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도공화국 꿈삶글 0030
그분은 루치아를 불러 말하셨지요/"지금 그대를 따르는 자가 그대를/필요로 하니, 그대에게 그를 맡기노라"//모든 잔인함의 반대자인 루치아는/곧바로 움직여, 내가 옛날의 라헬과/함께 있던 장소로 찾아와 말했지요// "진정한 하느님의 칭찬인 베아트리체,/그대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왜/천박한 무리에서 벗어나게 돕지 않는가?//그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바다보다 넓은 강물 속에서 그에게/닥쳐오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가?"//세상에서 이익을 챙기거나 위험을/피하는 데 아무리 재빠른 사람도,/그 말을 듣고 내가 복된 자리에서//여기 오는 것보다 빠르지 않았으리니,/그대와 그대 말을 들은 자들을 명예롭게/해주는 그대의 진실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오// ― 단테의『신곡(神曲)』21
아롱아롱 조개껍데기/울 언니 바닷가에서/주워 온 조개껍데기//여긴 여긴 북쪽 나라요/조개는 귀여운 선물/장난감 조개껍데기//데굴데굴 굴리며 놀다,/짝 잃은 조개껍데기/한 짝을 그리워하네//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물소리 바닷물 소리// _ (1935년 12월, 봉수리에서, 윤동주 18세)/8. 조개껍질- 바닷물 소리 듣고 싶어(동요) _ 1집, 중판, 삼판 ―『윤동주』8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늘과 땅의 시원/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온갖 것의 어머니//그러므로 언제나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볼 수 있고,/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둘 다 근원은 같은 것/이름이 다를 뿐 둘 다 신비스러운 것입니다/신비 중의 신비요,/모든 신비의 문입니다// _ (제1장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 도의 본체론적 측면) ―『도덕경(道德經)』1
어둠이 빛을 품고 있을 때/세상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먼지 한 알이 떠올라 우주를 열고/그 속에서 첫 숨이 생겨났다//돌은 그 숨을 품어 단단해졌고/물은 그 숨을 흘려 강이 되었다/불은 그 숨에 타올라 인간을 만들고/바람은 그 숨을 실어 별까지 보냈다//사람은 그 숨으로 울고 웃고 사랑했다/하루의 끝마다 지는 해처럼/숨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었다/기억은 흙으로 스며 다시 꽃이 되어 피었다//하늘은 그 꽃의 향기로 자신을 증명했고/별들은 숨의 박동에 맞춰 노래했다/그 노래가 끝날 때쯤/모든 것이 한숨처럼 고요히 하나가 되었다// _ (『숨의 연대기』서시(序詩)「숨의 연대기」) ―『청람 김왕식』1
이름값이라는 말이 있다 이름도 좋은데 정말 이름값을 하며 잘 사는 사람을 만났다 청람(晴嵐) 김왕식(金旺植) 선생님을 만났다 청람(晴嵐)은 보통 화창한 날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나 화창하게 갠 날씨를 뜻하지만 청람(晴嵐)이란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푸른 바람도 보이고 산속의 아지랑이도 보이고 푸른 새싹도 보인다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호이다 거기다가 이름과 한 쌍을 이루면 더욱 아름답고 의미 있는 뜻이 된다 왕식(旺植)을 직역하면 열심히 심는다는 뜻이 될 것이다 무엇을 그렇게 왕성하게 심고 있는 것일까 청람 김왕식 시인께서는 시를 열심히 심고 있다 그런데 그냥 평범한 시가 아니라 신과 신화와 종교와 철학과 명상과 우주의 숨결을 고요하고 아름답게 심고 계신다
