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도공화국 꿈삶글 0039
그 너머를 바라본 나는 거대한/강가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물었다 「스승님, 가르쳐 주십시오//희미한 불빛을 통해 보이는 저들은/누구이며, 또한 저토록 서둘러서/건너려는 저들의 본능이 무엇인가요?」//그분이 말하셨다 「아케론의 고통스러운/강가에 우리의 발걸음이 멈출 때/너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내 말이 그분에게 거슬릴까 두려워/나는 부끄러운 눈길을 아래로 깔았고/강가에 이를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그때 머리카락이 새하얀 노인이/우리를 향해 배를 타고 오며 소리쳤다/「사악한 영혼들이여, 고통받을지어다!//하늘을 보리라고 기대하지 마라 나는/너희를 맞은편 강가, 영원한 어둠 속으로,/불과 얼음 속으로 끌고 가려고 왔노라//그런데 거기 너, 살아 있는 영혼아,/너는 죽은 자들에게서 떠나라」/하지만 내가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말했다 「너는 다른 길, 다른 항구를 통해/해변에 가야 하니, 이곳을 지나지 마라/좀 더 가벼운 배가 너를 데려갈 것이다」// ― 단테의『신곡(神曲)』29
「이별(離別)」//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잿빛 하늘에 또 뿌연 내, 그리고,/커다란 기관차는 빼―액―울며,/쪼끄만, 가슴은, 울렁거린다//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사랑하는 사람을,/일터에서 만나자 하고―/더운 손의 맛과, 구슬 눈물이 마르기 전/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_ (1936.3.20, 영현군(永鉉君)을 —, 윤동주 19세)/16. 이별(離別)(시) _ 1집, 삼판// ―『윤동주』16
제12장//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다섯 가지 음으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집니다//말달리기, 사냥하기로 사람의 마음이 광분하고,/얻기 어려운 재물로 사람의 행동이 그르게 됩니다//그러므로/성인은 배(腹)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습니다/후자는 뒤로하고 전자를 취합니다// _ (제12장 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고 - 감각적 욕망의 극복 ―『도덕경(道德經)』12
「첫 떨림」//소리도, 색도 없던 세계에/한 점 떨림이 일었다/그 미세한 움직임이/모든 생명의 첫 리듬이 되었다//움직임은 고요의 반역이 아니라/그 완성의 형태였다/세상은 떨림에서 숨을 배웠다// _ (『숨의 연대기』제1부 - 빛이 오기 전(창조의 어둠) 8 「첫 떨림」) ―『청람 김왕식』9
「고백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다」//당신과는 발가락도 닮지 않았다/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백하면서 해는 서산마루를/붉게 걸어가고, 나는 잠을 깬다//밤에만 피는 꽃잎 속에서 나는/살아있다 어둠은 나의 집이다/그 집에는 천년을 열어도 다/열지 못할 많은 문이 있다/천년에 딱 한 번, 한꺼번에,/잠깐 어둡게 열렸다가, 스스로 잠긴다//그 속에는 발가락도 닮지 않은/사랑하는 당신이 있다/고백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다/살아있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한다/사랑한다 그리하여 나는 고민한다/고민한다 그리하여 나는 불러본다/불러본다 그리하여 나는 울어본다/울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웃어본다/웃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도망친다/도망친다 그리하여 나는 쓰러진다/쓰러진다 그리하여 나는 돌아본다/돌아본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살아난다//사랑하기 위하여, 저만치/저만치 피어 있는 꽃 한 송이//집에 돌아와 편지를 쓴다/유서처럼 마지막처럼 시를 쓴다/당신 곁에서 죽지도 못하고/어둠의 나라에서 이렇게 살아 있다// _ (1989년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다』 「고백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다」) ―『배진성』5
우연히 셔플댄스를 알게 되었다 참 재미있는 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서도 할 수 있어서 더욱 좋은 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늘 제자리 걷기를 한다 그런데 셔플댄스는 제자리 뛰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제 제자리 걷기를 하다가 가끔 제자리 뛰기도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셔플댄스를 배워보기로 한다 셔플(shuffle)이란 말이 참 재미있다 (발을 (질질) 끌며 걷다, (어색하거나 당황해서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발을 끌며 느릿느릿 걷다) 그러니까 셔플댄스는 발을 끌며 추는 춤인 듯하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전문가는 런닝맨부터 연습을 하라고 한다 나는 런닝맨 연습을 한다 기본적인 런닝맨과 티스텝으로 다양한 스타일을 표현할 수 있는 춤이라고 한다 신나게 춤추며 운동을 하는 것이니 유용할 듯하다 그런데 생각처럼 쉬운 춤은 아닌 듯하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으니 서두르지 않고, 혼자 놀기의 달인답게 나는 이제 가능한 즐겁게 한 번 놀아볼 생각이다 딛고 끌고 딛고 끌고 딛고 끌고, 자전거를 타듯이, 연속해서 딛고 끌고 딛고 끌고 딛고 끌고,
