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는 이제 태백산맥이 되었다

6.3 열정(熱情)의 포플러는

by 강산





벌교는 이제 태백산맥이 되었다

6.3 열정(熱情)의 포플러는





벌교에 다시 한번 다녀왔다

지난번에 다 보지 못한 곳을

좀 더 자세히 돌아보고 왔다

김범우의 집과 부용산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보고 왔다

부용산에는 참 많은 묘가 있었다

부용산과 반월산이 겹치기 시작했다


벌교는 이제 태백산맥이 되었다







입력 2025.06.26 22:00 수정 2025.07.15 06:42

[문학리터러시] 백석의 시와 한 여인과의 사랑



시인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일본 아오야마학원에서 수학했다. 시집 『사슴』으로 한국 현대시의 독창성을 보여준 그는 민속성과 향토적 언어로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했다. 기생 자야(김영한)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깊이 녹아 있다. 자야는 후일 요정 대원각을 기증하고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백석은 1996년 북한에서 생을 마쳤다.


한국 시문학사의 크나큰 자랑인 백석(白石)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정주에 있는 오산고보를 나와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한 뒤 몇 편의 산문과 번역소설 및 논문을 남기고 있으나 1935년에 시 「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부터는 시 쓰기에 주력했다.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 영생고보(함흥), 영생여자고보, 여성사, 왕문사(일본 동경) 등에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했는데 평생토록 어느 동인이나 유파에 소속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향토적이고 민속적이면서 독특한 자기만의 이야기성(性)을 확보하게 된 것이 아닐까.

1936년 1월, 33편의 작품을 4부로 나누어 편성한 시집 『사슴』을 간행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분단이 되기까지 60여 편의 시를 자신이 관여했던 『여성』지를 비롯해 여러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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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여성』 3월 호 에 실린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와 정현웅 화가의 삽화


백석은 정주의 풍습과 생의 비극성을 즐겨 시의 소재로 삼았다. 마을에 전승되는 민속과 속신 등을 소재로 하여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과 인생 철학의 단면을 토착어로 제시한 시는 이전의 한국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백석만의 것이다. 어린 시절로 회귀하여 떠올려본 고향은 대개 감상적이게 마련이지만 백석은 자신의 눈에 비친 고향과 고향사람들의 일상을 담담히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백석이 사랑한 여성 중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를 쓰게끔 한 기생 진향(眞香)이 있다. 본명 김영한(金英韓)인 이 여성은 1915년생으로, 백석에 비해 세 살 연하다. 백석은 이 여성을 자야(子夜)라고 부르며 사랑하였다. 고 법정스님이 죽 관여한 길상사의 전신인 요정 대원각의 여주인이다. 김영한 여사는 시가 천억 원이 넘는다는 대원각을 흔쾌히 시주한 여장부이자 한때 기생으로 이름을 드날린 명기였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밤 힌당나귀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산골로가 마가리에살쟈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써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것이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전문(『여성』 3권 3호, 1938. 3)


가난한 화자는 깊은 산골에 은둔해 있다. 그는 나타샤를 애타게 기다리는데, 나타샤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제일 마지막 연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다. 즉, 이 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는 진향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한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백석이 자야를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가을, 함경남도 함흥에서였다. 백석은 시집 『사슴』을 낸 그해, 조선일보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함흥시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었다. 백석은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난 촌사람인데 2년여 서울 생활을 하는 동안 지쳐 있었다. 영생고보에 있던 문학평론가 백철이 같이 있자며 불렀고, 머리나 식힐 요량으로 함흥으로 갔던 것이다. 일본 아오야마학원을 우등으로 나온 실력에 서울서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이라 영생고보에서는 아주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다.

김영한은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집안이 망하자 1932년 조선권번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었다. 한국 가곡의 명창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과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신윤국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신윤국이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자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잠시 머물러 있던 터였다.

진향은 그때 스물세 살 꽃다운 나이였고 백석은 스물여섯 살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기생 진향을 옆에 와 앉으라고 한 백석은 술잔을 진향한테만 권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자리가 파하여 헤어지면서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요”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백석은 진향이 머문 하숙집에 수시로 찾아와 만주에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내뱉곤 했는데, 그 말 또한 진심임을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다. 백석은 진향의 손목을 들여다보며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했다.

진향은 기생이었기에 백석의 ‘숨겨 놓은 애인’이 될 수는 있었을지언정 아내는 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운명은 여기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던 셈이다. 진향이 백석에게 『唐詩選集』을 선물하자 백석은 이백의 「子夜吳歌」를 읽더니 진향을 ‘자야’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본명 김영한과 기명 진향은 사라지고 자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백석은 시집 『사슴』을 낸 그해, 조선일보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함흥시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었다.(이미지 :Wikipedia)


그때 서울에서 살던 백석의 부모는 장가를 가라고 성화였다. 쉰이 넘은 백석의 어머니가 손자를 보고 싶다고 조바심을 냈다. 한 집안의 장남이 객지를 떠도니까 가정을 꾸려 안정을 취하라고 친척들도 번갈아 가며 충고했다. 자야 역시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좋은 배필을 만나야지, 기생 치마폭을 잡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성혼을 부추기곤 했다. 그 다음해 백석은 집에 다녀왔는데, 혼례를 치른 뒤 사흘 만에 달아나듯이 집을 나와 함흥으로 온 것이었다. 자야는 백석의 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갔다.

