리 서쪽에 있었다.
1934년 겨울에 놀라운 소식이 이들에게 전해진다. 은진중학교 3학년에 때였다.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짧은 소설(콩트)을 응모하여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윤동주는 송몽규의 당선 소식에 크게 자극을 받았고,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세 편의 시를 완성한다. 그가 발표한 최초의 성인시(동시와 반대되는 의미)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였다. 동주는 시를 쓰면 꼭 끄트머리에 쓴 날짜를 써 놓는 습관이 있었는데 같은 날 3편의 시를 썼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과 자극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다. 일주일 뒤인 1935년 1월 1일 자에 콩트 「숟가락」(신문에 발표될 때의 제목은 ‘술가락’)이 필명 ‘송한범’이라는 이름으로 실리자 동주는 결심을 더욱 굳게 했을 것이다.
‘몽규 형은 역시 글을 잘 써. 중학교 학생인데 벌써 소설가가 되었구나. 그럼 나는 시를 써 시인이 되어야지.’
-20~21쪽
동주의 시에는 ‘순(順)’ ‘순이(順伊)’라는 여성의 이름이 세 번이나 등장한다. 동주와 사랑을 나눈 여성이 있었을까? 이는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 순이가 누굴까? 자신이 짝사랑했던 이의 이름을 스스로 친구들 앞에서 밝힐 수 없어서 이렇게 남몰래 애칭을 하나 지어 그녀를 생각하면서, 그리워하면서 시를 쓴 것이 아닐까?
강처중은 연희전문학교를 같이 다닌 동기생이었다고 앞에서 말했었다. 광복 이후에 그는 유고가 된 노트에 실려 있는 시와 그때까지 모은 동주의 시를 정음사에 들고 가서 시집을 내는 일에 앞장섰는데, 그가 쓴 발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77쪽
윤동주의 생애를 보면 공부에만 몰두한 학구파가 아니었고, 성적이 특별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성격도 차분하고 조용하였고 시 쓰기를 즐긴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한편 사촌 송몽규는 일본 국내의 제국대학의 하나인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 전공)에 시험을 쳐 합격을 했다. 같이 시험을 친 윤동주는 떨어져서 후기라고 할 수 있는 도쿄의 릿쿄대학에 합격했다.
일본의 국립대학인 제국대학은 그야말로 천황이 다스리는 제국(帝國)의 국민을 가르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국가기관이다. 1886년에 수도 도쿄에 도쿄제국대학이 세워졌고 1897년 교토에 교토제국대학이 세워졌다. 20세기에 들어와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 게이조(서울의 경성제국대학), 다이호쿠(타이페이의 대만제국대학), 오사카, 나고야 순으로 세워진 이 학교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천재로 인정을 받았고 졸업생은 각 분야에서 국가 경영의 지도자가 되었다.
릿쿄대학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외로웠다. 송몽규를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 몇 사람이 교토에서 학교에 다니는데 자기는 달랑 혼자 도쿄의 릿쿄대학에 다니고 있으니 외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42년 4월 2일부터 다녔는데 첫 학기 수강 결과 성적이 영문학연습은 85점, 동양철학사는 80점이 나왔다. 그다지 신통치 않은 성적이었다.
외로움은 편지를 쓰게 했다. 서울에 있는 친구 강처중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서 시도 5편 함께 넣어 보냈다.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어진 시」, 「봄」을 강처중은 잘 간직한다.
