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나무 숲에서 고흐를 만났다

― 이어도공화국 꿈삶글 0047

by 강산





올리브 나무 숲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났다 / 배진성





「그들은 잠시 함께 이야기한 다음/나를 향해 인사하듯 손짓을 하였고,/거기에 나의 스승님은 미소까지 지으며//나에게 더 큰 영광을 베풀어 주셨으니,/나를 자신들의 무리에 포함시켜 주어/나는 현인들 무리의 여섯째가 되었다//그렇게 우리는 불이 있는 곳까지 가면서/거기서는 말하는 것이 좋았던 만큼, 여기서는/침묵하는 것이 좋을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우리는 고귀한 성() 아래에 이르렀는데,/그곳은 일곱 겹의 높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고/아름다운 냇물이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그 냇물을 단단한 땅처럼 밟고 지나가 나는/성현들과 함께 일곱 성문 안으로 들어갔고/신선하게 푸른 초원에 도착하였다//거기에는 신중하고 위엄에 찬 눈빛과/권위 있는 모습의 사람들이 있었는데,/그들은 가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들 모두를 바라볼 수 있도록/우리는 한쪽으로 물러났으며,/높고 탁 트여 밝은 곳으로 갔다//거기에서는 똑바로 푸른 초원 위로/위대한 영혼들을 볼 수 있었으니/보기만 해도 내 마음은 고양되었다//엘렉트라가 여러 동료들과 있었는데/그들 중에서 헥토르와 아이네아스,/독수리 눈매의 카이사르를 알아보았다//또 카밀라와 펜테실레이아를 보았고,/다른 한쪽에 딸 라비니아와 함께/앉아 있는 라티누스왕을 보았다//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낸 브루투스, 루크레티아,/율리아, 마르티아, 코르넬리아,/또 한쪽에 홀로 있는 살라딘을 보았다// ― 단테의『신곡(神曲)』36


「산상(山上)」//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강(江) 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산(山) 위에까지 왔다/아직쯤은 사람들이/바둑돌처럼 벌여 있으리라//한나절의 태양(太陽)이/함석지붕에만 비치고,/굼벵이 걸음을 하던 기차(汽車)가/정거장(停車場)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吐)하고/또, 걸음발을 탄다//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좀 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다// _ (1936.5. 윤동주 19세)/23. 산상(山上) (시)/1집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2집 (창) *1에서 2로 옮겨 씀/정음사 출판사 중판 1955년, 삼판 1976년// ―『윤동주』23


제19장//성(聖)스런 체험을 그만두고 아는 체를 버리면/사람에게 이로움이 백 배나 더할 것입니다/인()을 그만두고 의()를 버리면/사람이 효성과 자애를 회복할 것입니다/재간 부리기를 그만두고 이보려는 마음을 버리면/도둑이 없어질 것입니다/이 세 가지는 문명을 위하는 일이지만/그 자체만으로 부족합니다//그러므로 뭔가 덧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함을 드러내고/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욕심을 줄이는 것입니다// _ (제19장 성스런 체험을 그만두고 - 소박성 회복 ―『도덕경(道德經)』19


「바위의 울음」//세월이 바위를 쓰다듬자/그 표면에 눈물이 맺혔다//단단함에도 틈이 있었다/그 틈은 고통이 아니라 생의 자리였다//바위는 울음을 통해/더 부드러워졌다//흐르는 물이/그 눈물을 노래로 바꿨다// _ (『숨의 연대기』제2부 - 돌과 바람의 언어(형태의 창조) 5 「바위의 울음」) ―『청람 김왕식』16


「나무 발전소 1」//세상에는 돌아가는 것들 투성이다//스스로 모래시계 되는 겨울나무를 본다/하늘과 땅의 영혼이 뒤집힌다//발전소, 발전기와 터빈이 한 몸으로 돌아가고 거대한 보일러 속에서 파이어 볼이 돌아간다 그 속에서 사랑과 이별을 껴안은 계절이 돌아가고 물과 불이 돌아가고 해와 달이 돌아가고 삶과 죽음이 돌아가고 나와 하느님이 함께 돌아간다//온갖 것들이 돌아가는 발전소에서 나는/나무 조상들을 태워 별빛을 만든다//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하느님은 오늘도 야간근무 하고 계신다//땅속 오래 묻혀 있던 나무들/부관참시 지켜보던 별이 눈을 찔끔 감는다//나무의 뿌리에도 발전소가 있어/물관부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들//나무 발전소가 세상을 돌리고 있다// _ (2012년 『이어도공화국 4 - 꿈섬』 「나무 발전소 1」) ―『배진성』12


「올리브 나무와 빈센트 반 고흐」//빈센트 반 고흐는 1889년 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주로 《올리브 나무》(Olive Trees)를 주제로 최소 15점의 그림을 그렸다 1889년 5월부터 1890년 5월까지 자신의 요청으로 요양원에서 생활하며 요양원 정원을 그렸고, 외부로 나갈 수 있는 허가를 받자 인근의 올리브 나무, 사이프러스나무 및 밀밭 등을 그렸다 반 고흐는 올리브 나무에 매료되었다 올리브 나무의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색상과 불규칙한 형태는 그에게 새로운 기법과 접근 방식을 실험하도록 자극했다 그는 여러 시간대 별로 그림을 그렸고 계절에서 영감을 받은 색상을 사용했다 그의 그림 중 하나인 《산악 풍경 속 올리브 나무》는 《별이 빛나는 밤》을 보완하는 작품이었다 올리브 나무 그림은 반 고흐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1889년 5월에 그린 올리브 나무 연작은 생명, 신성, 삶의 순환을 상징했고, 1889년 11월의 연작들은 겟세마네에서 고뇌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상징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올리브를 따는 사람들》을 그린 그의 그림들은 삶의 순환 중 하나인 수확 또는 죽음을 묘사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여준다 또한 이 그림들은 인간이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어떻게 신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반 고흐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휴식과 안정을 찾았다 1889년 올리브 나무 연작이 제작될 당시 그는 질병과 정서적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이 그림들은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반 고흐 자신도 이 작품들을 높이 평가했다// ―『빈센트 반 고흐』1




올리브 나무 숲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났다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 올리브 나무를 사랑했던 화가, 아몬드 꽃을 좋아했던 화가, 해바라기꽃을 사랑했던 화가,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잘라버린 화가, 그리고 끝내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버린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한다 그가 보냈던 편지를 뒤늦게 다시 읽기 시작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어린 시절 (1853~1869)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에서 가톨릭 신자가 많았던 쥔더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22~1885)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 카르벤투스(Anna Cornelia van Gogh-Carbentus, 1819~1907)였으며, 둘 사이의 장남이었다 빈센트 빌럼이라는 이름은 할아버지 이름과 1년 전 사산되어 죽은 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의 할아버지 빈센트(1789~1874)는 유명한 미술품 거래상으로, 1811년 레이던 대학교에서 신학 학위를 받은 분이었다 할아버지 빈센트에겐 여섯 아들이 있었고, 그중 세 명이 미술품 거래상이 되었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헤이그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목사의 막내아들이었다 둘은 빈센트의 이모(코넬리아)와 삼촌(빈센트)이 결혼했을 때부터 만났다 빈센트의 부모는 1851년 5월에 결혼했고, 곧이어 쥔더르트로 이사했다 남동생 테오도뤼스 테오는 1857년 5월 1일에 태어났다 그 외의 형제자매로는 코르넬리스 빈센트 코르, 엘리사벳 휘베르타 리스, 아나 코르넬리아, 빌레미나 야코바(애칭 빌)이 있다 그들의 사이는 그렇게 좋은 게 아니어서 빈센트는 오직 빌레미나, 테오도뤼스하고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주변에 항상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버지는 목사였기 때문에 적은 봉급을 받았지만, 아버지가 부임한 교회에서 가족에게 집, 하녀, 요리사 두 명, 정원사, 마차, 말을 제공했다


빈센트는 진지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집에서 어머니와 가정교사에게 가정교육을 받았고, 1860년에는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쥔더르트 마을 학교로 보내졌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1861년부터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3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집에서 32km 떨어진 개신교 교사가 운영하는 제벤베르헌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는데, 빈센트는 거기서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껴서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1866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틸뷔르흐의 중학교로 보내졌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빈센트에게 그림을 그리라 권유했는데, 초기 그림들은 후대의 그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빈센트가 틸뷔르흐의 빌럼 2세 국립중학교에 입학한 것도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예술가였던 콘스탄트 코르넬리스 하위스만스(Constant Cornelis Huijsmans, 1810~1886)가 교사로 있기 때문이었다 하위스만스는 기술적 완성도보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주는 인상을 포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1868년 3월, 빈센트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빈센트는 후에 자신의 학창 시절이 "엄숙하고 차갑고, 불모지"였다고 회고했다


사회 초년 시절 / 구필 화랑 (1869~1876)


