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5.6 무너질 줄도 모르고

by 강산





뿌리를 찾아서

5.6 무너질 줄도 모르고





반월산 산밭이 숲이 되었다

산밭에서 늘 살았던 사람들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유배에서 너무 늦게 풀려나

반월산 산밭을 꽃밭 만든다

떠나기 전에 공원을 만든다


아버지 어머니 누워 계시고

할머니 할아버지 안 보인다

가시덤불 속에 상석이 있다


달성배공(達城裵公) 있다

달성배공, 배 씨를 찾는다

배(裵)는 긴 옷을 입었다


배 씨는 중국에도 있고

베트남에도 있다고 한다

한국(裵) 중국(裴) 베트남(Bùi뿌이)




*

한국의 배(裵)씨는 문헌에 총 59 본관이 있으며, 성씨 인구순위는 26위로 2015년 기준 400,641명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배 씨 대종회 기록에 의하면 배 씨의 뿌리는 2천여 년 전 신라 건국 초기의 시대로 올라간다. 배 씨는 한국의 대표 성씨로 일찍이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다. 고을 이름 비(非) 인명용 중국한자는 裴로 쓴다. 설문해자는 배(裵)는 긴 옷을 입은 모습이다. 의(衣)로 구성되고 비(非→배)가 소리라고 한다.


한국 배 씨(裵氏)의 기원은 크게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신라 시대에 사성 받은 배 씨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사성 받은 배 씨이다.


진한 개국 설화에 의하면, 사로 6촌(斯盧六村) 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촌장 지타(祗陀, 只他)는 다른 6부 촌장들과 함께 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였다. 32년 신라 유리왕은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가리 부(加利部)를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배(裵)씨 성을 사성 하였다. 정사(正史)에 처음 등장하는 배 씨는 신라 성덕왕 때의 상대등(上大等) 배부(裴賦)이며, 희강왕 때의 아찬(阿飡) 배훤백(裵萱伯)의 기록과, 정강왕 때의 현령(縣令) 배영숭(裵零崇)의 사적이 확인되며 현재는 계대를 고증할 보첩이 실전되어 각 본관마다 시조를 달리하고 있다.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의 처음 이름은 백옥(白玉) 또는 백옥삼(白玉衫)으로 성씨가 없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배 씨 성을 사성 받았다.


경주 배 씨(慶州裵氏) 시조 배현경(裵玄慶)의 본명은 백옥삼(白玉衫)이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오르고 대광(大匡)을 역임했으며, 배 씨 성을 사성 받았다. 조선시대 인물인 배충과(裵忠果)를 중시조로 삼으며, 배출과는 의술(醫術)에 능하여 조선 중종 때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에 제수되었으며, 경주처사(慶州處士)의 호(號)가 내려졌다.


한국의 배 씨는 조선 중기부터 裵字를 사용해 오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한자 裴字를 사용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고래의 자전에서 "裵"字가 本來의 글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중국의 배(裴, 병음 Pei)씨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인물 백익(伯益)의 후예로 영성(嬴姓) 계통이며 비자(非子)의 12대손인 진환공(秦桓公)의 아들(子) 후자침(后子鍼)을 시조로 삼는다.


베트남에도 배(Bùi뿌이)씨가 있는데 인구 순위상 우위에 있다.





https://m.blog.naver.com/shpoem/223407247273




중세의 어둠을 밝힌 찬란한 문학작품

―단테의 『신생』과 『신곡』


이승하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중세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단테는 『신생』과 『신곡』을 썼다. 서정시를 덧붙인 산문 『신생』에서 단테는 자신의 첫사랑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과정을 설명한 뒤 그녀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해 열렬히 찬미한다. 『신곡』은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정치적인 이유로 피렌체에서 추방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한 인간의 운명과 방황과 구원의 과정을 가톨릭적 시각으로 그린 작품이다.


단테 등장의 역사적 배경


피렌체는 단테가 태어난 1265년 무렵, 일종의 도시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상업이 발달하여 대외 무역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의 입김을 막지 못해 휘청거릴 때가 많았다. 그것 때문에 당파끼리 혹은 집안끼리 살육전을 전개하는 분쟁에 휩싸일 때도 있었다. 단테가 살던 시절에는 교황이 유럽 각국의 왕들보다 더 강하게 정치적 권력을 휘둘렀는데, 몇 가지 예를 든다.