『도덕경(道德經)』은 『성경』다음으로 많이 번역되고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한다 불과 오천 글자에 불과한 『도덕경(道德經)』 은 왜 이렇게 인기가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에도『도덕경(道德經)』 대가가 많다 나름의 특징이 있는데 최진석 선생님의 강의가 재미있다 오강남 선생님 책을 주로 읽었는데 최진석 선생님의 『나 홀로 읽는 도덕경』도 쉽고 재미있다 노자는 오랫동안 주나라에 살다가 나라가 망해가자 살던 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국경의 관문에 이르자 관문을 지키던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이렇게 청했다고 합니다 "은거하러 떠나시는 길이지만 제게 말씀을 남기고 떠나 주십시오" 이에 노자는 두 권으로 된 5천 자 책을 써주었다고 합니다 책을 남기고 관문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떠나갔는데, 그 후로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재명 대통령께서 2026년 신년사를 발표하셨다 참으로 믿음직한 대통령이다 부지런한 이재명 대통령을 보면서 긍정의 힘을 믿는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재명 대통령께서는 많은 핍박을 받았음에도 참으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하고 계신다 참으로 대단한 대통령이다 건강도 너무나 좋고 학습력도 뛰어나고 참으로 현명하며 뛰어난 지도자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에 이런 분이 계셔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이 많은 생각을 하도록 유인한다 우리들은 직접 지켜보았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대통령 한 사람이 어떻게 우리나라 전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변화되어야만 할 것이지만 앞으로 잘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된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참으로 좋다
아, 이렇게 좋을 때는 즐겁게 춤을 추어보자 셔플댄스를 즐겁게 배워보자 딛고 끌고 딛고 끌고 딛고 끌고, 자전거를 타듯이, 반복적으로, 연속해서 딛고 끌고 딛고 끌고 딛고 끌고, 아, 이런 좋은 기운을 이어서 황토방도 하나 만들어볼까! 황토방 만들기 예습
https://youtu.be/XvOhsTprYBM?si=cegD-FFHtrsgS27L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 내, 그리고,
커다란 기관차는 빼―액―울며,
쪼끄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 하고――,
더운 손의 맛과, 구슬 눈물이 마르기 전
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_ (1936.3.20.영현군(永鉉君)을 —, 윤동주 20세)
16. 이별(離別)(시) _ 1집, 삼판
https://youtu.be/soBTfcpk69o?si=04HpSgpDKH0CQSht
친구와의 이별에 따르는 페이소스가 기적소리와 함께 설핏한 여운을 풍긴다. 만남과 헤어짐은 어길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회자정리의 원칙 위에서만 인간의 생존은 가능하다. 만나면 기쁘고 헤어지면 슬프다.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다. 이별은 또한 만남에 대한 희미한 기대를 안겨 준다. 지금은 소리도 없는 디젤기관차가 드나들게 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빽빽 우는 증기기관차가 나그네를 실어 날랐다. 이별의 애수는 이 배경적 상황으로 해서 더욱 짙은 것이었다. 영현 군과의 이별의 순간이 하나의 판토마임처럼 아로새겨진다. 그런데 헤어진 영현군(永鉉君)은 누구일까. 그가 누구이길래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어떤 일터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애별리고(愛別離苦)는 불교에서 말하는 팔고(八苦)의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을 말한다. 부모ㆍ형제ㆍ처자ㆍ애인ㆍ친구 등과 생별(生別) 또는 사별(死別)할 때 받게 되는 고통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애별리고를 겪게 된다.