250px-VincentVanGoghFoto.jpg 1876년의 빈센트


1869년 7월, 빈센트의 큰아버지 센트는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 빈센트를 위한 자리를 구해주었다 빈센트는 화랑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뒤, 1873년에는 런던 사우샘프턴가에 있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옮겨 스톡웰의 해크포드 로드 87번지에서 하숙하였다 빈센트의 제수인 조 반 고흐 봉거는 이 순간이 빈센트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빈센트는 20살에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을 정도로 일에서 성취감을 느꼈다 빈센트는 하숙집 딸인 외제니 로이어에게 푹 빠졌지만, 외제니 로이어는 이미 전에 하숙하던 사람과 비밀리에 약혼했던 탓에 빈센트의 고백을 거절했다 이후 빈센트는 자신을 가두고 종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후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1875년에 파리로 전근을 주선했고, 빈센트는 거기에서 미술상들이 미술품을 지나치게 상품화한다며 분개하였다 결국 1년 후에 해고되었다


1876년 4월, 빈센트는 영국으로 돌아가 램스게이트의 작은 기숙학교에서 무급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였다 학교 주인이 미들섹스의 아이즐워스로 이사하자, 빈센트도 따라갔다 그러나 빈센트는 거기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이후 런던의 선교단체에서 직업을 찾다가, 감리회 소속 목사인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Thomas Slade Jones)의 조수로 생활을 했다 빈센트는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와 함께 궁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몇 차례 설교도 했다


그러나 빈센트는 거기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왔다 큰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도르드레흐트의 서점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 일에 만족하지 못하여 낙서를 하거나 성경의 구절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기독교에 몰두했고, 채식을 하며 검소한 식사를 하는 등 점점 더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마치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살았다 당시 그의 룸메이트였던 파울루스 반 괴를리츠에 따르면, 반 고흐는 고기를 먹지 않고 검소하게 식사했다고 하였다


선교사의 길 (1877~1880)


1877년, 아버지를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빈센트의 열정에 부응하여, 가족들은 그를 암스테르담에서 존경받는 신학자였던 이모부 요한네스 스트릭커(Johannes Stricker, 1816~1886)에게 보냈다 빈센트는 이모부의 지도 아래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신학 입학시험을 준비했지만, 시험에 실패하고 1878년 7월에 이모부의 집을 떠났다 이후 그는 브뤼셀 근교 라켄에 있는 개신교 선교 학교에서 3개월 과정을 수강했다 비록 전도사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벨기에의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파견될 수 있었다


1879년 1월, 빈센트는 벨기에 보리나주에 있는 가난한 광산촌 쁘띠와스메스에서 평신도 선교사직을 맡았다 가난한 신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빵집에서 구한 하숙집을 노숙자에게 내어주고 작은 오두막으로 이사를 가서, 짚을 침대 삼아 잠을 잤다 그러나 빈센트를 파견한 선교단체에서 보낸 시찰단은 빈센트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성직자의 존엄성을 훼손했다"며 해고하였다 빈센트는 중재를 부탁하고자 브뤼셀까지 75km를 걸어, 아는 목사를 찾아갔고, 목사의 중재로 보리나주에 있는 퀴엠으로 돌아와 다시 무급으로 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빈센트는 에텐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라는 부모의 압력에 못 이겨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1880년 3월까지 집에 머물렀는데, 가족은 빈센트의 정신상태를 걱정하여, 아버지는 빈센트에게 헤일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빈센트는 1880년 8월에 퀴엠으로 돌아가 광부와 함께 10월까지 머물렀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테오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면서 그것들을 그림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빈센트는 이제 성직보다도 미술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화가의 길


에텐, 헤이그 (1881~1883)

250px-Cuesmes_JPG001.jpg 빈센트가 예술가 되기로 결심한 퀴엠의 집


1880년 말에 그는 네덜란드 예술가 빌럼 로엘로프스(Willem Roelofs, 1822~1897)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는 테오의 권유에 따라 브뤼셀으로 떠났다 로엘로프스는 정식 미술 학교를 싫어하는 반 고흐를 설득하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도록 했다 1880년 11월, 아카데미에 등록한 빈센트는 해부학, 소묘, 원근법 등 기본 미술 교육을 받았다


250px-Kee_Vos_met_zoon_Jan-cropped.jpg 코넬리아 키 보스스트릭커와 그의 아들 얀. 1880년 경 사진.


이듬해 빈센트는 1881년 4월 에텐으로 완전히 돌아와 가족들과 장기간 머물렀다 빈센트는 계속 그림을 그렸는데 이웃을 소재로 삼은 그림이 많았다 1881년 8월, 과거 암스테르담에서 신세를 졌던 이모부 요한네스 스트릭커의 딸 코넬리아 "키" 보스스트릭커(Cornelia "Kee" Vos-Stricker)가 집에 방문하였고, 빈센트는 그녀와 같이 오래 산책을 하곤 했다 코넬리아는 빈센트보다 7살 연상으로 8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얼마 전 남편을 잃어 미망인이 된 상황이었다 빈센트는 모든 가족을 놀라게 하며 코넬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했는데, 코넬리아는 "아니, 안돼, 절대"(Nooit, neeen, nimer)라며 거절하였다 코넬리아는 곧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고, 빈센트는 그림을 판매하기 위해 헤이그를 방문하여 외사촌인 안톤 마우베를 만났다 마우베는 빈센트가 갈망했던 성공한 예술가였다 마우베는 그에게 몇 달 후에 다시 오라고 초대했고, 그동안 목탄과 파스텔로 작업해 보라고 제안했다 반 고흐는 에텐으로 돌아가 이 조언을 따랐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16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들에서 샤를 바르그의 드로잉 강좌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강좌 덕분에 이전에는 그릴 수 없었던 것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바르그의 드로잉 연습을 꼼꼼히 연구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인물 소묘에 대한 통찰력이 더 깊어졌어 측정하고, 보고, 큰 윤곽선을 그리는 법 등을 배웠지 그래서 예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점차 가능해지고 있어 신께 감사드립니다" — 반 고흐, 테오에게 보낸 편지 172번, 1881년 9월


1881년 11월 말에는 이모부 요한네스 스트릭커에게 다시 편지를 쓰고,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다 이모부는 테오에게 이 편지가 공격적이라고 설명했다 코넬리아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이모부 부부는 빈센트의 집요함이 역겹다고 적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램프의 불에 왼손을 집어넣고 "내가 불꽃 속에서 내 손을 유지할 수 있는 동안 만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모부는 빈센트에게 코넬리아의 거절을 받아들여야 하며,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는데, 이는 주로 반 고흐가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헤이그를 방문하여 한 달 동안 마우베에게 수채화를 배우고,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교회에 가지 않겠다며 아버지와 다툰 끝에 다시 헤이그로 떠났다 1882년 1월 마우테는 유화를 가르쳐주고 작업실을 마련할 돈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한 달도 되지 않은 채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는데, 아마도 석고 모형을 그리는데 대한 의견 차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 고흐는 길거리 사람들을 모델로 고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우베는 이러한 관행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다 빈센트는 6월에 임질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서 3주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에게서 빌린 돈으로 첫 유화를 그렸다 빈센트는 자신의 유화 작품을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250px-Vincent_Willem_van_Gogh_016.jpg 《헤이그의 아틀리에에서 바라본 지붕》, 1882년 그림.


마우베는 1882년 3월부터 빈센트의 편지에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가 차갑게 돌아선 것은, 빈센트가 알코올 중독자인 매춘부 클라시나 마리아 "시엔" 호르니크(Clasina Maria "Sien" Hoornik, 1850~1904)라는 여인과 동거중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후였다 빈센트는 1882년 1월 말, 다섯살 짜리 딸을 가진데다 임신중이었던 시엔과 교제를 시작하였다 시엔은 이전에도 두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사망했는데 빈센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같은해 7월 2일에 그녀는 아들 빌럼을 낳았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이들의 관계를 알게 되자, 빈센트에게 이들을 떠나보내라고 설득했다 빈센트는 처음에는 반항하고 시엔과 아이들을 위해 도시 밖에 집을 얻어줄까 생각했지만, 1883년에 결국 이들을 떠나보냈다


가난때문에 시엔이 다시 매춘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반 고흐는 점점 불행해졌고, 가족 생활이 자신의 예술적 발전과 양립할 수 없다고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시엔은 딸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아들은 오빠에게 맡겼다 빌럼은 12살 때 어머니와 함께 로테르담에 방문했는데, 삼촌이 시엔에게 빈센트와 결혼해서 빌럼을 합법화하라고 설득하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빌럼은 빈센트가 자신의 아버지였다고 믿었지만, 둘이 만난 시기를 고려할 때 빌럼의 생부가 빈센트일 가능성은 낮다 시엔은 1904년 스헬더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1883년 9월, 반 고흐는 네덜란드 북부의 드렌터주로 이사했다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12월에 노르트브라반트주 뉘넌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뉘넌과 안트베르펜 시기 (1883~1886)


250px-Van_Gogh_-_The_Parsonage_Garden_at_Nuenen.jpg 《뉘넌의 목사관 정원》, 1884년 5월 그림.
250px-Van-willem-vincent-gogh-die-kartoffelesser-03850.jpg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4월 그림.