단테 출생 이전인 11세기에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칙령을 발표하여 군주에게 가 있던 성직 임명권을 폐지할 것을 명하였고, 성직을 매매하거나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영을 내렸다. 신성로마제국(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명령에 불복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황제를 교적에서 삭제하여 교계에서 영구히 ‘파문’시키겠다고 선언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벗기 위해 1077년 1월, 북부 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에 체류하고 있는 그레고리 7세를 찾아갔다. 엄동설한 중에 얇은 베옷을 입고 성문 앞에서 사흘 밤낮을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해 겨우 파문 해제의 승낙을 받았다. 이것이 세계 역사상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이 일 이후 유럽 사회에서는 왕들이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하는 교황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와신상담, 복수할 기회를 엿보던 하인리히 4세는 제후들과 힘을 합쳐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고 대신 클레멘스 3세를 교황으로 옹립했다. 하인리히 4세의 임무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교황청이 자리 잡고 있는 로마로 진군해 도시를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결국 교황은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이탈리아의 제후들은 교황 편인 겔프 당(Guelfs)과 황제 편인 기벨린 당(Ghibellines)으로 나뉘어 당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로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기도 했다. 교황 이노센트 3세 시절부터 겔프 당의 세력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노센트 3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帝位 분쟁에 개입하여 황제인 오토 4세를 파문한 뒤에 프리드리히 2세를 옹립하였고, 프랑스의 왕 필립 2세를 파문하였다. 영국의 존 왕에 대해서는 파문을 함과 동시에 신하의 예를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냈다.


단테가 태어났을 때의 교황은 보니파키우스 8세였는데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고, 그 힘은 전쟁도 불사할 정도였다. 즉 당시의 교황은 지금과는 달리 유럽 각국의 왕들 위에 군림하며 호령을 하고 있었다. 단테 출생 1년 뒤인 1266년, 겔프 당은 프랑스 출신인 샤를 장군의 지휘 아래 나폴리 북서쪽 베네벤토에서 기벨린 당의 군대를 최종적으로 섬멸하였다. 승리를 거둔 겔프 당은 1301년이 되자 네리 파(도나티 가문 중심)와 비앙키 파(체르키 가문 중심)로 분열되어 당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시금 빨려 들어가게 된다.



단테의 집안이 속한 비앙키 파는 교황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피렌체의 독립을 지켜나가자고 했고, 적대적인 네리파는 기회주의에 편승하여 힘이 센 교황을 지지하고 나섰다. 비앙키 파는 상인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고 네리 파는 귀족계급의 권위를 옹호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는 귀족들의 힘이 더 셌던가 보다. 격렬한 시가전 끝에 네리 파가 승리하여 비앙키 파는 일망타진된다.


단테가 서른다섯 살 때인 1300년이었다. 그는 그 무렵 피렌체를 다스리는 6인의 행정위원(지금의 장관) 중 한 사람이었다. 당파싸움에 휩쓸리지 않았더라면 단테는 고급관리로 살다가 이름 없이 죽었을 것이다. 1301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피렌체와 로마 사이에 있는 토스카나 지방을 교황청에 예속시키려고 하였다. 즉, 토스카나 지방을 교황청 관할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자 피렌체 당국은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단테에게 이를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파견하였다.


두 당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전개할 때 마침 단테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피렌체를 떠나 있었다. 그 덕에 목숨을 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네리 파의 승리로 싸움이 끝났기에 고향 피렌체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교황청의 비호로 정권을 잡은 네리 파는 조국을 떠나 있던 단테에게 공금횡령죄를 뒤집어씌우고는 궐석재판에서 벌금 납부, 2년간의 귀양살이, 공민권 박탈이라는 벌을 내린다. 그리고는 빨리 귀국하여 법원에 출두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단테는 그 처분이 부당하다고 항의의 서한을 보낸 뒤 법원의 출두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재판부는 단테에게 영구추방령과 전 재산 압수의 엄벌을 추가로 내린다. 자연히 1302년부터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한 채 망명길에 오르게 된 단테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것뿐,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신곡』이다. 이 도시 저 마을을 방랑하면서 단테는 필생의 대작 『신곡』을 구상하고 1307년(42세)부터 집필을 시작, 13년에 걸쳐 완성한 뒤 곧바로 숨을 거둔다.