윤동주 시인의 나이 20세인 1936년 3월 20일에 만든 작품으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화자의 심정이 솔직히 표현된 작품이다. 헤어짐의 아쉬움으로 인해 더 짧게 느껴지는 이별의 순간과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달려가는 기차의 모습은 화자가 느끼는 정인과의 이별이 얼마나 안타까운지를 잘 보여준다.
시의 원문을 보면 작품 말미에 '一九三六年三月二十日 永鉉君을 —'이라고 쓰여져 있다.
윤동주는 본문의 '빼―액―'과 같이 소리 가락을 맞추기 위해 모음 음절을 더하거나 줄표를 써서 소리를 늘이는 표현법인 '소리 늘임법'을 즐겨 사용했다. 이 같은 표현법은 시인의 다른 작품인 <산림>, <황혼>, <개>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원문표기
- '잿빛 하늘' -> '재ㅅ빛하늘'
- '커다란' -> '크다른'
- '쪼그만' -> '쪽그만'
- '이별' -> '리별'
- '안타깝게도' -> '안탑갑게도'
- '돌렸다.' -> '돌럿다.'
https://youtu.be/yQ6e8Uainls?si=w3A5RW1VNqC2wvhy
시인 김응교 (제작 박민규 대위) (youtube.com)
https://youtu.be/pfW8oLzcaOQ?si=kh-BrE2Lcn5BUJqS
신에서 인간으로
믿음에서 생각으로
천명에서 도로
세계는 변한다
철학의 출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
탈레스(Thales, 기원전 624?~기원전 546)는 흔히 ‘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은 한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원조이게 마련이다. 탈레스도 그렇다. 탈레스는 살아 있을 때 이미 고대 그리스의 7현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유명인의 우스꽝스러운 실수는 재미있는 화젯거리가 되는 법.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도 오늘날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위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느라 하늘을 보면서 정신없이 걷다가, 그만 발밑의 웅덩이를 미처 보지 못하고 꼴사납게 넘어지고 만 것이다. 이것을 본 트라키아(발칸 반도 남동부 지역) 출신 하녀가 큰 소리로 비웃으며 말했다.
“우주의 이치를 탐구한다는 분이 발밑의 웅덩이도 못 보다니요!”
철학의 아버지가 완전히 스타일 구긴 이 일화는 고상한 문제에만 매달리느라 현실에는 어두운 철학자들을 비판할 때 흔히 인용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오히려 철학자들의 진정한 면모를 내세우려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곤 했다. 발밑의 웅덩이도 보지 못했던 탈레스처럼 철학자란 재판이나 흥정, 일상의 세세한 일에는 어수룩하고 둔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삶과 세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이 같은 고민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가치 있고 보람 있게 만든다. 무작정 아무 직장이나 들어가기보다, 자신의 삶과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직업을 고를 때 더 많은 것을 얻듯이 말이다.
따라서 철학은 오래전부터 엘리트들이 배우는 필수 과목이 되어 왔다. 철학은 작은 이익에 매달린 나머지, 삶의 근본적인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 준다. 크고 넓게 세상의 의미를 탐구하고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찾는 작업, 탈레스는 이러한 철학의 임무를 삶을 통해 보여 준 사람이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주변 환경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탈레스는 밀레투스(Miletus) 사람이었는데, 밀레투스는 그리스 본토가 아닌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방) 개척지에 있던 도시 중의 하나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시보다는 새롭게 태어난 도시의 분위기가 자유로운 법, 밀레투스에서는 인습에 얽매인 그리스 본토 도시보다 훨씬 자유분방한 생활과 사고가 이루어졌다.
그뿐 아니라, 밀레투스는 다양한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항구 도시이기도 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무역 중심지로 물자가 풍부했고 엄청난 부자도 많았다. 아마도 밀레투스의 분위기는 지금의 뉴욕과 비슷했을 것이다.
철학은 이런 분위기에서 태어났다. 생계에 쫓기는 사람은 삶과 세상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 하루하루 닥치는 일들을 해결하기에도 벅찬 탓이다. 또한, 일상에 너무 찌든 까닭에 현실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따라서 삶과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절박한 일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을 만큼 물질적 · 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을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여유(scholē)’를 꼽은 이유이다. 밀레투스의 경제적 성공은 이러한 ‘여유’를 가능하게 했다.