1937년 4월에는 백석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4월 7일에 백석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처녀 란(蘭)이 결혼을 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백석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신현중이란 이와. 자야는 백석의 애인 정도였고, 란과 결혼을 하기 원했던 것 같은데 무너진 사랑탑이 돼버린 것이다.

그 다음 해, 그러니까 1938년 봄이었다. 자야는 청진동에 작은 집을 구해 기예를 닦고 있었는데 웬 아이가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것으로 속히 와 주시오.’

자야가 제일은행 부근 오뎅집에서 백석을 보는 순간, 모든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스스로 평생 시인을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임을 깨달았다. 밤차로 함흥으로 떠나는 백석을 배웅하면서 자야는 시인의 아내가 누구든지 간에 평생 백석을 사랑하리라 굳게 결심했다.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교사였던 백석은 전선(全鮮) 고보 축구대회에 참가하려고 선수들을 인솔해 서울로 다시 왔다. 와서는 선수들을 돌보지 않고 일주일 내내 자야 곁에만 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영생여고보로 전보 발령이 난다. 선수들이 유흥장에 간 것이 합동단속교사에게 적발된 것이다. 몇 달 뒤 백석은 사표를 써 우편으로 부치고는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여성』지 편집을 하다가 조선일보사로 다시 들어갔다.

백석은 자야와 청진동에다 아예 살림을 차렸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가 딸린 작은 찬방으로 된 집은 그들의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백석의 시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집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앞부분(『학풍』창간호, 1948. 10)


이 시는 유종호 등 많은 사람이 한글로 쓴 시 가운데 최고봉으로 꼽고 있다. 먼 이역 땅에서 애인과 가족과 벗들과 헤어져 살다 보니 외로움과 상실감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외딴곳이라 더욱 외롭지만 소외된 자신의 처지를 정신력으로 이겨내려는 화자의 생에 대한 의욕을 상징하는 것이 갈매나무이다.

훗날 김영한 여사는 이런 말을 한다.

“넥타이를 하나 선물했더니 보는 사람마다 좋다고 하더라며 저녁때 들어와서 몇 번이고 넥타이 잘 고른 제 안목을 칭찬해 주던 그분의 자상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제 생애에서 그때만큼 밥 짓는 것이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고기보다는 나물 반찬을 좋아했지요.”

백석의 첫 부인은 아마도 크게 낙심한 채 친정으로 갔을 것이다. 자야와의 살림살이를 알고 있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새장가를 들이기로 했다. 1939년 6월이었다. 어느 날 백석은 자야에게 충청도 진천으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아, 그쪽 사람과 혼인을 하러 가는구나.’ 자야는 짐작했다. 부모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해온 백석인지라 부모님의 간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보름이 넘게 아무 소식이 없자 자야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짐을 싸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시각에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자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망설이다가 에라 얼굴이나 보고 완전히 헤어지자고 얘기해야지 하는 생각에 자야는 황급히 나가보았다. 백석은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얼굴을 보니 자야의 독한 마음은 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백석은 두 번째 아내를 버려두고 또다시 자야한테 달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이런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백석은 모든 것 다 팽개치고 만주로 가서 숨어살고 싶었다. 자야한테 같이 가자고 몇 번 권했지만 그녀는 기생으로서의 생활이 있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해 말, 백석은 만주의 신경으로 떠났다. 오랜 꿈을 이룬 것이었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번역하여 출간하고자 서울에 잠시 다녀간 것이 1940년이었고 그 이후 백석은 남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만주 안동으로 옮겨 세관 업무를 보기도 했지만 함흥고보 제자가 찾아가 보니 중년의 초라한 모습이 되어 있었고, 생활도 궁핍하게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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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김영한) 여사는 해방 후 기생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다. 재산을 정리하여 2억 원을 만들었다. 그 돈을 백석문학상의 제정에 써달라고 기탁하여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여사는 1999년에 작고했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이미지 : 나무위키)


김영한 여사는 해방 후 기생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다. 요정 대원각을 인수해 장안 최고 요정의 명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매불망 잊지 못하고 있던 백석을 위해 그녀는 무엇인가 하기로 결심한다. 요정은 기증하였고 나머지 재산을 정리하여 2억 원을 만들었다. 그 돈을 백석문학상의 제정에 써달라고 기탁하여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김 여사는 1999년에 작고했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

월북 시인이 아니라 재북(在北) 시인이었던 백석은 1945년 말 북한에서 재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북한에서 1962년까지 체제와 이념에 부합하는 다수의 시를 썼지만 이후 붓을 꺾고 집단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1996년에 작고했다.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즉 장장 33년 동안이나 붓을 꺾고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남쪽의 ‘자야’가 그렇게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도 분단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써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것이 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것이다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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