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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20. 2021

폭낭과 야유나무

- 강산 시인의 꿈삶글 22







폭낭과 야유나무 / 배진성



  

당산나무가 나를 업어 키웠다  


제주도 폭낭들은 오늘도  

허리가 휘어지도록  

바람을 업어 키우고 있다  


북촌리 폭낭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1949년 1월 17일  

그날 보았던 일들이 지워지지 않는다  


당산나무에 임산부를 매달고  

대검으로 찌르는 것을 보았다  

총탄에 쓰러진 시체 더미 속에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  

피의 가슴을 빨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피가 솟아나는 순간  

천둥소리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그 미친(美親) 바람은 바다까지 건너갔다  

야유나무를 한 번 휘감고  

퐁니를 거처 퐁넛으로 달아났다  

제주도 폭낭처럼 베트남의   

그 퐁니 마을 야유나무도 똑똑히 보았다  

총소리를 보았고 천둥소리의 뼈를 보았다  

1968년 2월 12일 아침  

야유나무는 야유나무 학살을 모두 다 보았다  


탐라국 폭낭들이 보았고  

참파왕국 야유나무가 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당산나무들이 오늘도 똑똑히 보고 있다  


당산나무는 어미가 되고 싶다  

당산나무는 다만 어미가 되고 싶다  

당산나무는 이제 다시 어미가 되고 싶다  

웃는 아이들을 업어서   

웃는 아이로 키울 수 있는 어미가 되고 싶다






<제주-베트남 평화시집> 

제주와 베트남 시인 78명이 참가한 공동시집 <낮에도 꿈꾸는 자가 있다>




* 야유나무 학살


1968년 2월12일. 한국군 해병 제2여단 제1대대 1중대원들은 퐁니의 야유나무 곁을 스쳐갔다. 중국군과 싸워 이겨 세운 땅, 참파 왕국일 때 대월국과 앙코르 왕조와 몽골군과의 잇따른 전쟁으로 양쪽 군인들의 주검이 산을 이루던 땅, 프랑스군과 미군에 이어 1945년 패망 직전의 일본군까지 잠시 머물던 땅. 그 꽝남에 한국군이 바글거렸다. 그날 오전, 야유나무의 작은 이파리들을 간지럽히던 바람은 어느 순간 피바람으로 돌변했다. 야유나무는 다 보았다. 퐁니·퐁넛의 민가로 진입하던 군인들을, 총탄에 쓰러지던 노인과 부녀자들을, 불타는 초가집에서 나와 울며 달리던 소녀들을, 환자들을 긴급히 수송하던 미군 헬기를. 언제부턴가 퐁니·퐁넛 사람들은 그 피바람을 이렇게 불렀다. ‘야유나무 학살.’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제주 폭낭과 베트남 야유나무 / 고영직

한겨레 신문 등록 :2015-04-03 18:41


베트남 시인 탄타오는 노래한다. “1848제곱킬로미터 / 270,000 인구 / 30,000명 피살 / 1948년 4월3일”. 2008년 4월4일 제주도를 찾은 탄타오 시인이 제주 진혼굿 무당이 연출하는 해원굿을 보며 쓴 시의 부분이다. 위 대목 바로 다음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돌아가라 돌아가라 / 제주 예수 / 십자가에 못 박힌”.

이에 제주 시인 김수열은 화답한다. 베트남 꽝응아이 외떨어진 바닷가 마을에서 통일전쟁에서 한국군과 맞서 싸우다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사람을 만난 경험을 시로 표현한다. 김수열 시인은 “해거름에 탄타오 시인을 만나 / 그 사람 이름을 묻지 못했다 하니, 시인은 / 그 이름을 ‘꽝아이’라 하자 한다 / 강물은 쉼없이 흐르고 / 별빛 또한 유난히 깊은 밤이었다”라고 시를 끝맺는다. 김수열이 쓴 시는 한국과 베트남 시인이 공동으로 쓴 합작품인 셈이다. 상상력의 국제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제주 작가 38명과 베트남 꽝응아이성 작가 38명이 십년 가까운 내면의 문학교류를 결산하는 차원에서 한국어와 베트남어로 된 공동시집 <낮에도 꿈꾸는 자가 있다>를 제주문학의집에서 출간했다. 1948년 4·3의 슬픈 기억을 간직한 제주 작가와 전쟁의 참화를 겪은 베트남 꽝응아이성 작가들의 만남은 각별했다. 베트남 작가들은 아름다운 땅 제주도와 제주 사람들이 겪은 국가폭력의 상처에 대해 이해했고, 제주 작가들은 한국군의 피와 야만이 스며 있는 베트남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시적 정의(Poetic Justice)를 구현하는 기회가 되었다. 제주와 꽝응아이 모두 한국과 베트남에서 서울과 하노이(또는 호찌민) 같은 ‘주류’적 질서로부터 떨어진 변방 지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