나아가, 항구 도시 밀레투스는 자유롭고 합리적인 생각을 중시하는 곳이었다. 항해를 하려면 날씨에 대한 지식과 배 모는 기술을 바탕으로 한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상대로 이익을 남기려면 자신들만의 관습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세상사를 신에게 기대어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밀레투스 사람들은 스스로 곰곰이 생각하여 일어난 일들의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구하곤 했다. 이처럼 철학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일 만한 근거와 증명을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 밀레투스 사람들 특유의 비판적인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엉터리지만, 철학 역사 최초로 '세계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에 답한 본질적인 주장이었다. 탈레스는 세상을 관찰한 결과를 종합하여 결론짓는 철학적인 사고를 했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지금 사람들이 탈레스의 출생과 성장 배경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란 고작 조상이 페니키아(오늘날의 레바논을 중심으로 하여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의 고대 지명)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밀레투스의 명문가 출신이라는 것 정도이다. 탈레스의 시대와 150년 남짓 차이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탈레스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보면, 애초부터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았던 듯싶다.
탈레스가 ‘7현인’ 중에서도 으뜸이었음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여겨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의 생활 태도를 보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요즘의 이름난 지식인들은 언론에 끊임없이 얼굴을 들이밀고 떠들어대지만, 그 당시 지식인은 오히려 ‘침묵’을 미덕으로 여겼다.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한두 마디 던진 말들은 곧 ‘금언(金言)’이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텔레비전, 라디오뿐 아니라 종이조차 없던 시대였으니, 긴 주장보다는 차라리 한두 마디의 의미심장한 말이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데 더 효과적이었을 터다.
탈레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철학의 아버지라는 그가 남긴 철학적 주장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와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 마디뿐이다.
그를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한 말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주장이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주장은 의미 없는 엉터리일 뿐이다. 그러나 철학 역사로 볼 때 이 주장은 매우 가치 있다. 철학 역사에서 최초로 던져진, 눈에 보이는 여러 사물과 변화를 넘어 세계는 과연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에 답하는 본질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종교도 세상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해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철학은 주장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는다. 논리와 합리적인 근거에 비추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이 점에서 철학은 종교와 다르다. 종교는 ‘신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라고 선언해 버리고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권하지만, 철학에서는 받아들일 만한 합리적인 설명이 없으면 어떤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탈레스도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주장에 대해 나름대로 증명을 시도했단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증명을 해냈는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잘 알지 못했다. 학자들은 탈레스가 내놓았을 법한 증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곤 한다.
하나는, 탈레스의 이집트 유학 경험에서 근거를 찾는 입장이다. 이집트는 천문학 · 기상학 · 수학 · 항해술 등 모든 분야에서 문화 선진국이었다. 유능한 젊은이는 시대의 중심지로 모여들게 마련이다. 탈레스도 젊은 시절 이집트에서 배우고 활동했다. 이집트는 풍요로운 나일 삼각주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삼각주의 비옥한 토양은 나일 강의 홍수가 해마다 얼마만큼 대지를 적셔 주는가에 따라 넓이가 결정되었다. 따라서 이집트에 널리 퍼져 있던 물에 대한 숭배가 자연스럽게 그의 생각에 젖어들었으리라 추측할 만하다. (그리스의 창조 신화도 물의 신 오케아노스에서 출발하지 않는가!)