딱 한 번 귀국 길이 열린 적이 있었다. 50세 때인 1315년이었다. 네리 파는 사면령을 내려 망명자들을 불러들인다. 단테도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고만 하면 돌아갈 수 있었지만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귀국하지 않는다. 그러자 다시 궐석재판을 연 네리 파에서는 단테가 이제는 귀국하면 화형에 처한다는 어마어마한 형을 선고한다. 단테는 베로나로 가서 어느 귀족의 후원 아래 글을 쓰기도 했었지만 대부분 이탈리아의 이런저런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여관방이나 수도원의 빈방 같은 데서 글을 썼다. 외로운 망명 생활 가운데 그의 영혼은 늘 첫사랑 베아트리체의 영상을 좇고 있었다.


베아트리체와의 짧고 슬펐던 사랑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외롭게 자라던 소년 단테는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웃 마을의 지체 높은 귀족 집안의 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간다. 단테는 첫 만남의 순간을 1291년에 펴낸 『신생』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신생』은 자전적인 내용인데, 주로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의 전말을 산문과 운문을 섞어 쓴 것이다. 잔칫집에서 베아트리체는 눈에 띄게 예쁜 소녀였던가 보다. 기품 있어 보이는 고상한 자주색으로 테두리를 한 옷을 입은 소녀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니 단테는 조숙한 소년이었음에 틀림없다. 한 살 아래인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의 순간 소년 단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전율을 느끼며 소녀의 모습에 매료된 것이다. 이날 이후 단테는 소녀와 마주칠 것을 기대하며 길을 걸었지만 좀체 만날 수 없었다.


단테는 그녀의 꽁무니만 쫓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명으로 산타크로체 수도원의 기숙학교에 가게 되는데 특히 수사학에 관심을 쏟게 된다. 단테는 라틴어 외에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에 정통하였고 춤과 노래, 그림 같은 예술 외에 법률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것은 뒷날 『신곡』 집필에 큰 도움을 준다. 그는 로마 시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존경하여 그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꿈을 키워간다. 수도원에서의 공부를 마친 시점은 1282년이었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공부는 이것으로 끝’ 하면서 고향 피렌체로 향했다.


집에 머문 지 1년쯤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단테는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 강가에 두 여인과 함께 산책 나온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시간은 오후 3시경이었다. 이날의 상황도 『신생』을 보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이 재회의 상황은 대단히 유명하여 헨리 홀리데이란 화가가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헨리 홀리데이가 그린 그림 <단테와 베아트리체>(1883년, 리버풀 머지사이드 미술관 소장)


이날 이후 단테는 상사병을 심하게 앓아 몸이 쇠약해지는 상태에 이른다. 단테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새어머니는 결혼을 시켜주면 기운을 차리리라 생각하고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여 단테의 결혼을 서두르게 된다.


여러 해 전인 1277년, 열두 살의 단테는 젬마 도나티와 혼인 약속을 하였다. 우리나라도 자유연애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한 일이었고, 그 이전에는 부모가 정혼해 준 대로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도 그 시절에는 집안 어른끼리 약속을 하면 자식은 그것에 따라야지 연애를 하여 결혼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양가 부모가 약속을 해두면 두 자식은 성인이 되어 혼례를 치르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고, 단테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두 살 어린 젬마의 손가락에 끼워줄 약혼반지를 준비해야만 했다.