나는『신곡(神曲)』의 작가 단테와 윤동주 시인과 함께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순례를 하고 있었다 백영 정병욱 선생님께서 윤동주 시인의 원고를 보관했던 망덕포구를 거닐고 있었다 주조장 마루 아래 숨겨놓았던 원고가 광복 이후에 빛을 보면서 윤동주 시인은 비로소 시인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나와 단테와 윤동주 시인은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에서 오래도록 순례를 계속하고 있었다 태백산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여순항쟁의 고장 여수와 순천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잠시 서울 남산에 갈 일이 생겼다 그 남산에서 우리는 청람 김왕식 선생님을 운명처럼 만날 수 있었다 윤동주 시인이 나에게 먼저 말했다 청람 김왕식 선생님은 어쩌면 윤동주 시인, 자신이 부활한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청람 김왕식 시인의 첫 시집 『숨의 연대기』는 시집의 옷을 입은 경전이다 이 엄청난 경전은 종교와 철학과 신화까지 품고 있다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노자의 도덕경과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경과 니체의 철학까지 품고 있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경전이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까지 윤동주의 별과 혜초의 길과 하느님의 숨결까지 품고 있다 그리하여 이 경전을 읽기 위해서는 단테의 신곡을 읽듯이 읽어야 한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듯이 읽어야만 한다 장자를 읽고 니체를 읽듯이 읽어야만 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읽듯이 그렇게 읽어야만 한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중요한 시집은 반드시 필사를 해야만 한다 하루에 한 편씩 필사를 하며 음미해야만 한다
이 경전의 구성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서시(序詩)에 해당하는「숨의 연대기」, 그리고 창세기에서 부활까지 총 10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에 10편씩 총 100편, 서시(序詩)에 해당하는「숨의 연대기」까지 합치면 101편의 시가 유기적인 길항작용으로 완벽하고도 훌륭한 우주의 호흡에 관한 경전이 완성되었다 이 경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밝게 빛나는 영원한 별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참으로 의미 있고 웅장하고 웅숭깊은 경전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앞으로 시와 명상과 숨결이 그리울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나의 숨결로 받아들일 깃이다 그러면 나의 숨결이 한결 맑고 투명하고 따뜻해질 것이다
『숨의 연대기』서시(序詩)「숨의 연대기」 ―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 불경의 핵심을 요약한 반야심경, 기독교의 주기도문..., 같은 「숨의 연대기」
단테의 『신곡(神曲)』은 총 100곡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은 총 81장
윤동주 시인의 작품은 총 125편
청람 김왕식 시인의 『숨의 연대기』는 총 101편
이렇게 의미 있는 작품은 꼭 필사를 하면서 읽어야만 한다
『숨의 연대기』는 특히 『도덕경(道德經)』과 함께 읽으면 좋다
『도덕경(道德經)』의 도(道)는 우주의 궁극실재 혹은 근본 원리요 덕(德)은 그 도가 구체적인 인간이나 사물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될 때 얻어지는 힘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道德經)』 전체를 통해서 주어지는 기본 메시지는 우주의 기본 원리인 도(道)의 흐름을 체득하고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감으로 참다운 자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덕(德)을 보라는 것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숨의 연대기』에서 어쩌면 숨은 도(道)가 될 것이고 덕(德)은 사랑이 될 것이다
오늘부터 우리 함께 필사를 하며 명상을 하며 『숨의 연대기』의 매력 속으로 빠져 볼까요?