다른 학자들은 탈레스가 일상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탈레스는 신화에 기대어 세상을 해석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능한 한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만물의 근본 원리를 찾아보려 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성실하게 관찰해 볼 때,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결론은 당연하다. 살아 있는 모든 동식물의 성장과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물이다. 습기를 잃으면 모두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철학 역사에서 의미 있는 점은 오직 그가 논리를 따져 사회에 퍼져 있는 믿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관찰 결과를 종합하여 세상의 근본적인 모습에 대해 결론 내리는 ‘철학적인 사고’를 했다는 사실뿐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본 원리를 깊이 있게 탐구한 철학자였지만, 결코 탁상공론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대단히 실용적인 지식인이었다. 그 실용성은 현실 생활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수학 · 지질학 · 천문학 등과 같은 순수 학문에서 나왔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찍이 트라키아 하녀에게 망신을 당한 탈레스는 ‘철학자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사업을 벌였다. 한겨울에 올리브기름 짜는 기계를 모조리 싼값에 빌린 것이다. 사람들은 올리브 수확철도 아닌 한겨울에 기름 짜는 기계를 빌리는 덜 떨어진 인간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하지만 이듬해 큰 풍년이 들어 기름 짜는 기계의 임대료가 크게 올라 탈레스가 큰 이익을 보자, 사람들은 그의 식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또, 탈레스는 큰 곰자리를 보고 항해를 하던 그리스 뱃사람들에게 작은 곰자리가 방향을 잡는 데 더 낫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도 했다. 이것은 천문학과 기상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아가 탈레스는 기하학과 수학을 연구해 피라미드의 높이를 재기도 했다. 이때 그는 그림자의 높이와 실제 사물의 크기를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치적으로도 대단한 수완가여서,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연합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정말 탈레스가 했는지는 의심스럽다. 탈레스 시대 그리스인들은, 유명한 발명품들은 자신이 이름깨나 들어 본 현자가 만들었으리라 단정했던 탓이다. 분명한 사실은 탈레스가 결코 일상생활에 대해 무지하고 무능한 철학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를 지금에서 평가하자면, 돈 못 버는 학문이라며 외면받는 순수 학문이 어떻게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지를 잘 보여 준 실용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탈레스의 삶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듯,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다른 이들의 풍자 시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운동 경기장에서 경기를 구경하던 중 숨을 거둔 듯하다. 더위를 먹고 죽었다는 설도 있지만 군중에 깔려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초연하게 독배를 들이켠 것에 비하면, 철학의 아버지의 죽음은 그다지 철학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탈레스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아버지 같은 훈계를 준다. 많은 현대인들은 정신적 근시로 살아가고 있다. 끝없는 경쟁 가운데 상대를 이기려고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정작 세상의 의미는 무엇이고 진정 바람직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치열한 노력과 경쟁 끝에 돌아오는 것은 대개 공허함과 허탈감뿐이다. 선진국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가 못 사는 나라들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은 정신적 근시들의 영리함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탈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답게 우리에게 충고를 건넨다. 치열한 일상에서 한 발 물러서서 넓고 깊게 세상과 삶에 대해 통찰해 보라. 무엇이 진정한 세상의 모습인지를 고민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릴 때, 우리는 다람쥐가 쳇바퀴 위에서 경쟁하는 듯한 생활에서 벗어나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탈레스는 우리에게 철학적 반성의 가치를 일깨운다.
https://youtube.com/shorts/IZAaVRmIqTk?si=zJ8IsOzuwCnY4yD9
https://youtu.be/evMOnH65ZaY?si=S3-XUeLbrEY18Z7R
https://youtu.be/5oj-YoQqf9c?si=Qp_5Qu8sCzf2rm-J
https://youtu.be/LOcXSNG5PBM?si=VmDVLBx7saBfT7jh
https://youtu.be/4wQhBHIG4n4?si=wtQuKG6GUiaWQMox
https://youtu.be/uxC7LqegjmE?si=Eku7xRizgv6W6S_j
https://youtu.be/UaJw1lqr6PA?si=9MnTTzczWTEV-Jkr
https://youtu.be/5oj-YoQqf9c?si=7z65jUOpNZ3-Sdl7
https://youtu.be/u4Ulf_lMvlE?si=mny0K3tOWLZd_-VX
https://youtu.be/UaJw1lqr6PA?si=9MnTTzczWTEV-Jkr
- 강산 시인의 꿈삶글 12
나는 우선 종석산을
이어도공화국 가족들의 소풍 장소로
약초 농장으로, 쉼터로, 창작촌으로
활용 할 계획이다
나는 아직 종석산에서 살 수 없으니
해마다 함께 약초를 심고
해마다 함께 감나무를 심고
해마다 함께 밤나무를 심을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시인들의 창작촌으로
.................................................,
종석산에는 참나무도 많고 황토도 많으므로 황토방을 만들면 좋겠다. 2012년에 종석산에서 종석산 흙과 종석산 나무와 종석산 돌을 이용하여 황토방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으니 그때 경험을 살려서 조금 더 보강하고 개선해서 황토방을 만들면 좋겠다. 그때 기록이 있으니 참고하기 위하여 여기에 옮겨놓는다.