빈센트는 뉘넌에서 그림과 소묘에만 몰두하였다 집 밖에서 빠르게 작업하며, 직조공과 오두막을 스케치 했다 싱어 라런에서 2020년 3월에 도난당한 《뉘넌의 목사관 정원》도 이 때 작품이었다 1884년 8월부터 이웃에 살던 열 살 연상의 마르호트 베흐만(Margot Begemann)이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는 현장에 따라 다녔다 그녀는 반 고흐에 사랑에 빠졌고, 반 고흐도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마음을 열였다 둘은 결혼을 추진했지만, 양가 어디도 결혼에 찬성하지 않았다 마고는 독극물인 스트리크닌을 먹어 음독자살을 기도했지만 빈센트가 급히 근처 병원으로 데려간 끝에 살아남았다 1885년 3월 26일에 심근 경색으로 빈센트의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반 고흐는 1885년에 정물화를 여러 점 남겼다 뉘넌에서 2년가량 머무는 동안, 그는 수많은 소묘와 수채화, 그리고 200여점의 유화를 완성했다 이 시기의 그림은 주로 음침한 흙빛, 특히 어두운 갈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기 작품에 보이는 생생한 색채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이즈음 파리의 딜러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 테오는 빈센트에게 전시할 준비가 된 그림이 있는지 물었는데, 5월에 《감자 먹는 사람들》과 몇 년간 작업한 《농민 인물 습작》 여러점을 보냈다 그러나 판매가 잘 되지 않아 빈센트는 테오에게 좀 더 영업을 잘 해보라고 이야기하고, 테오는 빈센트의 그림이 다른 인상주의 작품들처럼 밝지 못하고 너무 어두침침하다며 반박했다 8월에 헤이그에 있는 상인 루르스의 가게 창문에 처음으로 공개 전시되었다 9월에는 빈센트의 작품에 모델로 참여한 마을 농가 소녀 중 한 명이 혼외임신을 하는데, 빈센트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마을의 전임 성직자는 주민들에게 더 이상 빈센트의 그림에 모델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펼쳐진 성경과 촛대, 소설책이 있는 정물》, 1885.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250px-Vincent_van_Gogh_-_Head_of_a_skeleton_with_a_burning_cigarette_-_Google_Art_Project.jpg 《담배 피는 해골》. 1885년~1886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250px-Vincent_van_Gogh_-_Peasant_woman_digging.jpg 《오두막 앞에서 땅을 파는 여자 농부》. 1885. 토론토 온타리오 미술관 소장.
250px-Vincent_van_Gogh_-_T%C3%AAte_de_paysanne_%C3%A0_la_coiffe_blanche_%281884%29.jpg 《하얀 모자를 쓴 할머니 농부의 얼굴》, 1884년경, 개인소장


빈센트는 겨울 11월에는 안트베르펜으로 이사하여, 회화용품점 위층의 방을 빌렸다 생활비는 아주 빠듯해서 회화용품을 좀 구입하고 빵, 커피, 담배를 사는 것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1886년 2월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7개월 동안 따뜻한 식사는 여섯 번 정도 한 게 전부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즈음 이가 흔들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빈센트는 자신의 작품이 침침하고 인기가 없다는 테오의 말을 기억하고 안트베르펜에서 미술관에 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을 감상하는 등 채색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림에 카민, 코발트블루, 파리스 그린 등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안트베르펜의 부둣가에서 일본에서 들어온 우키요에 목판화를 구입했고, 나중에 자신의 그림에 이 스타일을 접목시켰다 이즈음 빈센트는 다시 폭음을 하기 시작하였다 1886년 2-3월에 과로, 부실한 식사, 과한 흡연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는데, 거기서 매독도 치료한 것으로 추정된다


250px-Vincent_van_Gogh_-_Farm_with_stacks_of_peat_-_Google_Art_Project.jpg 《이탄 더미가 있는 농장》, 1883년경
250px-Van-willem-vincent-gogh-die-kartoffelesser-03850.jpg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회복후, 빈센트는 학문적인 교육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안트베르펜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 고등부 입학 시험에 응시하여, 1886년 1월에 회화와 드로잉 부문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는 과로, 부실한 식단, 과도한 흡연으로 병들고 쇠약해진 상태였다 1886년 1월 18일부터 석고상 드로잉 수업과 회화 수업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빈센트의 파격적인 화풍과 정규 교육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곧 학교 원장이자 회화 교수인 샤를 베를라(Charles Verlat)와 마찰을 빚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로잉 교수 프란츠 빙크(Franz Vinck)와도 갈등이 생겼다 빈센트는 외젠 시베르트(Eugène Siberdt) 교수의 석고상 드로잉 수업에 참석하는데, 거기서마저 윤곽선을 제대로 그려야 한다는 시베르트의 지도를 따르지 않아 갈등을 빚었다 밀로의 비너스를 그리는 수업시간에 반 고흐가 플랑드르 농부 여인의 벌거벗은 상체를 그리는 모습을 본 시베르트는 크레용으로 반 고흐의 캔버스를 힘주어 수정하다가 종이를 찢었다 반 고흐는 격렬한 분노를 터뜨리며 시베르트를 향해 "당신은 젊은 여성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는게 분명하군, 젠장! 여자란 자고로 허리, 엉덩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골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야!"라고 소리쳤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후 빈센트는 수업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고 파리로 떠났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난 3월 31일, 교수진은 반 고흐를 포함한 17명의 학생들을 유급시키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시베르트가 반 고흐를 추방시켰다는 이야기는 낭설이다


파리 시기 (1886~1888)


250px-Toulouse-Lautrec_de_Henri_Vincent_van_Gogh_Sun.jpg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가 1887년에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종이에 파스텔.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250px-John_Peter_Russell_Van_Gogh_drawings.jpg 존 러셀이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스케치》 다섯 점


1886년 3월, 빈센트는 파리로 이사하여, 몽마르트르에 있는 동생 테오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에서 4월부터 5월까지 미술을 배웠다 거기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화가 존 러셀을 만났다 러셀은 1886년 반 고흐의 초상을 그렸다 그 외에도 폴 세잔의 그림을 전시하는 유일한 장소였던 줄리앙 탕기의 미술용품점에서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크탱,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툴루즈로트레크는 파스텔로 반 고흐의 초상화를 그렸다 줄리앙 탕기의 가게에서는 같은 해에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점묘화와 신인상주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테오는 몽마르트르 대로에 있는 자신의 화랑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계속 수집했지만, 빈센트는 이런 새로운 종류의 화풍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빈센트와 테오는 6월에 르삑 54번지에 있는 더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 빈센트는 파리에 살면서 친구와 지인들의 초상화, 정물화, 그리고 물랭 드 라 갈레트, 몽마르트르, 아스니에르, 센 강 등 여러 풍경화를 그렸다 안트베르펜에서 시작된 우키요에 목판화에 대한 관심은 점점 깊어져, 수백 점의 목판화를 수집해 파리의 작업실 벽을 장식하기도 했다 일본풍 그림에도 도전하여 잡지 《파리 일뤼스트르》에 실린 게이사이 에이센의 작품 《오이란》그림의 모작을 그리기도 했다


1886년 말, 테오는 빈센트와 함께 사는 것이 "거의 견딜 수 없는" 것이라 말할 정도로 갈등을 겪다가, 1887년 초에 화해했다 빈센트는 파리의 북서쪽 교외인 아니에르쉬르센으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시냐크를 알게 되었다 빈센트가 점묘법 요소를 일부 받아들인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점묘법은 캔버스에 수많은 작은 색점을 찍어 멀리서 보면 색이 시각적으로 혼합되어 보이는 효과를 내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파란색과 주황색과 같은 보색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대비를 강조한다


들라리바렛(Delareybarette) 미술관에서 아돌프 몽티셀리의 초상화를 본 후로부터, 더 밝은 색채와 대담한 붓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1888년 그린 《생트마리 해변 풍경》그림에서 잘 드러난다 2년 후, 빈센트와 테오는 몽티셀리의 그림에 관한 책을 출판하고 비용을 지불했으며, 그의 작품을 몇 점 수집하기도 했다


250px-Vincent_van_Gogh_-_Windmills_on_Montmartre_-_Google_Art_Project.jpg 《블루트핀 풍차》(1886년경) 물랭 드 라 갈레트 연작 및 몽마르트르 연작에서. 도쿄 아티존 미술관 (F273)
120px-Van_Gogh_-_la_courtisane.jpg 《오이란》 (게이사이 에이센을 따라서), 1887.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250px-Van_Gogh_-_Portrait_of_Pere_Tanguy_1887-8.JPG 탕기 영감의 초상화, 1887. 파리 로댕 박물관
250px-Vincent_van_Gogh_-_In_the_caf%C3%A9_-_Agostina_Segatori_in_Le_Tambourin_-_Google_Art_Project_2.jpg 카페 탕부랭에 앉아 있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1887, 반 고흐 미술관