『숨의 연대기』서시(序詩)「숨의 연대기」 ―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 불경의 핵심을 요약한 반야심경, 기독교의 주기도문..., 같은 「숨의 연대기」
어둠이 빛을 품고 있을 때/세상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먼지 한 알이 떠올라 우주를 열고/그 속에서 첫 숨이 생겨났다//돌은 그 숨을 품어 단단해졌고/물은 그 숨을 흘려 강이 되었다/불은 그 숨에 타올라 인간을 만들고/바람은 그 숨을 실어 별까지 보냈다//사람은 그 숨으로 울고 웃고 사랑했다/하루의 끝마다 지는 해처럼/숨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었다/기억은 흙으로 스며 다시 꽃이 되어 피었다//하늘은 그 꽃의 향기로 자신을 증명했고/별들은 숨의 박동에 맞춰 노래했다/그 노래가 끝날 때쯤/모든 것이 한숨처럼 고요히 하나가 되었다// _ (『숨의 연대기』서시(序詩)「숨의 연대기」) ―『청람 김왕식』1
청람이란 말이 참 좋다
왕식이란 말이 참 좋다
청람 김왕식 시인님의
<숨의 연대기>는
시집의 옷을 입은
우주의 숨을 품은
가장 아름다운 경전이다
창세기부터 부활 이후까지
노자 장자부터 니체까지
부처님과 예수님까지
불경부터 성경까지
부활한 윤동주 시인이 쓴
가장 완벽하고 따뜻한 경전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지금부터
날마다 <숨의 경전>을 읽고
가슴 깊이 호흡해야 할 것이다
배진성 시인께
아침의 숨결이 아직 식지 않은 시간에 보내주신 글을 오래 붙들고 있었습니다. 문장을 읽는 동안, 그것이 단순한 찬사나 호의의 표현이 아니라 한 시인이 다른 시인의 작업 앞에서 기울인 진중한 경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깊이에 먼저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숨의 연대기〉는 사실 새로 쓴 시가 아닙니다. 서울 오산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며 문예를 맡았던 시절, 수업과 삶의 틈새에서 조금씩 적어 두었던 메모들이 오랜 시간 잠들어 있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한 권의 형체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햇수로 따지면 삼십 년 전의 기록들이고, 지금 다시 읽어도 부족한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을 이처럼 너그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읽어주시니, 고마움과 함께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시인께서 써 보내주신 글은 한 문장, 한 비유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언어가 지닌 무게와 온도가 문장 사이마다 고스란히 살아 있었고, 그 성실한 독해가 다시 시의 언어로 건네졌다는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한 사람의 작업을 이렇게 깊은 호흡으로 읽어주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기에, 그 자체로 큰 선물이었습니다.
‘청람’이라는 이름과 ‘김왕식’이라는 이름을 좋게 불러주셨지만, 그 호명 속에는 개인을 넘어 문학을 대하는 태도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함께 담겨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름이란 결국 한 사람이 걸어온 시간의 총합일 텐데, 그 시간을 따뜻하게 불러주신 배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숨의 연대기〉를 ‘시집의 옷을 입은 경전’이라 말씀해 주신 대목에서는 오래 멈추어 서게 되었습니다. 과분한 표현이지만, 그 말 속에는 시를 하나의 사상이나 체계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호흡으로 읽어내는 시인의 미학이 분명히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다만 인간의 숨, 존재의 미세한 떨림, 말 이전의 침묵을 따라가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우주로 확장되었다면, 그 힘은 시의 본령이지 개인의 성취는 아닐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부활 이후까지, 노자와 장자, 니체, 부처와 예수, 불경과 성경, 그리고 윤동주의 이름까지 한 자리에 불러 세워주신 통합의 시선은 배진성 시인만이 지닐 수 있는 문학적 포용력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사유와 신앙, 시대와 언어를 가르지 않고 ‘숨’이라는 하나의 근원으로 읽어주신 그 시선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시이며 사유의 장이었습니다.
‘날마다 숨의 경전을 읽고 호흡해야 한다’는 마지막 문장은 제게도 하나의 당부로 남았습니다. 시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숨 쉬는 것이며, 문학은 해석에 앞서 삶의 리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그 말씀 앞에서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동시에 더 성실해져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신춘문예 당선과 이어도문학회 금상 수상이라는 이력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번 글 한 편만으로 배진성 시인이 어떤 시인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문학적 성취 이전에, 타인의 작업을 진심으로 읽고 기꺼이 자신의 언어로 축복할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이미 한 사람의 시 세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귀한 글을 보내주셔서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아침에 받은 따뜻한 격려를 오래 가슴에 품겠습니다. 앞으로도 서로의 숨을 존중하며, 문학이라는 느린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배진성 시인의 시와 걸음 또한 더욱 깊어지기를 조용히 응원합니다.