인의 꿈삶글 11
2012년 단비 산방 건축기 / 청미루
2012년 5월 어느 화창한 봄날,
단비네 집에서 포크레인이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본채 왼쪽 땅을 다지는 것입니다. 포크레인 삽날이 산 귀퉁이를 조금 깎고
바닥을 평평하게 다졌습니다. 혹시 지붕을 때릴지도 모르는 나무 서너그루도 베어냈습니다.
본채 옆에 따로 서재 지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서재 자리는 땅속에 수맥이 없는 자리로 골라 두었답니다.
그렇게 기초를 다지고 가로 11 미터, 세로 4 미터 넓이의 땅 네 기둥이에 철심을 꽂았습니다.
끈으로 네 귀를 둘러 직사각형을 만들고 문, 창문, 아궁이, 굴뚝 자리를 정합니다.
산 여기저기에서 주워 온 크고작은 돌을 경운기로 실어 와 한가득 부려 놓았고요.
서재 지을 자리를 고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의 의견과 조언이 보태졌습니다.
지난 해 단비의 학교 선후배들이 급 결혼 급 귀향한 단비 집들이를 위해 멀리 종석산까지 와 주었지요.
그 날 목숨 걸고 올라 와 지금의 서재 자리에 쳐진 텐트 앞에 널부러져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니는 반듯하게 누워 눈만 초롱초롱 빛내며 별을 바라보았지요.
그리고 제 손을 붙들고 이 자리에 꼭 정자를 지어달라, 요청했지요. 그니의 이름은 숙영!
쉬리 생각과 같았지요.
정자는 그 후 쉬리의 머릿속에서 손님들이 묵어갈 방이 되었다가
두 사람이 조용히 글 쓰고, 명상 할 공간으로 최종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 후
풍수를 좀 아는 쉬리의 형, 동생들이 함께 서재 방향과 문 자리, 기운 등을 봐 주었고요.
포크레인 작업이 끝난 뒤,
산을 깎고 주변 땅을 정리하며 나온 흙에 약간의 시멘트, 여기에 적당히 물을 섞은 흙반죽을 만들었습니다.
먼저 밑돌을 놓고 사이사이 흙을 채워 넣어 서재 벽쌓기에 들어갑니다.
네모 반듯한 벽돌이 아닌 크기가 제각각인 돌을 이용해 벽을 쌓는 것은 얼핏 쉬워 보이지만
상당한 경험과 지식이 필요합니다. 옆에서 보면 그저 알맞음직한 돌을 갖다 놓고 흙을 채워 넣으면
되는 것 같지만 돌의 성질과 각도를 가늠해가며, 흙과 작은 돌을 사이에 끼워 넣어 어느쪽에서 밀어도
꿈쩍하지 않을 벽의 토대를 쌓는 것이니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쉬리 혼자 힘으로 일곱 번 째 짓는 집입니다.
다른 사람은 쉽게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지만 대목장이셨던 아버님께 일을 배웠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버님은 아홉 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면서도 집짓는 기술을 배워
그 기술로 8남매를 길러내셨습니다.
대목장인 아버님은 술과 소리, 낚시를 좋아하셨답니다.
1년에 두 세 채, 남의 집을 지어주고 가족들 먹을 1년 양식을 마련한 뒤에는 아예 강가에서 사셨답니다.
몇 날 며칠을 세우기 일쑤여서 형제들이 늘 아버님 밥을 날랐답니다.
날이 추워지면 아예 옛날 군용천막 천으로 지붕을 얹고 강가의 돌을 놓아
구들을 만들어 불 때가면서 낚시를 하셨다지요.
8남매 중 둘째인 쉬리는 일찌감치 아버님 뒤를 이어 농사짓고 시골에서 살 자식으로 길러졌답니다.
