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산 시인의 꿈삶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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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날 아침에 가슴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다
제주4ㆍ3평화재단에서 발행한 『4ㆍ3과 평화』를 펼쳐 보았다
열두 살에 사삼이 지나갔다는 강순아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영아 오빠는 한림국민학교에서 총살당해 여드랑밭에 묻히고
영보 오빠는 여드랑밭에서 일하다 끌려가 섯알오름에서 죽고
두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멍은 밭에서 웃통을 벗고 훌떡훌떡 뛰고
나보다 가슴이 더 깊이 아픈 사람들을 생각하며 돌아오는데
멀구슬나무가 자꾸만 나를 붙잡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머니 가슴처럼 쭈글쭈글한 열매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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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관덕정 쪽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고 하였다
붉은 동백꽃들이 뚝뚝 떨어졌다고 하였다
감저공출 절대반대 보리공출 절대반대를 외치며
3ㆍ1절 만세를 부를 때에는 아직 미처 알지 못했다
푸른 잎들과 보라색 꽃들이 하늘을 뒤덮을 때였다
새들의 둥지를 품고 밤낮으로 젖을 물리던 때였다
어느 맑은 날 나는 차마, 끝내, 보고야 말았다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젊은 청년을 여드랑밭에 묻는 것을 보았다
큰 바람에 밭담이 무너져 무덤이 없어지는 것도 보았다
섯알오름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묻혔다는 소문도 들었다
검질을 매다가 웃통을 벗고 훌떡훌떡 뛰는
양쪽 가슴에 두 아들을 묻고 겨우 살아가는 어머니도 보았다
마을들까지 불태워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동쪽 어느 마을에 빈 가슴으로 살아간다는 불칸낭처럼
가슴속이 새카맣게 타버린 나는 그때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아, 내가 업어서 키운 열두 살 소녀가 돌아왔다
재봉틀소리도 총소리로 들렸다는 그 소녀가 다시 돌아왔다
내 몸으로 염주를 만들어 나를 어루만지며 기도를 하고 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 따뜻한 피가 돌며 또 다른 내가 돋아난다
* 먹쿠실낭 : 멀구슬나무
배진성 1988년 『문학사상』『동아일보』등단. 시집 『땅의 뿌리 그 깊은 속』,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지상에서』,『길 끝에 서 있는 길』, 『꿈섬』.전자우편 : yeard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