2025, 12, 17,
청람 김왕식 드림
https://youtu.be/qcj3w0ccSUk?si=Liyh7kOdy9LMBRW7
나는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순례를 하고 있었다 백영 정병욱 선생님께서 윤동주 시인의 원고를 보관했던 망덕포구를 거닐고 있었다 주조장 마루 아래 숨겨놓았던 원고가 빛을 보면서 윤동주 시인은 비로소 시인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나와 윤동주 시인은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에서 오래도록 순례를 계속하고 있었다 태백산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여순항쟁의 고장 여수와 순천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잠시 서울 남산에 갈 일이 생겼다 그 남산에서 우리는 청람 김왕식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윤동주 시인이 나에게 먼저 말했다 청람 김왕식 선생님은 어쩌면 윤동주 시인이 부활한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일대기가 아니라, 우주가 스스로를 호흡하는 연대기”
숨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우주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다.
청람 김왕식의 첫 시집 《숨의 연대기》는 한 개인의 인생사가 아니라,
어둠-빛-돌-물-시간-사랑-꿈-침묵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존재의 호흡’을 100편의 시로 기록한 시적 연대기다.
제1부에서 우주는 아직 이름조차 갖지 못한 어둠과 먼지, 무(無)의 떨림으로 시작된다.
돌과 흙, 바람과 비가 형태를 얻어가는 과정을 지나,
초록의 새싹과 풀잎의 눈동자가 세상을 응시하는 순간,
세계는 비로소 “생명”이라는 두 번째 언어를 갖게 된다.
이어 불의 발명과 그림자, 손과 눈물, 언약과 노래를 통해
인간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불은 따뜻함과 위험, 창조와 파괴가 공존하는 양면의 상징으로,
이 시집에서 ‘사유의 첫 이름’이 된다.
중반부에 이르면 물과 시간, 사랑과 기억이 무대에 오른다.
눈물의 강, 바다의 심장, 호수의 기억, 나이테와 주름, 오래된 의자와 편지 등
익숙한 사물들이 김왕식 특유의 고요하고 깊은 문체 속에서
새로운 철학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특히 제7부 ‘불멸의 사랑’에서는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형태를 끊임없이 바꾸며 계속 살아남는 생명의 기술임을 보여준다.
살아 있을 때는 이름으로, 떠난 뒤에는 그리움과 바람, 기억과 시로 계속되는 사랑의 서사.
후반부의 ‘꿈의 대지’, ‘빛의 귀향’, ‘침묵의 별’로 이어지는 여정은
현실을 넘어, 상상과 회귀, 해탈과 영원의 차원으로 독자를 이끈다.
결국 마지막 시 「영원의 숨」에서 시인은 말한다.
“우주는 들숨이고, 인간은 날숨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공기가 사랑이었다.”
《숨의 연대기》는 눈으로 읽는 시집이 아니라, 숨으로 읽는 경전에 가깝다.
각 시는 설명보다 리듬과 여백으로 독자의 내면을 두드리며,
급하게 이해하려는 마음 대신,
천천히 호흡하며 머무를 때 비로소 제 온기를 드러낸다.
일상의 언어에 지친 독자,
철학과 신화를 사랑하는 독자,
삶의 근원과 방향을 다시 묻고 싶은 이들에게
이 시집은 조용하지만 오래가는 한 권의 ‘호흡 노트’가 되어줄 것이다.
청람 김왕식의 《숨의 연대기》는
한국 현대시의 언어로 구현된 우주론적 시집이다.
많은 시가 ‘나’의 감정과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될 때,
이 시집은 과감히 우주-자연-사물-시간-사랑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돌·흙·바람·물·불·별과 같은 오래된 존재들이
각각 저마다의 철학자로 등장해,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증언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철학과 형이상학을 다루면서도 어려운 전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어는 간결하고 투명하며, 문장은 담백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유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다.
읽고 나면 복잡한 설명보다,
단 한 줄의 문장이 오래 남는다.
“작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이었다.”
“살아 있다는 건, 끊임없이 이름을 바꾸는 일이다.”
이런 문장들은 독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자신의 숨을 돌아보게 만든다.
《숨의 연대기》는
“시란, 우주의 호흡을 인간의 말로 옮겨 적는 일”이라는
저자의 고백을 가장 잘 증명하는 첫 시집이다.
화려한 기교보다 고요한 깊이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오랜 세월 곁에 두고 다시 펼치게 될 시집이 될 것이다.