쉬리를 낳을 때 이미 오십이 다 되었던 아버님 뒤를 집 짓는 연장 짊어지고 다니며 조수 노릇을 퍽도
했다지요. 구구절절 이어지는 어린 시절 산골살이와 아버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옛날옛적 이야기 속을 아슴아슴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혼자 힘으로 집을 완성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아랫채에 사는 쉬리의 동생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습니다.
흙집 토대가 놓여졌습니다. 그 위에 미리 베어서 40 센티미터 길이로 잘라 둔 나무를 한 단 둘러 쌓고 있습니다.
근처에 있는 재료로 누구나 찬찬히 혼자 지을 수 있는 방법이지만 누누이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어렵답니다.
기술이 없는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쌓아 올리면 나중에 벽이 비스듬히 틀어진답니다. 자칫하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요, 공든 탑이 무너졌으니 그만큼 허망한 일이 없습니다.
벽이 틀어지지 않게 하려면 나무를 쌓기 전에 가느다란 나무를 잘라 네 귀퉁이에 박아 고정시킨 다음 쌓는 겁니다.
집안 일 하는 짬짬이 찍은 사진이라 모든 공정을 다 찍지는 못했습니다.
좀더 자세한 기술이 알고 싶은 분은 메일로 문의 주세요. ^^
나무를 한 단 쌓고 난 뒤 문 틀을 세웁니다. 미리 봐 둔 나무를 자르고, 껍질을 벗기고,
문 길이를 재어 먹줄을 튕깁니다. 정확하게 치수를 재고 나무 결을 보아가며
문과 닿을 면과 벽과 닿을 면을 정하고 기계톱으로 기둥 면을 반듯하게 자릅니다.
문 틀을 세울 때는 눈을 믿지 말고 중심 추를 늘어뜨려 정확하게 수직이 되는지 재야 합니다.
모름지기 건축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일이 더뎌 보이더라도 반드시 정확하게 치수를 재고
자르고 깍아야 한다는 겁니다.
뚝딱뚝딱 대충 눈대중으로 보고 지어도 될 것 같은 개집이라도 그렇습니다.
자 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눈속임에 넘어가 몇 번이고 톱질이고 대패질이고 다시 해야 하기 일쑤니까요.
이 또한 아버님께 수없이 지청구를 들어가며 배운 것입니다.
지금은 스스로 경험하며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동생의 도움을 받아 번듯하게 문틀이 세워졌습니다.
시작이 반이니 반은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통나무를 두 단 쌓아 올리면 2~3일 쉬어야 합니다. 흙이 굳기를 기다렸다 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흙이 주저앉아 버립니다.
다시 비가 오지 않는 날, 나무를 켭니다.
창문 틀이 되어 줄 나무입니다.
바로 손아래 동생이 도와주어 손에 날개를 단 것 처럼 일이 빨라집니다.
가장 손발이 잘 맞는 동생입니다. 참을 먹을 때면 아버님 얘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어이~ 저기 봐라. 살짝 틀어졌다. 아버지 봤으면 한 마디 하셨겠다."
"한 마디 뿐이여. 종석산이 들썩거리도록 호통 치셨겄지."
혼자 일을 할 때도 쉬리 옆에는 늘 아버님이 계십니다. 일이 좀 귀찮아서 꾀를 부려 좀 쉽게 갈라치면
벽력같은 아버님의 호통이 들려 와 한 숨 한 번 쉬고 제대로 짚어 나가게 됩니다.
돌아가셨어도 아버님은 여전히 아들의 스승으로서 집 짓는 과정을 지켜보며 아들과 함께 집을 짓고 계신겁니다.
벽을 두 줄씩 쌓고 기다리는 동안 쉴새없이 고무망치로 흙을 살살 두드려 줍니다. 그러면 갈라지는 틈 없이 바깥면이 메꿔지면서
단단해 집니다. 이렇게 매끈하게 벽이 다듬어지면 나중에 흙이 갈라지거나 덩어리로 떨어져 내리는 일이 줄어듭니다.
흙집을 몇 채 지으면서 터득한 방법이랍니다.
드디어 벽을 다 올렸습니다. 다시 봐두었던 나무를 베어와 다듬어 대들보를 얹었습니다.