-107~108쪽
나는 이 가운데 ‘기독교적 원죄 의식이 가져다준 겸손한 신앙인으로서의 부끄러움’에 논의를 집중하고자 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여 그의 위로 올라가서 자기의 자율을 헛되이 주장하고 싶어 하는 까닭에 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아담과 이브, 카인, 라멕, 그리고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자들이 모두 이 예에 속한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셨나이다’라는 시편 51장 5절은 시편 기자가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의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리라’(누가복음 11장 13절)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신약에서도 인간은 분명 죄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와 같이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강조하는 기독교 교육을 받은 식민치하의 젊은 지식인 윤동주는 부끄러움에 대한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뼈아픈 죄의식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조적 삶이라는 결단에까지 이른다. 윤동주가 쓴 종교시가 정지용의 것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윤동주의 죄의식은 크게 두 가지에서 연유한다. 첫째, 어릴 때부터 받은 종교교육의 영향에서 온 원죄 의식. 이때의 원죄란 아담과 이브에서 연유된 죄의 의미보다는 ‘신 앞에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죄의식, 즉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은 데서 오는 자괴감으로 보는 것이 좋다.
-145~146쪽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 윤동주의 시가 실려 있고, 그 시를 공부하는 시간이면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윤동주의 생애와 시 세계의 특징을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그의 시 가운데 「서시」, 「자화상」, 「십자가」,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참회록」, 「쉽게 씌워진 시」 등이 교과서나 참고서에 나와 있고, 그때마다 학생들은 윤동주의 생애에 대해 반복해서 공부했을 것이다. 다른 시인은 잘 모를지라도 윤동주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을 텐데……. 자,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윤동주의 조상은 왜 조국을 떠나 만주에 가서 살게 되었을까?
윤동주는 어찌하여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윤동주가 생시에는 시인이 아니었고 죽은 뒤에 시인이 되었다?
윤동주는 많은 동시를 썼는데 어떤 동시를?
‘순이’가 나오는 시가 3편인데 순이는 짝사랑했던 사람인가?
윤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왜 만났을까?
윤동주는 왜 자기 성을 히라누마로 고쳤을까?
일본 도쿄에서 교토로 전학을 하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았다?
왜 학생인 윤동주가 체포되었고 형을 살게 되었을까?
동주와 몽규는 인체 실험용 주사 때문에 죽었는가?
묘소는 어디에 있으며, 시비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까지 윤동주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주요 시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열세 가지 질문 가운데 하나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중 세 개만 답할 수 있어도 윤동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셈이다. 즉, 우리는 지금까지 윤동주에 대해 막연히 한두 가지 사실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시인이기에 습작생 시절부터 열심히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공부하였다. 대학원에 가서 윤동주에 대해 석사 논문을 썼고 그 뒤에도 3편의 논문을 더 썼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할 때, 외부에 나가 강연을 할 때, 윤동주 시인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말할 거리가 거듭 생겼다.
그는 지상에 27년 2개월만 살다 갔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는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우리의 지적 갈증을 달래 준다. 수많은 시인들이 일제강점기 말기에 변절했지만 윤동주는 한용운ㆍ이육사 시인과 더불어 단 한 줄도 친일의 글을 쓰지 않았다.
광복 6개월 전인 1945년 2월 26일 오전 3시 36분, 일본 감옥의 추운 독방에서 외마디 비명을 크게 지른 뒤 목숨이 끊어진 윤동주! 필자는 위의 열세 가지 질문에 답을 해 보면서 그의 짧지만 숭고했던 생애를 더듬어 보았다.