제주와 꽝응아이 작가들은 4·3과 전쟁에서 죽은 원혼들을 위무하며 ‘원통한 죽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원통한 죽음은 애도가 결여된 죽음이다. 애도가 결여된 죽음은 사색과 기억, 행동과 의례를 통한 치유와 회복의 사회·문화적 과정을 지연시킨다. 인류학자 권헌익은 1968년 베트남 하미 마을과 밀라이 마을에서의 학살 문제를 다룬 <학살, 그 이후>(2012)에서 베트남의 전쟁 기념의 경우 “국가 독점에서 민간과 공동체 부문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미와 밀라이는 각각 한국군(1968.2.22)과 미군(1968.3.16)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진 곳이다. 1968년 2월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서 일어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를 다룬 고경태의 <1968년 2월 12일>도 최근 출간되었다. 구수정, 김현아 같은 활동가들은 베트남전의 실상을 알리는 작업을 지금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제주 시인 배진성의 <폭낭과 야유나무>는 상상력의 국제연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1949년 1월17일 제주 북촌리 폭낭(팽나무)과 1968년 2월12일 베트남 퐁니 마을의 야유나무를 연결해 시적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시인은 말한다. “탐라국 폭낭들이 보았고 / 참파왕국 야유나무가 보았다”라고. 어쩌면 이것이 문학과 예술이 할 수 있는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에의 책임이 아닐까. 오는 4월30일 종전 40년을 맞아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 2명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게 된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원통한 죽음을 잊을 권리는 없다. 우리 신체 중에서 가장 연약한 부위가 ‘귀’라고 한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든 죽음은 애도와 위로를 받을 절대적 권리가 있다는 말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가장 존중되어야 하지만, 철저히 묵살당하는 시절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아니한가. 죽어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을 기억하자. 산 자의 ‘넋두리’를 들어줄 줄 아는 작가적 가슴이 요청되는 잔혹한 사월이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제주·베트남을 잇는 아픔, 문학으로 치유한다 / 한형진 기자 (cooldead@naver.com)

제주의소리 승인 2015.02.02 14:07



제주문학의 집, 국내 최초 베트남어 시집 양국어 번역 발간


수 만 명의 도민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 제주,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 수 백 명이 숨진 베트남 꽝아이. 역사적인 아픔을 공유한 두 지역이 문학으로 교류하는 뜻 깊은 행사가 마련됐다.

제주문학의 집은 제주와 베트남 시인 78명이 참가한 공동시집 <낮에도 꿈꾸는 자가 있다>를 최근 발간했다고 밝혔다.

2014년 국제문학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탄생한 공동시집은, 한국 문학계 최초로 양국어로 번역 발간됐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결과물로 평가받는다.

지난 1월 5일에는 베트남 꽝아이성 현지에서 제주 작가들과 베트남 작가들이 함께 모인 발간기념회를 개최한 바 있다.

베트남 꽝아이성 반호아 지역은 1968년 1월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한국군에 의해 5개 마을에서 민간인 430명이 학살당한 지역이다. 

전쟁을 겪은 베트남 작가들의 시선으로 그려진 시 작품 속에서는 진정한 평화를 소망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4.3의 아픔을 간직한 제주도민들이 무엇보다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베트남 탄 타오 시인은 발간사를 통해 “고통과 상처를 극복하고 세계인들의 ‘사랑의 천당’이 된 고향 제주를 칭송하는 시들이 가득 울려펴지기를 바란다”며 축하의 뜻을 전했다.

제주문학의 집 작가들의 공동 발간사에서도 “제주와 꽝아이 모두 성격은 다르나 비극적 역사의 아픔을 겪으며 남겨진 상흔이 새겨져 있는 곳”이라며 “그 상처를 극복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제주와 꽝아이 시인들이 함께 한 발걸음이 그래서 더욱 소중한 까닭”이라며 공동시집이 양 지역의 따뜻한 우정의 징표가 되기를 기원했다.