지붕은 샌드위치 판넬을 사다 얹습니다. 흙집에는 기와가 어울릴지 모르지만 산꼭대기로 기와를 사서 나를 일도
만만치 않고 가격도 비쌉니다. 조립식 집에 얹는 샌드위치 판넬도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비용이 적게 들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이 산에 가장 알맞은 집을 지을 요량이었으니까요.
아쉽게도 지붕 얹는 과정 사진은 생략합니다.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으나 관리소홀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붕 올리기까지 한 달 정도 걸렸습니다. 오월 중순에 시작해 유월 중순에 끝났습니다.
일 한 날로만 치자면 딱 보름만입니다. 중간중간 흙이 굳기를 기다렸고 비가 오늘 쉬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시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시월이 다 되어섭니다.
지붕 올리고 나서 계속 비가 와 자재를 올리지 못했고(종석산은 흙길이라 비가 오면 차가 올라오기 힘들거든요)
이런 저런 바쁜일들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지요.
다시 2012년 시월 햇살 좋은 가을 날
서재 내부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모래와 흙, 시멘트를 섞어 구들장을 만듭니다.
옛날 선조들은 시멘트가 없어서 넓고 판판한 돌을 구해 구들로 썼습니다. 요즘에는 시멘트 블럭이나 다른
재료들을 써서 구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쉬리는 이렇게 시멘트 구들을 만들어 쓰기로 했습니다.
두께가 웬만해서 불을 때도 튀거나 깨질 염려가 없고 불도 잘 들이기 때문입니다.
구들을 놓기 위해서 방 바닥을 파냅니다.
방안에서 곡괭이로 흙을 파는 일은 온전히 두 팔 근육과 허리 힘으로만 해내야 합니다.
아궁이에서 방문 있는 곳까지 골고루 따뜻하게 불을 잘 들게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구들을 잘못 놓으면 여러 번 뜯었다 다시 놓아야 합니다. 보통 일이 아니겠지요.
불이 골고루 잘 들이게 하기 위한 비법 또한 아버님께 전수 받았습니다.
아버님은 때와 장소, 그 지역의 특성, 집 주인의 형편에 맞게 재료와 방법을 써서 집을 짓는데
탁월하셨습니다. 아버님께 배워 쉬리 또한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에 능합니다.
아버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에 자신만의 방법을 접목시켜 짓는 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서재 짓는 동안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각자 말을 보태곤 했습니다.
참 말도 많고 조언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가고 나면
꿍얼꿍얼 투덜거리면서 땅을 팝니다.
"그러게 울 아버지가 그랬어. 다 지어도 절대로 길 가상(길가) 집은 짓지 말라고.
지나가는 인간들이 다 한 마디씩 하면 주인이 귀가 솔깃해가지고 이렇게 하자
저렇게 고쳐라, 얼마나 요구사항이 많았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자신만의 방식대로 바닥을 다져 군데군데 빨간 벽돌을 몇 장씩 놓고 그 위에 구들판을
놓았습니다. 그 위에 다시 흙과 모래, 시멘트를 섞어 바닥을 매끄럽게 마감했습니다.
역시 이 사진도 다 날아가 보여 드릴 수가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서재 내부를 마감하고 아궁이를 만들었습니다. 가마솥을 걸고 불을 땝니다.
연기가 구들 안으로 쑥 빨려들어가고 빨간 불꽃이 넘실거립니다.
방바닥은 서서히 데워지고 이내 뜨끈뜨끈해졌습니다.
굴뚝으로 연기도 잘 빠지고요. 구들이 잘 놓아진 게 증명된 겁니다.
2012년 11월 초,
드디어 아담한 서재가 완성되었습니다.
참말이지 감개가 무량합니다.
요사이 쉬리는 아예 책꽂이도 예쁘고 튼튼하게 짜 주었답니다.
컴퓨터 놓는 탁자도 짜 준다고 합니다.
서재 내부는 책을 옮겨 꽂고 보여드릴까 합니다.
우리들의 서재요 사랑방에 이름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우선은 '단비산방'으로 정했습니다.
더 정겹고 어울리는 이름이 있으면 일러 주세요. 감사한 마음으로 현판만들어 걸어 두겠습니다.
올겨울에는 서재의 넓은 창으로 펑펑 날리는 눈발을 보며
글 쓰는 시늉이라도 하며 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