아니에르쉬르센에 있는 동안 빈센트는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포함하여 공원, 식당 등 여러 풍경화를 그렸다 1887년 11월 테오와 빈센트는 파리에 막 도착한 폴 고갱과 친구가 되었다 그해 말에는 베르나르, 앙크탱, 툴루즈로트레크와 함께 몽마르트르의 43번가 드 클리시 거리에 있는 그랑부용 레스토랑 뒤 샬레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베르나르는 이 전시회가 파리의 다른 어떤 전시회보다 앞서 있었다고 썼다 베르나르와 앙크탱은 여기서 처음으로 그림을 판매했고, 빈센트는 폴 고갱과 작품을 교환했다 이들은 전시회에서 예술과 사회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갔는데, 카미유 피사로,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와 같은 전시회 방문객들도 이 논의에 참여했다 1888년 2월, 2년 동안 2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린 빈센트는 요양을 위해 파리를 떠났다 출발 몇 시간 전, 테오와 함께 쇠라의 화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예술적 돌파구

아를 (1888–89)


250px-Vincent_van_Gogh_-_The_yellow_house_%28%27The_street%27%29.jpg 《노란 집》, 1888년경.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독주로 인해 몸이 망가지고 흡연으로 인한 기침에 시달리던 1888년 2월, 반 고흐는 아를로 안식처를 찾아 떠났다 그는 예술가 공동체를 세우려는 생각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덴마크 화가 크리스티안 무리에-페테르센이 두 달 동안 그와 같이 지냈는데, 처음에 반 고흐는 아를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편지에서 그는 이곳을 외국처럼 묘사했다 "주아브병, 사창가, 첫 영성체를 받으러 가는 사랑스러운 아를 소녀, 위험한 코뿔소처럼 보이는 사제복을 입은 사제,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반 고흐의 생애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제작한 때가 아를에서 지내던 이 시기였다 그는 200점의 유화와 100점 이상의 소묘 및 수채화를 완성했다 빈센트는 현지의 시골 풍경과 빛으로부터 힘을 얻었으며, 이 시기의 작품들은 노란색, 울트라마린, 연보라 색조가 풍부하다 수확 장면, 밀밭, 그리고 그 지역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 대부분이며, 그중에는 1888년 10월 4일 폴 고갱, 에밀 베르나르, 찰스 라발 등과 작품을 교환하기 위해 퐁타방으로 보낸 7점의 캔버스 중 하나인 《오래된 방앗간》(1888)도 있다


1888년 3월, 반 고흐는 격자무늬의 "원근법 틀"을 사용하여 풍경화를 제작했으며, 그중 세 작품을 앙데팡당전 연례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4월에는 인근 퐁비에유에 살고 있던 미국 화가 닷지 맥나이트의 방문을 받았다

1888년 5월 1일, 반 고흐는 아를의 라마르틴 광장 2번지에 있는 방 4개를 임대하는 계약을 맺었으며, 이곳을 나중에 《노란 집》으로 그렸다 가구가 없는 이 방의 월세는 15프랑이었으며, 몇 달 동안 비어 있는 상태였다 반 고흐가 노란 집에 완전히 입주하기 전에 가구를 갖춰야 했기 때문에, 1888년 5월 7일 카렐 호텔에서 카페 드 라 가르(역전 카페)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노란 집의 주인인 조제프와 그의 처 마리 지누와 친구가 되었고, 그 집을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었다 반 고흐는 노란 집을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갤러리로 꾸미고자 했다 반 고흐는 《반 고흐의 의자》(1888), 《아를의 방》(1888), 《밤의 카페》(1888), 《밤의 카페 테라스》(1888년 9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 등을 그렸는데, 이 그림들은 모두 노란 집의 장식을 위한 것이었다


반 고흐는 《밤의 카페》에 대해 "카페는 사람이 자신을 망치거나, 미치거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장소라는 아이디어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라고 썼다 6월에 생트마리드라메르를 방문했을 때, 그는 주아브병 하사관인 폴 외젠 미리에에게 그림을 가르쳤으며 바다 위의 배들과 마을을 그렸다 맥나이트는 반 고흐에게 때때로 퐁비에유에 머물던 벨기에 화가 외젠 보흐를 소개해주었고, 두 사람은 7월에 서로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250px-De_zaaier_-_s0029V1962_-_Van_Gogh_Museum.jpg 《해질녘의 씨 뿌리는 사람》, c.1888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250px-Vissersboten_op_het_strand_van_Les_Saintes-Maries-de-la-Mer_-_s0028V1962_-_Van_Gogh_Museum.jpg 《생트마리 해변의 고기잡이 배》, c.1888년 6월.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250px-Vincent_van_Gogh_-_De_slaapkamer_-_Google_Art_Project.jpg 《아를의 방》, c.1888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250px-Vincent_van_Gogh_%281853-1890%29_-_The_Old_Mill_%281888%29.jpg 《오래된 방앗간》, 1888년경. 뉴욕주 버펄로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고갱의 방문 (1888)


250px-Paul_Gauguin_-_Vincent_van_Gogh_painting_sunflowers_-_Google_Art_Project.jpg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1888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고갱이 1888년 아를을 방문하기로 동의했을 때, 반 고흐는 그와 우정을 쌓고 자신의 예술가 공동체 구상을 실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반 고흐는 고갱의 도착을 준비하며 일주일 동안 네 가지 버전의 《해바라기》를 그렸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과 함께 우리만의 작업실에서 살기를 희망하며, 작업실을 위한 장식을 만들고 싶다 커다란 해바라기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말이다"라고 썼다


고흐가 다시 방문했을 때, 반 고흐는 그의 초상화와 습작인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시인》을 그렸다 고갱의 방문을 준비하면서 반 고흐는 역 우편 감독관인 조제프 룰랭의 조언에 따라 침대 두 개를 샀으며, 그의 초상화도 그렸다 9월 17일, 그는 아직 가구가 거의 없는 노란 집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고갱이 아를에서 그와 함께 살며 작업하기로 승낙하자, 반 고흐는 노란 집의 장식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시도한 가장 야심 찬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는 《반 고흐의 의자》와 《폴 고갱의 안락의자》를 완성했다


반 고흐의 간곡한 부탁 끝에 고갱은 10월 23일 아를에 도착했고, 11월에는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그렸다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화가》에서 반 고흐를 묘사했으며, 반 고흐는 고갱의 제안에 따라 기억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상상력에 의한" 그림 중에는 《에턴 정원의 추억》이 있다 그들의 첫 공동 야외 작업은 알리스캉에서 이루어졌으며, 여기서 펜던트의 작품인 《알리스캉》을 제작했다 고갱이 방문 기간 동안 완성한 유일한 초상화는 반 고흐를 그린 것이었다


반 고흐와 고갱은 1888년 12월 몽펠리에를 방문하여 파브르 미술관에서 귀스타브 쿠르베와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들을 감상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고갱을 존경했고 대등하게 대우받기를 원했지만, 고갱은 오만하고 지배적인 태도를 보여 반 고흐를 좌절시켰다 그들은 자주 다투었다 반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봐 점점 두려워했고, 반 고흐가 "극심한 긴장" 상태라고 묘사한 상황은 급격히 위기로 치달았다


250px-Le_caf%C3%A9_de_nuit_%28The_Night_Caf%C3%A9%29_by_Vincent_van_Gogh.jpeg 《밤의 카페》, 1888년. 예일 대학교 미술관,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250px-Vincent_Willem_van_Gogh_-_Cafe_Terrace_at_Night_%28Yorck%29.jpg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250px-Red_vineyards.jpg 《아를의 붉은 포도밭》, 1888년 11월.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 1890년 안나 보흐에게 판매됨
250px-Vincent_Willem_van_Gogh_138.jpg 《반 고흐의 의자》, 188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250px-Vincent_van_Gogh_-_De_stoel_van_Gauguin_-_Google_Art_Project.jpg 《폴 고갱의 안락의자》, 1888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아를의 병원 (1888년 12월)