제주문학의 집 관계자는 “국제문학교류 행사를 통해 제주의 작가들에게 보다 많은 창작 모티브의 제공과 문학적 경험을 축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도서출판 심지, 1만원



고경태의 1968년 그날

나무는 보았네, 그날의 참상을

⑤ 1968년 2월 퐁니·퐁넛에선 어떤 일이
긴장과 평화 공존하던 형제마을에 피바람 몰고간 한국군

제988호

등록 : 2013-11-29 14:34 수정 : 2013-11-29 14:35 

           

 바람이 살랑거렸다. 이파리들이 가볍게 떨렸다. 산들바람이었다.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린 나무의 굵은 가지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나무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인도차이나반도의 동해에서 불어온 바람이 야유나무를 한 번 휘감고 퐁니를 거쳐 퐁넛으로 달아났다. 폭풍 전야의 미풍이었다. 1968년 2월12일 아침. 그날도 야유나무는 거기 있었다.


 나무를 스쳐간 폭풍 전야의 미풍


 퐁니와 퐁넛은 바람을 함께 맞는 형제 마을이었다. ‘퐁’(Phong)이란 한자어 ‘風’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넛(nhat)은 첫째, 니(nhi)는 둘째를 뜻했다. 퐁넛은 첫 번째 바람이고, 퐁니는 두 번째 바람이었다. 마을엔 퐁니와 퐁넛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다. 아득히 먼 옛날 베트남의 중부지방에 정착했다는 바람의 신. 그에겐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장성하자 땅 하나씩을 물려주었다. 그 땅 이름은 퐁니, 퐁넛, 퐁땀, 퐁뜨, 퐁응우. 퐁니와 퐁넛은 세월의 모진 풍화를 견뎌내고 살아남아 야유나무를 수호신으로 삼았다. 야유나무는 무화과의 일종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바니안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나무의 위상에 중심을 두자면, 한국의 당산나무 같은 것이다.



퐁니촌 입구의 야유나무. 나무에 신이 산다고 생각하는 베 트남인들은 나뭇가지 위에다 향로를 올려놓고 기도를 드 리기도 한다. 이 근처엔 1968년 2월12일 희생자들을 위한 사당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국인들이 지어준 희생자 위령 비가 대신 서 있다(위쪽). 2세기부터 15세기까지 베트남에 서 꽃핀 참파 힌두문명을 보여주는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 니·퐁넛촌 인근의 방안 유적지 석탑. 21.5m 높이로 11세 기에 세워졌다. 한겨레 고경태


퐁넛이 서쪽이라면 퐁니는 동쪽이었다. 퐁넛 서쪽엔 정글이 있었다. 베트남의 등뼈인 쯔엉선(長山) 산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북베트남군 제2사단 예하 대대와 베트콩들의 거점이었다. 하노이에서 사이공으로 내려오는 병력과 보급물자 수송로인 호찌민 루트가 지나는 곳이었다. 서쪽으로 더 들어가면 라오스 국경이 나왔다. 반대편인 퐁니 동쪽은 평야였다. 먼저 쯔엉선 산맥처럼 남북을 잇는 1번 국도가 나왔다. 이곳은 주로 미군과 한국군, 남베트남군의 활동 무대였다. 더 동쪽으로 가면 바다가 나왔다. 서쪽 쯔엉선 산맥에서 온 바람과 동쪽 바다에서 온 바람은 퐁니·퐁넛에서 만났다. 드넓은 벌판에서 바람은 자유로웠다.          

 야유나무는 1960년부터 퐁니·퐁넛을 지켰다. 1960년 그해,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였다. 1954년 7월20일 제네바협정에 따라 그어진 북위 17도선 이북은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 그 이남은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이었다. 북위 16도선 바로 아래였던 퐁니·퐁넛은 남베트남에 속했다. 북베트남에선 1954년 프랑스군을 물리친 호찌민의 베트남노동당(1976년부터 공산당으로 개칭)이 전권을 장악하고, 중국과 소련의 지원 아래 농업 부문의 사회주의화와 공업 발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남베트남의 통치자는 1955년 10월26일 미국의 도움으로 집권한 응오딘지엠 대통령이었다. 퐁니·퐁넛의 운명은 응오딘지엠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는 가톨릭 편향이 지나쳐 불교도를 탄압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5만여 명에 이르는 공산주의자들을 검거하는 등 철저한 반공정책도 폈다. 족벌정치와 부농 중심의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의 마음은 대통령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중도우파 민족주의자들마저 등을 돌리고 공산세력에 동조하는 실정이었다.