https://www.youtube.com/live/RasSyQDCc8M?si=pLH-zvPgsLJUQDyL
조회수 2,763회 실시간 스트리밍 시작일: 2025. 10. 11. #만해한용운 #김용옥 #님의침묵
만해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 10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민족의 고난 속에서 저항과 희망의 목소리를 노래한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의 문학과 사상을 기리고, 불교계와 지역 사회가 함께하기 위해 10월 11일 인제 만해마을에서 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 선생 초청 강연을 개최합니다. ‘님의 침묵 100주년을 앞두고’를 주제로 한 이번 강연에서 도올 선생은 최근 펴낸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를 토대로 ‘님의 침묵’을 새롭게 해석하고, 식민지 시기의 난제에 맞선 만해 스님의 사상적 뿌리를 짚어 봅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위대한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탄생 100년을 맞이하면서 내놓은 책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를 통해 “나는 만해와 해후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왜 이 조선땅에 태어났는지, 나의 존재의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의 대결상대는 버트란드 러셀, 화이트헤드, 비트겐슈타인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의 철학을 뛰어넘는 철학을 구유한 대사상가가 이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20세기 우리 정신사를 근본적으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 나는 만해가 산 땅에 태어나서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강연에서 도올은 만해를 만나게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풀어내면서 그 과정에서 20세기 한국문단의 혜맥을 이어간 위대한 인물들을 소묘해나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만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의 핵을 이루는 30여 편의 시들이 한줄한줄 해석합니다. #만해한용운 #김용옥 #님의침묵 #님의침묵100년강연 도올 김용옥 기념강연 "경전의 도시 인제, 만해의 정신세계"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100주년 행사 1부
https://m.blog.naver.com/shpoem/223816684496
https://m.blog.naver.com/shpoem/223639186312
2024. 10. 30. 6:06
고흐의 그림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뭉크의 그림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뭉크의 <병든 아이>라는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설움과 슬픔이 가슴을 데우고, 시야가 흐려진다. 석판화와 유화가 다른데 유화 <병든 아이>는 침대에 앉은 자세로 있는 아이 옆에 한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여인은 아이가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뭉크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가 열네 살 때 식구 중 가장 좋아했던 누이 소피에가 같은 병으로 죽어 그는 폐질환에 대한 공포 속에서 내성적이고 감수성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뭉크는 어렸을 때 기관지염으로 세 번 입원해야 했으며 2남 3녀 중 나머지 두 명도 일찍 죽었다. 스스로 “내 일생은 건강과의 싸움이었습니다”라고 회고한 적이 있는데, 성장기의 이런 경험은 평생 지워지지 않아 비극적인 제재를 반복해서 그렸을 것이다.
뭉크는 고통ㆍ죽음ㆍ불안 등을 테마로 그림을 그렸기에 내면세계가 지극히 어두웠음을 알 수 있다. 흡혈귀가 사람의 목에 이빨을 박고 있고 해골을 껴안고 있는 소녀가 나온다.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그림은 음습하다. 뭉크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으면 가슴이 그야말로 뭉크-ㄹ해진다.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자의 신음이 들려오는 듯하고, 소리 죽인 울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 신음과 소리 죽인 울음이 끝내 터져 나오는 자리에 <절규>가 있다.
대학 4학년 때 ‘서양미술사’ 과목을 들었다. 수업이 하루는 이나경 교수님의 강의였고, 하루는 그림 감상이었다. 교수님은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그림에 대해 설명을 하셨는데 유파별로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을 준 화가가 노르웨이의 뭉크였다. 뭉크는 나로 하여금 시 「화가 뭉크와 함께」를 쓰게 했다. 이것이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되었고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렸다. 뭉크한테 큰 빚을 진 것이다.
그 뒤에 더 많은 빚을 졌다. 타인에게 치이고 세상살이에 지쳐 한없이 서러워질 때면 뭉크의 화집을 뒤적인다. 고통의 끝간 데에서 불멸의 예술혼을 꽃피운 뭉크를 생각하며 나는 또 새삼 기운을 얻는다. 그는 정신병원에 8개월 동안 입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심신이 약한 사람이었지만 의외로 강한 정신력과 조국애를 갖고 있었다. 나치스가 노르웨이를 점령한 뒤 ‘미술명예평의회’라는 어용단체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넣었지만 그는 이를 끝내 거부했다. 나치스가 그의 그림에 퇴폐예술이라는 낙인을 찍고 82점을 몰수한 다음 이런 압력을 넣었음에도 단호히 거부한 용기있는 예술가가 뭉크였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나는 결혼을 안 했다. 나의 유일한 자식은 그림이다.”
뭉크의 이 말이 나를 나태의 늪에서 건져올려 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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