250px-Le_Forum_R%C3%A9publicain_%28Arles%29_-_30_December_1888_-_Vincent_van_Gogh_ear_incident.jpg 반 고흐의 자해 사건을 기록한 1888년 12월 30일 자 현지 신문 기사
250px-Felix_Rey_portrait_%26_sketch.jpg 《펠릭스 레이 박사의 초상》, 1889년 1월, 푸시킨 미술관. 레이 박사가 소설가 어빙 스톤을 위해 반 고흐의 귀 손상 부위를 스케치하여 작성한 메모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된 정확한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갱은 15년 후, 그날 밤 신체적으로 위협적인 행동이 몇 차례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관계는 복잡했으며 테오가 고갱에게 돈을 빚지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고갱은 고흐 형제가 자신을 경제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빈센트가 고갱이 떠날 계획임을 눈치챘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 날에는 폭우가 쏟아져 두 남자는 노란 집에 갇혀 있게 되었다 고갱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산책하러 나간 뒤 반 고흐가 뒤따라와 "면도날을 손에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 진술은 입증되지 않았다 고갱은 그날 밤 노란 집에 없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며, 호텔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1888년 12월 23일 저녁, 고갱과의 말다툼 후, 반 고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환청을 들은 듯하며, 면도날로 왼쪽 귀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잘라내어 심한 출혈을 일으켰다 그는 상처를 붕대로 감고 잘린 귀를 종이에 싸서, 자신과 고갱이 자주 가던 사창가의 한 여성에게 전달했다 반 고흐는 다음 날 아침 경찰관에 의해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수련의였던 펠릭스 레이의 치료를 받았다 잘린 귀도 병원으로 가져왔지만, 레이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고 판단해 접합 수술을 시도하지 않았다 반 고흐 연구가이자 미술사학자인 베르나데트 머피는 가브리엘 베를라티에라는 여성의 실체를 밝혀냈다 그녀는 1952년 아를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녀의 후손들은 (2020년 기준) 여전히 아를 외곽에 살고 있다 어린 시절 "가비"라고 불린 가브리엘은 반 고흐가 그녀에게 귀를 건넸을 당시 그 사창가와 다른 현지 시설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17세 소녀였다


반 고흐는 그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이는 그가 급성 정신적 붕괴를 겪었음을 시사한다 병원 진단명은 "전신 섬망을 동반한 급성 조증"이었고, 며칠 후 현지 경찰은 그를 입원 치료시키라고 명령했다 고갱은 즉시 테오에게 알렸는데, 테오는 12월 24일 막 오랜 친구인 안드리스 봉허의 누이 요한나에게 청혼한 상태였다 그날 저녁 테오는 아를행 야간 열차를 탔다 그는 크리스마스 당일에 도착하여 반쯤 정신이 들어 보이는 빈센트를 위로했다 그날 저녁 그는 파리로 돌아갔다


치료 첫날 동안 반 고흐는 여러번 고갱을 찾았으나 만날 수 없었다 고갱은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관에게 "부탁입니다, 경관님, 이 남자를 아주 조심스럽게 깨워주시고, 만약 저를 찾는다면 제가 파리로 떠났다고 말해주십시오 저를 보는 것이 그에게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라고 요청했다 고갱은 아를을 떠났고 다시는 반 고흐를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890년 고갱은 앤트워프에 공동 작업실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병원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마리 지누와 룰랭도 있었다


비관적인 진단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는 회복되어 1889년 1월 7일 노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음 한 달 동안 환각과 독살에 대한 망상에 시달리며 병원과 집을 오갔다 3월에 지누 가족을 포함한 마을 주민 30명이 그를 "붉은 머리의 미치광이"라고 부르며 탄원서를 제출하자 경찰은 그의 집을 폐쇄했고, 반 고흐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폴 시냐크는 3월에 그를 두 번 방문했다 4월에 자신의 집이 홍수로 그림들이 손상되자 반 고흐는 레이 박사 소유의 방으로 이사했다 두 달 후, 그는 아를을 떠나 생레미드프로방스에 있는 요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했다 이 무렵 그는 "가끔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이기도하고, 때로는 시간의 베일과 상황의 숙명이 한 순간 찢어지는 듯한 순간이 온다"라고 썼다


반 고흐는 1889년에 그린 《펠릭스 레이 박사의 초상》을 레이에게 주었다 레이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닭장을 수리하는 데 썼고, 나중에는 남에게 줘 버렸다 이 초상화는 푸시킨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6년 기준으로 5,000만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250px-Van_Gogh_-_Selbstbildnis_mit_verbundenem_Ohr_und_Pfeife.jpeg 《귀에 붕대를 감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 1889년, 개인 소장
250px-Van_Gogh_-_Garten_des_Hospitals_in_Arles1.jpeg 《아를 병원의 안뜰》, 1889년, 스위스 빈터투어 오스카 라인하르트 컬렉션 "Am Römerholz"
250px-Vincent_van_Gogh_-_Self-portrait_with_bandaged_ear_%281889%2C_Courtauld_Institute%29.jpg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1889년, 런던 코톨드 미술관
250px-Ward_in_the_Hospital_in_Arles.jpg 《아를 병원의 병동》, 1889년, 스위스 빈터투어 오스카 라인하르트 컬렉션 "Am Römerholz"


생레미 (1889년 5월 – 1890년 5월)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6월. 뉴욕 뉴욕 근대미술관


반 고흐는 1889년 5월 8일 개신교 목사인 간병인 프레데리크 살과 함께 생폴드모졸 요양원에 입원했다 생레미에 위치한 생폴 요양원은 과거 수도원으로, 아를에서 30km 이내의 거리에 있으며, 전직 해군 의사인 테오필 페이롱이 운영하고 있었다 반 고흐는 창살이 있는 방 두 개를 썼는데, 그중 하나를 화실로 사용했다


이 요양원과 그 정원은 그의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그는 《요양원의 현관》과 《생레미》(1889년 9월) 같은 병원 내부 모습과 《라일락》(1889년 5월) 같은 정원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이 시기의 일부 작품은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표현이 특징이다 그는 감독 하에 짧은 산책을 허가받았고, 그동안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를 그렸다 여기에는 《위에서 본 농부와 골짜기》, 《알피유 산맥을 배경으로 한 올리브 나무 1889》, 《사이프러스》(1889),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1889), 《밤의 프로방스 시골길》(1890) 등이 포함된다 1889년 9월에는 《아를의 방》의 두 가지 새로운 버전과 《정원사》를 제작했다


요양원 바깥 출입이 금지되면서 반 고흐는 소재 부족을 겪었다 대신 장프랑수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과 《정오의 휴식》 등 다른 예술가들의 그림을 재해석하는 작업과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변주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반 고흐는 쥘 브르통, 귀스타브 쿠르베, 밀레의 사실주의를 존경했으며, 자신의 모작을 음악가가 베토벤을 해석하는 것에 비유했다


그의 《죄수들의 운동》(1890)은 귀스타브 도레(1832–1883)의 인그레이빙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트랄보는 그림 중앙에서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는 죄수의 얼굴이 반 고흐 자신이라고 주장하지만, 얀 훌스커는 이를 부정한다


1890년 2월에서 4월 사이, 반 고흐의 정신병이 심하게 재발하였다 우울증에 빠져 글조차 쓸 수 없었지만, 이 시기에도 약간의 그림과 소묘는 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테오에게 "기억에 의존해... 북쪽을 회상"하는 몇 점의 소형 그림을 그렸다고 썼다 그중 하나가 《해질녘 눈 덮인 들판에서 땅을 파는 두 농부 여인》이다 훌스커는 이 그림들이 이 시기에 반 고흐가 작업한 풍경과 인물을 묘사한 많은 소묘와 습작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 짧은 시기가 반 고흐의 병이 그의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유일한 시기였다고 언급하였다


반 고흐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옛 스케치를 바탕으로 새로운 그림 작업을 할 수 있도록 1880년대 초에 그렸던 소묘와 거친 스케치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시기에 속하는 《영원의 문 (슬픔에 잠긴 노인)》은 훌스커가 "오래전 과거에 대한 또 다른 분명한 기억"이라고 묘사한 색채 습작이다 미술 평론가 로버트 휴즈에 따르면, 그의 후기 작품들은 "간결함과 우아함을 갈망하는" 화가로서의 기량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조카가 태어난 후 반 고흐는 "나는 곧바로 조카의 침실에 걸어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흰 《아몬드 꽃 가지》다"라고 썼다


250px-Vincent_Willem_van_Gogh_037.jpg 《교도소 안뜰》(귀스타브 도로 모작), 1890년.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
250px-Sower_at_Sunset_-_Vincent_Van_Gogh.jpg 《씨 뿌리는 사람》 (장프랑수아 밀레 모작), 1888년.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250px-Van_Gogh_-_Zwei_grabende_B%C3%A4uerinnen_auf_schneebedecktem_Feld.jpeg 《해질녘 눈 덮인 들판에서 땅을 파는 두 농부 여인》 (장프랑수아 밀레 모작), 1890년. 스위스 취리히 E.G. 뷔를레 재단 컬렉션
250px-Van_Gogh_-_Trauernder_alter_Mann.jpeg 《영원의 문》(슬픔에 잠긴 노인), 1890년.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1890년 전시와 인정