 서로를 존중했던 베트콩과 남베트남군


 1960년, 남베트남에선 두 가지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첫째, 11월 공수부대를 앞세운 응웬찬티 대령의 쿠데타가 대통령궁까지 점령하고도 고위 장성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우파 내부 분열과 줄줄이 이어질 군부 쿠데타의 서막이었다. 둘째, 12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조직되었다. 지엠 정권의 무차별적 반대파 체포가 극심해지고 농민들의 불만이 서서히 고조되는 상황에서 체계적인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엔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지엠 정권에 반대하는 농민·노동자·지식인·소수민족·불교도 등이 망라되었다. 베트남 공산주의자를 칭하는 ‘베트콩’이라는 이름도 이때 탄생했다. 북베트남 정부는 후방 기지를 자임하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남베트남 정부 관리들과 공공건물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야유나무의 나이테가 쌓여갔다. 5년의 세월이 흐른 1965년 3월8일, 퐁니·퐁넛으로부터 북쪽 25km 거리인 남베트남 제2의 도시 다낭에 미 해병부대 3500명이 들어왔다. 4월에는 미 해병 2개 대대가 증파됐다. 미 공군의 북베트남 폭격(북폭)과 미 지상군의 남베트남 투입 결정으로 이뤄진 조치였다. 1964년 8월2일, 북베트남의 통킹만 기지에서 구축함 매독스호가 피격당한 일은 미국에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54년, 프랑스-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8년 만에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미국-베트남 전쟁)의 막이 올랐다. 1965년 10월9일 깜라인에 도착한 한국군 해병대는 1967년 12월22일 호이안으로 올라왔다. 호이안은 퐁니·퐁넛 남쪽 35km 거리에 위치한 오래된 국제 무역도시였다. 남베트남의 권력자도 바뀌었다. 1963년 11월 쿠데타군에 살해된 응오딘지엠 대신, 젊은 장군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1967년 9월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오른 응웬반티에우와 응웬까오끼가 그들이었다. 


 퐁니·퐁넛엔 숨 막히는 긴장과 나름의 평화가 교차했다. 낮에는 남베트남 권력이 작동했지만, 밤의 주인은 베트콩이었다. 베트콩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보급투쟁과 정치공작을 병행했다. 촌장 등 남베트남 쪽 감투를 쓴 이들은 밤이 되면 다낭으로 피신했다. 가족 전체 또는 일부가 다낭과 호이안으로 이주한 경우도 많았다. 베트콩들은 악랄한 반동분자를 제거하기 위해 부비트랩을 세팅하거나 암살 계획을 세웠다. 베트콩에 완전히 장악된 마을은 아니었다. 인근 1번 국도의 킴루 초소엔 남베트남 군인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일가친척은 퐁니·퐁넛에 살았다. 베트콩들은 남베트남군을 존중했고, 남베트남군도 베트콩을 묵인했다. 두 마을은 일종의 ‘안전지대’였다. 미군은 이곳을 ‘발포제한 구역’(Control Fire Zone)으로 설정해놓았다. 움직이는 물체라면 무엇이든 사격할 수 있는 ‘발포자유 구역’(Free Fire Zone)이 아니었다. 한국군은 퐁니의 관문인 야유나무 근처에서 마음대로 소총 방아쇠를 당겨선 안 되었다.


 찬란했던 참파 문명, 그리고 전쟁


 퐁니와 퐁넛은 행정구역상 촌(村)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리(里). 퐁니촌에는 럽남 등 5개의 마을이 있었다. 퐁넛촌도 넛동린·넛니압 마을 등으로 다시 쪼개졌다. 두 촌을 합해도 100가구가 넘지 않았다. 퐁니·퐁넛을 포함한 12개 촌은 디엔안사(社) 소속이었다. 디엔안은 디엔증·디엔터 등 20개의 사들과 함께 디엔반현(縣)에 속했다. 다시 디엔반과 같은 현이 18개 모여 꽝남다낭성(꽝다성·1975년부터 꽝남성으로 바뀜)을 형성했다. 꽝남다낭성의 성청 소재지인 땀끼시는 베트남의 정중앙이라는 자부심을 지녔다. 북쪽 하노이까지 860km이고, 남쪽 사이공(호찌민)까지도 860km였다. 꽝남다낭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퐁넛촌은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베트남 땅의 배꼽 언저리에 놓여 있었다.