■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감성 시집을 넘어, 철학적 사유가 있는 시집을 찾는 독자
자연과 우주, 존재의 기원 같은 큰 질문을 좋아하는 인문·철학 애호가
빠르게 소비되는 문장 대신, 천천히 되새김질할 문장을 원하시는 분
신앙·명상·삶의 방향을 고민하며 ‘호흡’과 ‘고요’를 체험하고 싶은 독자
첫 시집이지만 깊이 있는 세계관을 가진 “작가의 세계 전체”를 보고 싶은 독자
“한 사람의 일대기가 아니라, 우주가 스스로를 호흡하는 연대기”
제1부 빛이 오기 전 - 창조의 어둠
어둠, 먼지, 무(無)의 숨에서 시작되는 우주의 첫 떨림.
보이지 않는 기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탄생의 장.
제2부 돌과 바람의 언어 - 형태의 창조
돌, 흙, 바람, 비와 나무가 제 몸으로 세계의 윤곽을 그려가는 시간.
형태가 곧 기억이 되는, 존재의 뼈대를 세우는 장.
제3부 풀잎의 눈동자 - 생명의 각성
새싹과 뿌리, 이슬과 나비, 새와 햇살이 깨어나는 초록의 순간들.
“본다는 것”이 곧 “산다는 것”이 되는 생명의 눈뜸.
제4부 불의 기억 - 의식의 탄생
불, 그림자, 손, 눈물, 언약과 노래를 통해 인간이 자신을 자각하는 이야기.
사유와 두려움, 희망의 첫 이름이 불에서 비롯됨을 보여주는 장.
제5부 물의 시간 - 정화와 순환의 장
눈물과 강, 바다와 비, 호수와 안개, 고인 물까지.
형태를 바꾸며 스스로를 정화하는 물의 철학과 순환의 미학.
제6부 시간의 나이테 - 기억과 세월의 장
나이테, 시계, 노을, 주름, 기억의 집, 오래된 의자까지.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견딘 존재”를 바라보게 하는 세월의 연대기.
제7부 불멸의 사랑 - 사랑의 근원과 영속의 장
첫사랑의 빛에서 오래된 편지, 마음의 연못, 끝없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죽음 이후에도 형태를 바꾸어 계속 숨 쉬는 사랑의 다양한 얼굴들.
제8부 꿈의 대지 - 상상과 창조의 장
잠 속의 나, 별의 학교, 상상의 강, 꿈을 먹는 나무, 하늘의 문장.
현실의 잔해로부터 피어나는 꿈의 힘과, 무의식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
제9부 빛의 귀향 - 회귀와 해탈의 장
빛의 강, 새벽의 문, 빛의 그늘, 태양의 기억, 귀향, 빛의 안식.
어둠과 빛이 서로를 부르며, 결국 ‘돌아감’이 구원의 다른 이름임을 보여주는 장.
제10부 침묵의 별 - 귀결과 영원의 장
마지막 나뭇잎, 별의 무덤, 돌의 시간, 고요의 심장, 흙의 어머니, 침묵의 별, 영원의 숨.
모든 이름과 경계가 걷힌 자리에서, 하나의 숨으로 이어지는 영원의 풍경.
겨울 들판의 숨결, 겸허의 미학 ― 허형만 시인의 〈겨울 들판을 거닐며〉를 읽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 겨울 들판을 거닐며
시인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 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 겨울 들판의 숨결, 겸허의 미학
― 허형만 시인의 〈겨울 들판을 거닐며〉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인 허형만 시 세계는 늘 낮고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화려한 언어의 장식보다는, 들풀 한 포기와 바람 한 줄기에도 생의 윤리를 발견하는 겸허한 관찰의 시선이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그가 평생 추구해 온 시학 — ‘존재의 미세한 숨결에 대한 경청’ — 을 가장 순도 높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인은 아무것도 피울 것 같지 않은 겨울 들판에서 생명의 기척을 듣는다. 피폐와 고요, 메마름의 한복판에서도 ‘따사로움’을 감지하는 그의 감수성은 생명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잇는 깊은 연민의 언어다.