알베르 오리에는 1890년 1월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을 찬양하며 그를 "천재"라고 묘사했다 2월에 반 고흐는 1888년 11월 지누 부인이 두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했을 때 고갱이 그렸던 목탄 스케치를 바탕으로 《아를의 여인》(지누 부인)의 다섯 가지 버전을 그렸다 또한 2월에 반 고흐는 브뤼셀의 아방가르드 화가 단체인 Les XX(레 뱅, 20인회)로부터 연례 전시에 참여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개막 만찬에서 Les XX의 회원인 앙리 드 그루가 반 고흐의 작품을 모욕했다 로트레크는 사과를 요구했고, 시냐크는 로트레크가 진다면 자신이 계속해서 반 고흐의 명예를 위해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드 그루는 무례함에 대해 사과하고 단체를 떠났다


1890년 3월 20일부터 4월 27일까지 반 고흐는 샹젤리제 거리의 파리 시관에서 열린 제6회 앙데팡당전에 참여했다 반 고흐는 10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파리에서 앙데팡당전이 열리는 동안 클로드 모네는 반 고흐의 작품이 전시회에서 최고라고 말했다


오베르쉬르우아즈 (1890년 5월–7월)


《오베르의 레 베스노》, 1890.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화가가 사망하기 몇 주 전에 그려졌다 1890년 5월, 반 고흐는 생레미의 병원을 떠나 파리 교외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폴 가셰 박사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거처를 옮겼다 가셰는 아마추어 화가였으며 여러 다른 예술가들을 치료한 적이 있었는데, 카미유 피사로가 그를 추천했다 가셰에 대한 반 고흐의 첫인상은 "나보다 더 아프거나, 혹은 나만큼이나 아파 보였다"는 것이었다


화가 샤를프랑수아 도비니는 1861년에 오베르로 이주했으며, 뒤이어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와 오노레 도미에를 포함한 다른 예술가들도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1890년 7월, 반 고흐는 두 점의 《도비니의 정원》 그림을 완성했는데, 그중 하나가 그의 마지막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250px-Vincent_van_Gogh_-_The_Church_in_Auvers-sur-Oise%2C_View_from_the_Chevet_-_Google_Art_Project.jpg 《오베르의 교회》, 1890. 파리 오르세 미술관


생레미에서의 마지막 몇 주 동안 그의 생각은 "북부 지방의 추억"으로 돌아갔다 그는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보낸 약 70일 동안 약 70점의 유화를 남겼는데, 그중 몇몇은 북부 지방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1890년 6월, 그는 자신의 주치의였던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몇점 그렸는데, 여기에는 가셰 박사의 초상과 그의 유일한 에칭 작품도 포함된다 각각의 초상화에서는 가셰의 우울한 기질이 강조되어 표현된다 기타 《언덕 옆의 초가집》을 포함하여 미완성으로 추정되는 여러 그림들이 있다


7월에 반 고흐는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섬세한 노란색의 언덕을 배경으로 한 거대한 평원"에 몰입하게 되었다고 썼다 그는 밀이 아직 푸르고 어렸던 5월에 처음으로 그 들판에 매료되었다 7월에 그는 테오에게 "요동치는 하늘 아래 광활한 밀밭"에 대해 묘사했다


그는 그것들이 자신의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나타내며, "이 그림들이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전원생활이 얼마나 건강하고 활력을 주는지를 알려줄 것"이라고 썼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반 고흐의 마지막 유화 작품은 아니지만 1890년 7월의 작품이며, 훌스커는 이를 "우울함과 극도의 외로움"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훌스커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 완성 이후에 그려진 오베르 시절의 유화 일곱 점을 확인했다 훌스커는 또한 이 시기 반 고흐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그림이 너무 많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했다


사망


250px-Vincent-van-gogh-echo-pontoisien-august7-1890.jpg 1890년 8월 7일자 레코 퐁투아지앵(L'Écho Pontoisien)에 실린 반 고흐의 사망 기사


1890년 7월 27일(일요일), 37세의 반 고흐는 리볼버로 자신의 가슴을 쐈다 총격은 그가 그림을 그리던 밀밭이나 현지의 어느 헛간에서 일어났을 수 있다 총알은 갈비뼈에 맞아 굴절되어 가슴을 관통했지만, 장기에 뚜렷한 손상을 입히지 않고 아마도 척추에 걸려 멈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걸어서 라부 여관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두 명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그중 한 명인 가셰 박사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복무하여 총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빈센트는 아마도 밤 동안 가셰 박사의 아들 폴 루이 가셰와 여관 주인 아르튀르 라부의 간호를 받았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테오가 형의 곁으로 달려왔을 때 빈센트는 기운이 좋아 보였으나, 몇 시간 뒤 상처로 인한 감염이 악화되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7월 29일 화요일 이른 새벽에 사망했다 테오에 따르면 빈센트의 마지막 말은 "슬픔은 영원할 것이다"였다


250px-Graves_of_Vincent_and_Th%C3%A9odore_Van_Gogh.jpg 오베르쉬르우아즈 묘지에 있는 빈센트와 테오의 묘


반 고흐는 7월 30일 오베르쉬르우아즈 시립 묘지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테오 반 고흐, 안드리스 봉허, 샤를 라발, 루시앙 피사로, 에밀 베르나르, 줄리앙 탕기, 폴 가셰를 포함하여 가족, 친구, 지역 주민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테오는 매독을 앓고 있었고, 형의 죽음 이후 건강이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형을 잃은 슬픔에 잠긴 테오는 빈센트 사후 불과 6개월 만인 1891년 1월 25일 덴 돌더에서 사망하여 위트레흐트에 묻혔다 1914년, 요한나 반 고흐-봉허는 테오의 시신을 파묘하여 위트레흐트에서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빈센트 묘지 옆으로 이장했다


반 고흐의 질병의 성격과 그것이 그의 작품에 미친 영향에 대해 수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많은 사후 진단이 제안되었다 일반적인 합의는 반 고흐가 중간 중간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간헐적으로 정신병 증상이 나타나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페리는 1947년에 처음으로 양극성 장애를 제안했는데, 정신과 의사 헴필과 블루머도 이를 지지했다 생화학자 윌프레드 아널드는 양극성 장애와 창의성이 관련 있다는 대중적인 믿음이 거짓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증상이 급성 간헐성 포르피린증과 더 일치한다고 반박했다 우울증 발작을 동반한 측두엽 뇌전증 또한 제안되었다 진단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상태는 영양실조, 과로, 불면증, 알코올로 인해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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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나무 (반 고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빈센트 반 고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올리브-나무-숲에서-빈센트-반-고흐를-만났다-_-배진성-001.png



23. 산상(山上)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江) 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山) 위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벌여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太陽)이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벵이 걸음을 하던 기차(汽車)가

정거장(停車場)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吐)하고

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 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다.


_ (1936.5. 윤동주 20세)


23. 산상(山上) (시)

1집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2집 (창) *1에서 2로 옮겨 씀.

정음사 출판사

중판 1955년, 삼판 1976년



https://youtu.be/QxjXO42vkiE?si=Id66Wb1qnqKpX01e

https://youtu.be/QxjXO42vkiE?si=4K1bULKPcUIlETKA


윤동주 시인은 죽은 다음에 비로소 태어난 시인이다. 윤동주 시인은 사후에 친구들과 지인들과 가족들에 의하여 시인으로 부활한 시인이다. 좋은 시인은 시만 잘 쓴다고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 좋은 시인은 시를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잘 살아야만 한다. 시인의 바른 길을 찾아서 올바르게 잘 살아야만 한다.


산을 일종의 해탈을 상징한다. 산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일체의 번뇌에서 해탈하고픈 내면 충동을 의미한다. 산은 그만큼 높은 곳에 존재한다. 화자와 산 사이에는 쾌 먼 거리가 놓여 있다. 초월과 달관을 위한 몸부림이 있다. 심리적으로 추구해 들어가는 보다 높은 곳, 고통의 세계 건너편에는 해탈의 피안이 있다. 발은 비록 현실을 딛고 섰을지라도 머리는 늘 이상을 꿈꾼다. 생활은 늘 이율배반을 반복한다. 그 시대를 휩쓴 정신적인 기갈이 지향하는 곳은 마치 노아의 방주와 같은 구원의 산상이었을 법하다. 화자인 나의 쌓인 욕구불만과 좌절이 안개처럼 깔려있다. 하늘은 고작 텐트 같은 하늘이고 그 하늘마저 무너질까 저어하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발돋움하되, 좀 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1936년 5월 작품으로 광명학원 중학부로 편입한 후 쓴 작품이다. 산 위에서 바라본 도시 풍경을 평온히 묘사한 작품이다.


윤동주 시인은 1936년 4월 6일 자로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고려했을 때, 이 작품은 광명학원으로 편입한 후에 창작한 최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시인의 비슷한 시기인 1936년 5월에 쓴 다른 작품으로 <오후의 구장>이라는 시가 있다.


'함석'은 표면에 아연을 도금한 얇은 철판으로 지붕, 양동이, 대야 등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다.

'내'는 냄새를 뜻한다.