젬마는 통상적인 지참금의 두 배나 되는 돈을 단테의 집으로 보냈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었기 때문에 단테는 차마 파혼할 수 없었다. 만약 단테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젬마와 결혼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경우, 큰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젬마의 아버지는 단테 집안의 어른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집안은 주거지가 너무나 가까웠고, 농지도 서로 접해 있었다. 집안의 두 어른이 나이가 얼추 맞는 단테와 젬마를 약혼시킨 것은 당시의 관례로 보면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1285년, 그러니까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강가에서 재회하고 나서 2년 뒤였다. 단테는 사랑하는 사람이 엄연히 따로 있건만 어렸을 때 양가 두 어른이 구두로 약속하여 반지까지 끼워줬던 젬마라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린다. 두 사람 사이에 네 명의 자식이 태어나지만 단테는 자신의 어떤 작품에서도 아내의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결혼생활이 위기에까지 이르거나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운명의 여신은 단테의 소망에 또다시 어깃장을 놓는다. 베아트리체 역시 아버지의 영을 거역할 수 없어 집안에서 어렸을 적에 정해놓은 사람과 1287년 결혼을 한 것이다. 남자 쪽에서는 재혼이었고 여자 쪽에서는 초혼이었다. 부자 집안인 그녀가 가져간 지참금은 금화 600리라로, 젬마가 단테 가문에 가져간 액수의 4배나 되는 거금이었다.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하더니 심술을 한 번 더 부린다. 베아트리체가 24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단테가 16년 동안 남몰래 쌓아 올린 간절한 사랑의 탑은 그날로 산산이 무너져 내린다. 사망의 이유로는 돌림병에 결려 죽었다는 것과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는 것 두 가지 설이 있다. 『신생』에서는 베아트리체가 세 번째의 만남 이후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으로 처리한다.


단테는 몇 번 쳐다보기만 하고서 베아트리체를 그렇게 사랑했던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 다소나마 ‘교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단테의 전기 『단테의 삶』을 쓴 보카치오는 이 점을 부인, 별다른 교제가 없었다고 했다. 아마도 서로 깊이 사귀면서 사랑을 나눴더라면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구원의 여성’으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가를 잘 정리하여 말한 상티스는 단테에게 있어 베아트리체는 “미, 덕, 지혜의 상징이고 영원한 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아름답고 새로운 천사이자 아직 인간화되지 않은 신성을 지녔으며 실현되지 않은 이성”이었다고 했다.


『신곡』에 대한 후세의 평가


베아트리체의 영상은 『신곡』에서 천사로 구현된다. 『신곡』은 거의 같은 길이의 100곡, 전 1만 4,233행으로 된 방대한 시이다. 줄거리는 단테가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1300년의 부활절을 맞아 한 주일 동안 여행하는 도중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쓴 여행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숲 속에서 단테가 헤매고 있을 때 현자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하여 구원해 줄 것을 약속하는데, 이 베르길리우스는 사실 저승에 가 있는 베아트리체의 간청으로 타락한 단테를 구원하러 온 것이었다. 천국편의 안내자는 베아트리체다. 단테는 자신이 타락한 생활과 죽음의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늘나라의 베아트리체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덕분이라고 생각하여 『신곡』을 이와 같은 형식으로 썼던 것이다.


단테는 1321년, 라벤나의 영주인 노벨로의 보호를 받으며 『신곡』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한다. 단테는 노벨로의 부탁을 받고 베네치아에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해는 라벤나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첫사랑을 만났던 고향 피렌체에는 끝끝내 가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었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은 “근대 세계는 셰익스피어와 단테가 나눠 가졌다. 제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함으로써 중세와 르네상스기의 문인 중 단테에 필적할 사람은 셰익스피어밖에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한 바 있다. 공산주의혁명 이론가 엥겔스도 종교적 상상력의 산물인 『신곡』의 가치를 인정, “봉건적 중세기의 종결과 근대적 자본주의의 단초는 한 위대한 인물을 표지로 삼을 수 있다. 그 인물이 바로 이탈리아의 단테다. 그는 중세기 최후의 시인인 동시에 신시대 최초의 시인이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바친다.


『신곡』의 겉은 애절하고도 처절한 사랑이야기지만 속은 좀 다르다.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는 자들의 죄는 크게 나누어 무절제, 폭력, 사기이다. 지상에서 권력을 갖고서 그것을 휘두르며 남을 괴롭힌 자는 저승에 가서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쓴 부분이기에 사실 지옥편은 단테 자신의 한풀이의 성격이 강했다. 한편 연옥은 희망을 갖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자 죄를 정화하고 있는 영혼들의 세계다. 하느님이 언젠가는 구원해 줄 것이라 믿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 연옥이다. 연옥편의 의의는 인간이 자유의지의 소유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회개하면 저승에 가 있더라도 하느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이라고 단테는 주장하였다.