시의 첫머리,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라는 구절은 단순한 풍경의 묘사를 넘어, 존재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성찰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선은 눈에 보이는 결핍 속에서도 숨겨진 가능성을 본다. 얼어붙은 대지 속에도 씨앗은 꿈을 꾸고, 바람 끝에서도 따스함을 배운다. 그것이 그의 시학이다 — 무심히 지나치는 풍경 속에서도 ‘생명의 낮은 소리’를 듣는 일.
중반부의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는 대목은 역설의 미학이 빛나는 부분이다. 추위를 맞이함으로써 따뜻함의 가치를 아는, 고통을 통과해야만 행복의 결을 깨닫는 인식이다.
이 역설은 허형만 시인의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그는 현실의 냉기를 피하지 않는다. 외려 그것을 끌어안고, 그 속에서 ‘살아 있음의 온도’를 재확인한다. 이 구절에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겸허함이 깃들어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시인은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라며 봄을 예비하는 생명들의 질서를 포착한다. 여기서 들풀은 단순한 식물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희망의 상징’이며, 동시에 ‘기다림의 미학’이다. 허형만의 시는 늘 기다림을 노래한다.
그 기다림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실의 흙 속에 발을 딛고 있는 인내의 시간이다. 흙의 무게가 곧 삶의 무게로 전환되는 구절은, 그의 시가 추상적 위로가 아닌 ‘살아낸 사람의 언어’임을 증명한다.
마지막 연의 울림은 그 어떤 선언보다 깊다.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 다섯 줄의 문장은 그의 인생 철학을 압축한다. 겉모습으로 타인을 판단하지 말고, 한 사람의 내면에 잠든 생명력을 믿으라는 메시지다. 겨울 들판을 바라보며 인간의 존엄을 떠올리는 그의 시선은, 시인이자 성찰자로서의 깊은 도덕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는 다짐은 단순한 윤리적 명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 대한 선언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는 언제나 낮은 자리를 택한다. 그는 겨울 들판처럼 고요하고, 바람처럼 겸손하다. 화려함 대신 진정성을, 언변 대신 침묵의 품위를 선택한다. 그의 시에는 서늘한 바람의 결과 따뜻한 흙의 냄새가 함께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오랜 세월 뭇 시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다. 시의 언어가 화려하지 않아도, 그 언어가 품은 마음은 누구보다 크고 깊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결국 ‘관계와 생명, 그리고 겸손’에 대한 시다. 인간과 자연, 나와 타인 사이에도 ‘다가서기 전의 거리’가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따스함, 그러나 함부로 스며들지 않는 존중의 간격 — 그곳이 시인 허형만의 시가 머무는 자리다.
이 시는 겨울을 통과하며 배운 겸허의 철학을 담고 있다. 삶이 아무리 매워도, 바람이 아무리 차가워도, 그 속에서 따뜻함을 배우는 사람. 바로 그가 허형만 시인이다. 그의 시는 말보다 더 깊은 침묵의 언어로, 독자의 마음에 한 송이 들풀이 되어 피어난다.
그 들풀 하나가 우리에게 속삭인다 —
“겨울 들판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 안에도 봄은 자라고 있다.”
ㅡ 청람 김왕식
[출처] 겨울 들판의 숨결, 겸허의 미학 ― 허형만 시인의 〈겨울 들판을 거닐며〉를 읽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작성자 wangsik59
취우 하늘
- 바닷물 소리 듣고 싶어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
여긴 여긴 북쪽 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 소리.
_ (1935년. 12월. 봉수리에서. 윤동주 19세)
https://youtu.be/ktOWAmK4sFQ?si=yySdcvEMiErpl61Q
요즘 다시 동시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시인들 중에서도 동시를 함께 쓰는 시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갈수록 시집은 팔리지 않고 그나마 동시집은 어느 정도 팔리는 상황이다. 또한 시를 쓰는 사람들 중에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을 하는 시인들이 많아서 그러는 면도 많은 것 같다. 시대에 따라서 혹은 필요에 따라서 달라지는 듯하다. 80년대의 화려했던 시의 시대는 다시 오기 힘들 것이다. 이제 어른들은 시를 읽지 않지만 자식들에게는 시를 읽게 하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많아서 그나마 동시나 동화는 어느 정도 팔리는 듯하다.