'걸음발을 탄다'라는 말은 보통 아이가 걸음을 익혀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하는 모양을 말한다.


* 원문표기

- '새끼처럼' -> '색기처럼'

- '산 위에까지 왔다' -> '山읗에 까지 왓다'

- '벌여' -> '별여'

- '지붕에만' -> '집웅에만'

- '비치고' -> '빛이고'

- '굼벵이' -> '굼벙이'

- '걸음을 하던' -> '거르을 하든'

- '섰다가' -> '섯다가'

- '걸음발을' -> '거름발을'

- '무너져' -> '문허저'


한 시인의 시적 세계는 유년시절의 경험과 청소년 시절의 경험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 윤동주 시인의 인격 형성과 시적 세계의 구축은 만주와 디아스포라와 명동 마을과 김약연의 독립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고토회복과 이상촌 건설과 인재교육을 위하여 만주로 건너갔던 선각자들의 후손, 민족운동과 기독교 민족교육의 본거지가 되어가는 명동촌, 이토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중근이 천주고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부당한 뒤 김약연의 도움으로 몰래 권총으로 사격 연습을 한 곳도 명동촌의 뒷산이었다고 한다. 조연현 선생님의 <해방의 등불 된 '간도의 대통령'>이란 글에서도 잘 증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장로가 된 김약연 선생님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일찍부터 시작된다. 특히 <무오독립선언서>에서 밝혔듯이 일제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육탄혈전'으로 독립 '전쟁'을 해서 무력으로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는 더욱 적극적인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에 일제의 입장에서는 무장투쟁의 본거지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북간도 민족운동의 근거지로 자리 잡았던 명동학교를 불태우고, 무장투쟁을 주장해 온 교장 김약연을 체포한다. 김약연은 1920년 쉰둘의 나이에 체포되어 2년 동안 옥살이를 한다. 1923년 출옥해 폐허에 임시 건물로 지어진 명동학교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흉년으로 운영난에 시달린다. 1925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통합하여 명동중학교는 문을 닫는다. 윤동주 시인은 1925년 4월 그대로 유지되었던 명동소학교에 입학한다.


1929년 예순한 살의 나이로 김약연은 평양신학교에 다니며 목사 안수를 받는다. 목사이면서도 사회주의자 이동휘와 손을 잡았으며 서일 등 대종교 지도자들과도 협력했다. 중국인들이 그를 '간도의 한인 대통령'이라고 부를 만치 포용력 있는 지도자였다. 1930년 예순둘의 김약연은 명동교회 목사로 돌아온다. 당시 열세 살이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때부터 규암 김약연에게 <맹자>와 <성경> 등을 배우고 1931년 3월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한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규암 김약연은 은진중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친다. 그리고 1938년 2월에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고의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규암은 이미 존경받는 목사이며 민족지도자였지만 말이 아니라 삶 자체로 모범을 보였다. 교장이면서도 천 평쯤 되는 밭농사를 직접 지었고 거름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가을에는 농군들과 함께 밤새워 타작을 하는 등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마치 공자가 제자들에게 도를 행하는 것과 흡사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1942년 10월 29일 용정시 자택에서 돌아가셨는데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일흔넷의 일기로 별세하셨다.




올리브 나무 Olive Trees



빈센트 반 고흐는 1889년 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주로 《올리브 나무》(Olive Trees)를 주제로 최소 15점의 그림을 그렸다. 1889년 5월부터 1890년 5월까지 자신의 요청으로 요양원에서 생활하며 요양원 정원을 그렸고, 외부로 나갈 수 있는 허가를 받자 인근의 올리브 나무, 사이프러스나무 및 밀밭 등을 그렸다.


반 고흐는 올리브 나무에 매료되었다. 올리브 나무의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색상과 불규칙한 형태는 그에게 새로운 기법과 접근 방식을 실험하도록 자극했다. 그는 여러 시간대 별로 그림을 그렸고 계절에서 영감을 받은 색상을 사용했다. 그의 그림 중 하나인 《산악 풍경 속 올리브 나무》는 《별이 빛나는 밤》을 보완하는 작품이었다.


올리브 나무 그림은 반 고흐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1889년 5월에 그린 올리브 나무 연작은 생명, 신성, 삶의 순환을 상징했고, 1889년 11월의 연작들은 겟세마네에서 고뇌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상징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올리브를 따는 사람들》을 그린 그의 그림들은 삶의 순환 중 하나인 수확 또는 죽음을 묘사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여준다. 또한 이 그림들은 인간이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어떻게 신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반 고흐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휴식과 안정을 찾았다. 1889년 올리브 나무 연작이 제작될 당시 그는 질병과 정서적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이 그림들은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반 고흐 자신도 이 작품들을 높이 평가했다.


생레미


250px-View_of_the_Asylum_and_Chapel_at_Saint_Remy.jpg 《생레미 요양원과 예배당 풍경》, 1889년이전 엘리자베스 테일러 소장품 (F803)


1889년 5월, 반 고흐는 생레미 근처에 있는 생 폴 요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했다 그곳에서 그는 인접한 방을 자신의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 요양원 내에만 머물러야 했던 그는, 방에서 보이는 세상, 즉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나무들, 라일락, 정원의 붓꽃들을 (창문 창살 없이) 그렸다 요양원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자 그는 주변 시골의 밀밭, 올리브 밭, 사이프러스 나무들을 그렸는데, 그는 이러한 풍경을 "프로방스 특유의" 풍경이라고 여겼다 일 년 동안 그는 약 150점의 캔버스 그림을 그렸다


요양원 생활의 규율은 반 고흐에게 안정을 주었다 "저는 밖에서보다 여기서 제 작업과 함께 더 행복함을 느낍니다 여기서 오랫동안 머물면 규칙적인 습관을 배우게 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제 삶에 더 많은 질서를 가져올 것입니다." 생레미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커피, 술, 좋지 않은 식습관, 그리고 주기적으로 테레빈유와 물감을 섭취하려는 시도와 같은 나쁜 습관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그의 체류가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었다 요양원 밖으로 나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음식은 좋지 않았고, 그는 일반적으로 빵과 수프만 먹었다 그가 받은 유일한 치료는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씩 목욕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지낸 1년 동안 반 고흐는 주기적인 발작을 겪었는데, 이는 간질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1890년 초 발작이 심해지자 그는 요양원 생활이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1890년 5월 파리 북쪽의 오베르쉬르우아즈로 이사했다


올리브 나무를 주제로


시골, 주변 들판, 사이프러스 나무, 올리브 나무를 그림으로써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자연과의 연결을 회복했다 그는 1889년에 남프랑스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유서깊고 뒤틀린 올리브 나무"를 주제로 최소 15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반 고흐는 이 연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250px-Oliviers_%C3%A0_Quinson.JPG 프랑스 프로방스의 올리브 나무들


햇빛과 하늘의 영향으로 올리브 나무에서 무궁무진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하늘의 색조에 따라 변하는 잎사귀의 대비되는 모습을 찾는다 때로는 나무가 창백한 꽃을 피우고 큰 푸른 파리, 에메랄드빛 과일 딱정벌레, 수많은 매미들이 날아다닐 때, 모든 것이 순수한 푸른색에 잠긴다 그러다 청동색 잎사귀가 더 성숙한 색조를 띠면, 하늘은 녹색과 주황색으로 빛나고 물든다 다시 가을이 깊어지면 잎사귀는 잘 익은 무화과 같은 보라색 색조를 띠는데, 이 보라색 효과는 연한 레몬빛 후광 속에서 크고 하얗게 빛나는 태양과의 대비를 통해 가장 완벽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소나기가 내린 후 온 하늘이 분홍색과 주황색으로 물들어, 은회색 녹색에 아름다운 색감을 더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 사이에, 또한 분홍색 옷을 입고 과일을 수확하는 여인들이 있었다


반 고흐는 프로방스를 대표하는 올리브 나무가 "까다로우면서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올리브 나무를 포착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오래된 은백색 나무들이, 때로는 푸른색이 더 강해지고, 때로는 녹색을 띠거나, 청동색을 띠거나, 노란색, 분홍색, 보라색이 감도는 주황색 흙 위에서 창백하게 바래기도 하는데... 매우 어렵다"고 썼다 그는 "올리브 숲의 속삭임은 매우 비밀스럽고 엄청나게 오래된 무언가를 담고 있다 너무 아름다워 우리가 감히 그릴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정신적 의미


250px-Paul_Gauguin_-_Christ_and_the_Garden_of_Olives.jpg 폴 고갱,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 1889년, 노턴 미술관, 웨스트팜비치.