천국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는가. 단테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확실한 믿음을 갖고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기를 늘 소망하며, 살아 있을 때 사랑을 실천한 이라면 광명의 세계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행복을 누릴 거라고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무조건적인 믿음이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의 투쟁을 통해 승리한 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하여 인간의 선의지를 강조하였다.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중요성을 단테는 강조했는데 바로 그것을 알려주는 이가 베아트리체이다. 사랑의 실천, 『신생』과 『신곡』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망명지를 떠돈 외로운 정객 단테는 끊임없이 젊은 날의 사랑 베아트리체를 떠올렸고, 그녀를 통해 악을 물리치는 선의 힘을 보여주어 두 작품을 불후의 명작이 되게 했다. 『신곡』이 700년이 넘은 지금도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허황된 저승 여행담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에 대한 저자의 확실한 인식 아래 씌어졌기 때문이다. 중세의 암흑을 밝힌 위대한 작가가 단테이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있는 도메니코 디 미첼리노의 그림 <단테와 신곡>(피렌체 시민들이 1465년 단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미첼리노에게 주문해 그린 작품)


위 글에는 『신생』과 『신곡』 두 편의 작품에 대한 분석은 빠져 있는데 훗날 상세하게 작품 분석을 하여 문학평론집 『욕망의 이데아』(케이엠)에 실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 이야기는 졸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에 상세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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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와 김건희


땅벌

다람쥐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성공은 끝이 아니다


진실은 가끔 달의 뒷면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달의 앞면이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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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Bae, Bai, Bea

통용 표기 Bae


한국의 배(裵)씨는 문헌에 총 59본관[1]이 있으며, 성씨 인구순위는 26위로 2015년 기준 400,641명이다.[2]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배씨 대종회 기록에 의하면 배씨의 뿌리는 2천여 년 전 신라 건국 초기의 시대로 올라간다. 배씨는 한국의 대표 성씨로 일찍이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다. 고을 이름 비(非) 인명용 중국한자는 裴로 쓴다. 설문해자는 배(裵)는 긴 옷을 입은 모습이다. 의(衣)로 구성되고 비(非→배)가 소리라고 한다.

한국 배씨(裵氏)의 기원은 크게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신라 시대에 사성 받은 배씨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사성받은 배씨이다.

진한 개국 설화에 의하면, 사로 6촌(斯盧六村) 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촌장 지타(祗陀, 只他)는 다른 6부 촌장들과 함께 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였다. 32년 신라 유리왕은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가리부(加利部)를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배(裵)씨 성을 사성하였다. 정사(正史)에 처음 등장하는 배씨는 신라 성덕왕 때의 상대등(上大等) 배부(裴賦)[3]이며, 희강왕 때의 아찬(阿飡) 배훤백(裵萱伯)의 기록과, 정강왕 때의 현령(縣令) 배영숭(裵零崇)의 사적이 확인되며 현재는 계대를 고증할 보첩이 실전되어 각 본관마다 시조를 달리하고 있다.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의 처음 이름은 백옥(白玉) 또는 백옥삼(白玉衫)으로 성씨가 없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배씨 성을 사성받았다.

경주 배씨(慶州裵氏) 시조 배현경(裵玄慶)의 본명은 백옥삼(白玉衫)이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오르고 대광(大匡)을 역임했으며, 배씨 성을 사성받았다. 조선시대 인물인 배충과(裵忠果)를 중시조로 삼으며, 배충과는 의술(醫術)에 능하여 조선 중종 때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에 제수되었으며, 경주처사(慶州處士)의 호(號)가 내려졌다.

한국의 배씨는 조선 중기부터 裵字를 사용해 오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한자 裴字를 사용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고래의 자전에서 "裵"字가 本來의 글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중국의 배(裴, 병음 Pei)씨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인물 백익(伯益)의 후예로 영성(嬴姓) 계통이며 비자(非子)의 12대손인 진환공(秦桓公)의 아들(子) 후자침(后子鍼)을 시조로 삼는다.

베트남에도 배(Bùi뿌이)씨가 있는데 인구 순위상 우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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