나는 날마다 바닷가를 걷는다. 나는 날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조개껍데기를 본다. 조개껍데기는 보통 날개를 펴고 있다. 살아있을 때에는 입을 꼭 닫고 살던 조개껍데기는 죽어서 비로소 날개를 펴고 살아간다. 많은 조개껍데기는 한쪽 날개를 잃고 한쪽 날개로만 살아가는 조개껍데기들도 많다. 조개껍데기는 죽어서도 바다를 품고 있다. 조개껍데기는 죽어서도 파도소리를 먹고 자란다. 나는 날마다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은 바닷가의 조개껍질이 아니라 북쪽 나라에서 조개껍질을 노래한다. 언니가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질을 노래한다. 북쪽 나라에서 귀여운 선물, 조개껍데기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면서 노래한다.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가 한 짝을 잃어버렸다. 남아 있는 한 짝은 잃어버린 한 짝을 그리워한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는 잃어버린 한 짝을 그리워하고 조개껍데기의 고향인 바다를 그리워하고 나에게 조개껍데기를 주어다 준 언니를 그리워한다.
윤동주 시인은 시뿐만 아니라 동시와 동요도 많이 쓴 시인으로 유명하다. 이 동요는 1935년 12월.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윤동주 시인이 맨 처음으로 쓴 동시로 알려져 있다.《정지용 시집》에 실린 동시를 읽고 감탄해서 이때부터 연희전문학교 1학년 때까지 많은 동시를 썼다고 한다. 이 동시는 한 짝을 잃은 조개껍데기를 노래하고 있다. 또한 바다를 떠난 조개껍데기가 자신의 고향인 바다를 그리워하듯이 나 또한 바닷물 소리를 그리워한다.
윤동주 시인은 바다에서 먼 북간도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 시는 윤동주가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하고 얼마 뒤인 1935년 12월에 쓴 작품이다. 윤동주의 최초의 동요라고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의 육필 원고 제목에는 '(童謠) 조개껍질'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아이들이 부르기 위한 동요(童謠)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북쪽 나라에서 잃어버린 다른 짝을 그리워하는 조개껍데기에 투사된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의 끝에 달린 메모에는 '一九三五年十二月、鳳峀里에서.'라고 적혀있다. 봉수리(鳳峀里)는 현재 평양의 봉수동을 말한다. 당시 봉수리에는 문익환이 봉사하던 숭실 YMCA 종교부에서 운영하는 주일학교가 있었는데, 문익환의 절친한 친구인 윤동주 시인이 주일학교 일을 돕는 과정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며 만들어진 동요로 추정되기도 한다. 4·5/3·5/3·5조의 규칙적인 운율과 적절한 의성어 및 의태어 사용이 돋보인다. 윤동주 시인이 애용하는 되풀이법이 사용된 작품으로 '조개껍데기', '그리워하네' 등이 반복된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윗입술과 아랫입술처럼 함께여야 의미가 있는 조개껍데기, 하지만 이 시에서 조개껍질은 한쪽이 없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가 그립지만 찾을 수 없다. 바다 물소리가 저 멀리 시원하게 들리고, 파도가 앗아가는 모래 속에서 조개껍데기를 찾아보지만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조개껍데기처럼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분명, 너무나 많이 있다.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내야 하는 켜켜이 먼지 덮인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과 단번에 생각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가장 생각이 많아지는 그리운 것. 나에게는 그리운 조개껍데기가 이렇게 있구나. 다시 떠오르는 바다 물소리. 쏴아아, 쏴아아, 하고 사라지는 조개껍데기 같은 그리운 기억들. 이젠 현실에는 없는 조개껍데기.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리운 기억들. 바닷속으로 멀리 사라져 간다. 윤동주 시인이 중학생 시절에 썼던 시를 낭송해 본다. 바다가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누나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이 잔잔하게 전해진다. 나는 그래도 문만 열고 나가면 바다를 만날 수 있어서 참 좋다. 나는 날마다 바다에 젖을 수 있어서 참으로 좋다. 나는 아직 살아있어서 참 좋다. 그리운 것들을 그리워할 수 있어서 오늘도 행복하다.