 꽝남은 본래 베트남 땅이 아니었다. 2세기인 192년에 세워진 임읍(林邑)에서 15세기 점성국에 이르기까지 1천 년 넘는 기간동안 이곳엔 인도 힌두문명을 꽃피운 참파 왕국이 존재했다. 9세기에 꽝남은 ‘인드라푸라’라는 이름의 참파 수도였다. 10세기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베트남 최초의 왕조 ‘대월국’(大越國)은 현재의 베트남 북부만을 지배하고 있었다. 참파는 북위 18도선에 위치한 꽝빈성과 꽝남, 그리고 남부지방인 판랑까지 거느렸다. 대월국은 남진하려 했고, 참파 왕국은 북진하려 했다. 14세기 대월국이 후에까지 내려온 뒤, 두 나라는 후에와 다낭을 잇는 하이반 패스(구름고개)를 사이에 놓고 밀고 밀리는 싸움을 거듭했다. 결국 대월국 레왕조의 레탄똥(聖宗)은 1471년 3월 하이반 패스를 넘어 현재의 다낭과 꽝남을 함락시키고 당시 참파의 수도였던 비자야(꾸이년)까지 손에 얻었다. 참파군 6만 명이 살해당하고 3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참파 왕국 점성의 왕이었던 반라짜또안도 죽음을 맞이했다. 참파 소멸의 시작이었다. 대월국의 레탄똥은 이곳을 ‘광활한 남쪽’(廣南)이라 하여 ‘꽝남’이라 이름 붙였다. 17세기에 대월국이 왕자의 난과 왕위쟁탈전으로 쇠락하다 북부의 쩐씨 정권과 남부의 응웬씨 정권으로 분열되었을 때, 후에에 수도를 둔 응웬씨 정권도 ‘꽝남국’으로 불렸다.


 꽝남은 참파 왕국이 절정기를 구가하던 1190년, 라이벌이었던 서쪽 캄부자(캄보디아) 앙코르 왕조 군대의 침략을 받고 32년간 전쟁을 벌이며 숱한 피를 땅에 뿌렸다. 1177년 참파 왕국이 앙코르 왕국을 먼저 침략했다가 보복을 당한 것이었다. 1283년엔 몽골 군대의 침입을 겪었다. 15세기 대월국과의 전쟁 끝에 베트남 왕조의 땅이 된 뒤엔 다낭에서 프랑스 군대를 맞았다. 응웬씨 정권의 마지막 지배자인 응웬푹아인이 1787년 데리고 온 1650명의 병력이었다. 그는 결국 프랑스의 도움을 얻어 북쪽의 떠이선 정권을 무너뜨리고 베트남 최후의 통일왕조를 세웠다. 1804년 청나라는 응웬푹아인에게 ‘월남’(越南)이라는 국호를 수여했다. 19세기까지 남부 판랑 지역으로 쪼그라든 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참파 왕국은 월남 2대 민망 황제 때인 1832년 월남에 흡수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1975년 사라진 남베트남과 같은 운명이었다.


 야유나무에서 4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엔 참파의 흔적이 있었다. 21.5m 높이의 붉은 참파 석탑 하나가 외롭게 놓인 방안 유적지다. 서쪽 30km 꽝남성의 투본강 유역 정글 깊은 곳에 자리한 미선 유적지엔 찬란했던 참파 문명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건축물과 조각작품들이 풍부하게 남아 있었다. 미선 유적지는 전쟁이 끝난 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베트남전쟁과 자연 파괴 속에서 베트남 전역에 200곳이 넘던 참파 유적은 30여 곳 남았다.


 총탄에 쓰러진 노인과 부녀자들


 1968년 2월12일. 한국군 해병 제2여단 제1대대 1중대원들은 퐁니의 야유나무 곁을 스쳐갔다. 중국군과 싸워 이겨 세운 땅, 참파 왕국일 때 대월국과 앙코르 왕조와 몽골군과의 잇따른 전쟁으로 양쪽 군인들의 주검이 산을 이루던 땅, 프랑스군과 미군에 이어 1945년 패망 직전의 일본군까지 잠시 머물던 땅. 그 꽝남에 한국군이 바글거렸다. 그날 오전, 야유나무의 작은 이파리들을 간지럽히던 바람은 어느 순간 피바람으로 돌변했다. 야유나무는 다 보았다. 퐁니·퐁넛의 민가로 진입하던 군인들을, 총탄에 쓰러지던 노인과 부녀자들을, 불타는 초가집에서 나와 울며 달리던 소녀들을, 환자들을 긴급히 수송하던 미군 헬기를. 언제부턴가 퐁니·퐁넛 사람들은 그 피바람을 이렇게 불렀다. ‘야유나무 학살.’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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