* 원문표기:
- '껍데기' -> '껍대기'
- '바닷가에서' -> '바다가에서'
- '주워 온' -> '주어온'
- '북쪽 나라요' -> '북쪽나랴요'
- '장난감' -> '작난감'
- '아롱아롱' -> '아릉아릉'
- '바닷물 소리' -> '바다물소리'
* 윤동주 시인은 '누나'라고 호명하지 않고 '언니'라고 호명했다. 그래서 더욱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조개껍데기를 선물 받은 사람이 나일 수도 있고 내가 아닐 수도 있도록 복선을 깔아놓았다. 또한 내가 여성화자의 탈을 쓰고 노래한 것으로 해석해도 가능하다. 여기에서 '누나'라고 호명하지 않고 '언니'라고 호명한 경우처럼 시인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시적진실'이라고 한다.
https://youtu.be/8oCGc-Mne2k?si=HqAEv9g0avTh69gc
번거롭던 사위가 잠잠해지고 시계소리가 또렷하나 보니 밤은 저윽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 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 것이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녘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때까지 밖은 휘양찬 달밤이었던 것을 감각치 못하였댔다. 이것도 밝은 전등의 혜택이었을까.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담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여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지르는 것이다. 옆에 누운 분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진다.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소리와 숨소리와 귀또리 울음뿐 벅적거리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 한층 고요한 것이 아니냐? 나는 깊은 사념에 잠기우기 한창이다. 딴은 사랑스런 아가씨를 사유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상화도 좋고, 어린 적 미련을 두고 온 고향에의 향수도 좋거니와 그보담 손쉽게 표현 못할 심각한 그 무엇이 있다. 바다를 건너온 H군의 편지사연을 곰곰 생각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란 미묘한 것이다. 감상적인 그에게도 필연코 가을은 왔나보다. 편지는 너무나 지나치지 않았던가. 그 중 한 토막, 「군아! 나는 지금 울며 울며 이 글을 쓴다. 이 밤도 달이 뜨고, 바람이 불고, 인간인 까닭에 가을이란 흙냄새도 안다. 정의 눈물 따뜻한 예술학도였던 정의 눈물도 이 밤이 마지막이다.」 또 마지막 켠으로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은 나를 영원히 쫓아버리는 것이 정직할 것이오.」 나는 이 글의 뉘앙스를 해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에게 아픈 소리 한 마디 한 일이 없고 서러운 글 한 쪽 보낸 일이 없지 아니한가. 생각컨대 이 죄는 다만 가을에게 지워 보낼 수밖에 없다. 홍안서생으로 이런 단안을 나리는 것은 외람한 일이나 동무란 한낱 괴로운 존재요 우정이란 진정코 위태로운 잔에 떠놓은 물이다. 이 말을 반대할 자 누구랴, 그러나 지기 하나 얻기 힘든다 하거늘 알뜰한 동무하나 잃어버린다는 것이 살을 베어내는 아픔이다. 나는 나를 정원에서 발견하고 창을 넘어 나왔다든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든가 왜 나왔느냐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두뇌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귀뚜라미 울음에도 수줍어지는 코스모스 앞에 그윽히 서서 딱터 삘링쓰의 동상 그림자처럼 슬퍼지면 그만이다. 나는 이 마음을 아무에게나 전가시킬 심보는 없다. 옷깃은 민감이어서 달빛에도 싸늘히 추워지고 가을 이슬이란 선득선득하여서 서러운 사나이의 눈물인 것이다.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줄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삼경이 있고 나무가 있고, 달이 있다.(달이 있고……)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뭇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https://youtu.be/7rU4JDrh6u4?si=af62oPAJXtv3LiJ7
https://youtu.be/cBOGl2b4Gzk?si=fZHebZqk0a8B7N4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