그리스도/고갱의 자화상에서 붉은 머리색이 "초자연적으로 붉다"고 묘사되며, 이는 반 고흐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젊은 시절 반 고흐는 노동자들을 섬기기 위해 성직자가 되고자 했다 그는 한동안 네덜란드에서 신학을 공부했지만, 지나친 열정과 자발적인 금욕주의로 인해 평신도 사역을 금지 당했다 그는 다소 비관적이 되어 기성 교회 조직을 거부했지만, 그에게 위안과 중요성을 주는 개인적인 영성을 발견했다 1879년에 그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 그림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반 고흐는 말년 29개월 동안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였던 자연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질병과 정서적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 시기 이전에는 그는 부모의 종교가 편협하다고 생각하여 거부했고, 종교와 신에 대해 니체와 다를 바 없는 허무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반 고흐는 꽃 피는 나무들, 올리브 과수원과 들판에서 가장 "심오한 의미"를 발견했는데, 이는 자연의 순환에서 인간 삶의 비유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테오에게 죽음, 행복, 불행은 "필수적이고 유용하며" 상대적이라고 선언하며, "나를 무너뜨리고 두렵게 하는 질병에 직면해서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썼다 반 고흐는 또한 올리브 나무가 그리스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 즉 올리브산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고뇌 등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가을에 그린 연작은 친구들인 폴 고갱과 에밀 베르나르의 《올리브 동산의 그리스도》라는 최근 작품들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반고흐는 그들의 작품에서 "아무것도 관찰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실망한 반 고흐는 "맑고 추운 날, 아침저녁으로 숲 속에서, 그러나 아름답고 밝은 햇살 아래" 그림을 그렸고, 그 결과 그해 초에 완성한 세 점 외에 다섯 점의 캔버스 그림을 더 그렸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내가 한 작업은 그들의 추상화에 비하면 다소 거칠고 투박한 현실이지만, 소박한 느낌이 들고 흙냄새가 날거야" 그는 그 장면이 어땠을지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실제 겟세마네를 언급하지 않고도 고뇌를 표현할 수 있으며... 온화하고 위안을 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산상수훈의 인물들을 묘사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나는 올리브 동산의 그리스도를 그리지 않는 대신, 오늘날 볼 수 있는 올리브 수확을 그릴 것이고, 인간 형상을 적절한 위치에 두면 아마도 예수님을 상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분석

예술적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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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쇠라,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1884년, 내셔널 갤러리, 런던, 물과 잔디의 세부 묘사. 반 고흐는 쇠라의 끊어진 색선을 사용하여 그림에 빛과 형태를 부여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반 고흐의 초기 작품들은 칙칙하고 회색 톤으로 그려졌다 그는 파리에서 에드가 드가, 조르주 쇠라 등 저명한 프랑스 예술가를 만났는데, 이들로부터 새로운 색상과 기법을 영향 받았다. 그의 작품은 이전에는 침울하고 어두웠지만, 이제는 "색채로 불타올랐다" 실제로 반 고흐의 색채 사용은 너무나 극적이어서 때로는 그가 표현주의자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준 것은 남프랑스였다 햇살 가득한 시골의 영향으로 깨달음을 얻은 반 고흐는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이 "색채를 약속한다"고 주장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걸작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낮과 계절에 따라 극적으로 변하는 나무들의 색깔과 분위기를 포착했다 그는 신성을 나타내기 위해 파란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별이 빛나는 밤》과 《올리브 나무》 그림에서, 반 고흐는 하늘의 강렬한 파란색을 예수의 "신성하고 무한한 존재"를 상징하는 데 사용했다 신성을 나타내기 위한 "현대적인 예술 언어"를 찾던 그는, 예수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를 "빛나는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등 많은 올리브 나무 그림에서 신비로운 특성을 추구했다


반 고흐는 인상주의의 '깨진 색채' 개념을 사용하여 작품에 빛을 주었고, 색채를 혁신적으로 사용하여 그림에 빛과 형태를 부여했다 이는 그가 밭, 산, 바위, 인물들을 그린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연작에서는 그가 익숙했던 임파스토 기법 대신 더욱 세련된 접근 방식으로 통일성을 이루었다 그는 자신의 올리브 나무 그림들이 남프랑스에서 보낸 1년 동안 그린 작품들 중 최고라고 생각했다


의미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는 이 연작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올리브 나무에서 — 그 고대의 뒤틀린 형태가 지닌 표현력에서 — 반 고흐는 모든 자연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 영적인 힘의 발현을 발견했다 그의 붓놀림은 지중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땅과 심지어 하늘까지도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다 이 강렬한 개별적인 획들은 그림이라기보다는 잔뜩 물감을 머금은 붓으로 캔버스에 그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끊임없는 리듬이 지닌 에너지는 우리에게 거의 물리적인 방식으로, 반 고흐가 나무 자체에서 발견한 생명력, 즉 그들을 형성했다고 믿는 바로 그 영적인 힘을 전달한다


《신성한 상품 : 소비자 기독교를 넘어서는 신앙 발견하기》의 저자인 스카이 제타니는 반 고흐의 많은 그림, 특히 《올리브 나무》 연작에서 슬픔의 구원적 특성과 슬픔 속에서도 기쁨이 있을 수 있음을 전달한다고 주장한다 1876년 반 고흐의 설교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슬픔은 기쁨보다 낫다... 얼굴에 슬픔이 스며들면 마음은 더 밝아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은 슬프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배우고 있는 이들에게는 항상 기뻐할 이유가 있다 '슬픔에 잠겨 있으나 또한 기뻐하는 자로다'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좋은 것이다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은 올리브 나무가 반 고흐에게 지녔던 더 깊은 종교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난 여름 [반 고흐]는 올리브산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종교적 주제를 그리려다 포기했다 그는 상상으로 작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이제 자연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올리브 나무 숲 그림에서 그는 자연스럽고 강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종교적 연관성을 담을 수 있는 주제를 발견했다 올리브 나무들 같은 그림의 과장된 붓놀림과 생생한 색채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열정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영원한 것을 전달하는 자연의 근본적인 힘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림


반 고흐는 자신의 편지에서 올리브 연작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1889년 6월에 그린 세 점의 그림과 1889년 11월 말까지 완성된 다섯 점의 그림이다 그 밖에 9월에 그린 한 점, 12월에는 《올리브를 따는 여인들》을 그린 세 점 등이 있었다 반 고흐는 안전상의 이유로 물감에 접근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올리브 나무 스케치를 여러 장 그렸다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보완


뉴욕 근대미술관 (MoMA) 소장품인 《산악 풍경 속 올리브 나무》에 대해 빈센트는 동생 테오에게 "올리브 나무가 있는 풍경과 새로운 별이 빛나는 하늘 스케치를 그렸다"고 쓰면서, 이 그림을 밤 풍경인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낮 풍경 보완작이라고 불렀다 그의 의도는 "일부 화가들의 사진 같고 어리석은 완벽함"을 넘어 색채와 선의 리듬에서 비롯되는 강렬함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림 속에는 뒤틀린 녹색 올리브 나무들이 알프스산맥의 산기슭 앞에 서 있고, 하늘 아래에는 "유령 같은" 구름이 떠 있다 나중에 그림이 마른 후, 그는 두 그림을 파리의 테오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흰 구름과 뒤편의 산이 있는 올리브 나무, 그리고 달의 떠오름과 밤의 효과는 전체적인 구도의 관점에서 보면 과장된 것이지만, 윤곽선은 일부 오래된 목판화처럼 강조되어 있다"


《별이 빛나는 밤》을 보완하기 위해 그린 올리브 나무 그림


250px-Van_Gogh_The_Olive_Trees..jpg 《산악 풍경 속 올리브 나무》1889년 6월72.6 x 91.4 cm뉴욕 근대미술관, 뉴욕 (F712)


250px-Van_Gogh_-_Starry_Night_-_Google_Art_Project.jpg 《별이 빛나는 밤》1889년73.7 x 92.1뉴욕 근대미술관, 뉴욕 (F612)


올리브를 따는 사람들


반 고흐는 《올리브를 따는 여인들》을 세 가지 버전으로 그렸다 첫 번째 그림(F654)은 그가 "자연에서 더 깊은 색조로" 그린 현장 습작이라고 묘사했다 두 번째 그림(F655)은 "세 그림 중 가장 완성도 높고 양식화된" 작품으로, 그의 누나와 어머니를 위해 그렸으며,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 번째 그림은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체스터 데일 소장품(F656)으로, 그는 12월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매우 절제된 색채 구성"으로 그렸다 그림의 주제가 즉시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나무는 디딤돌처럼 관람자를 장면 속으로 이끈다 여기에서 반 고흐는 문자적인 해석보다 감정적, 정신적인 현실에 더 집중했다 여인들은 생계를 위해 올리브를 수확한다 나무들이 여인들을 감싸는 듯한 모습과 나무, 풍경이 거의 하나가 되는 모습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정서적 유대와 상호 의존성을 나타낸다


또 다른 그림은 올리브를 따는 부부를 묘사했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의 《올리브를 따는 부부가 있는 올리브 과수원》 (F587)은 1889년 12월에 그려졌다


올리브를 따는 여인들 시리즈


250px-Van_Gogh_-_Olivenpfl%C3%BCcker2.jpeg 《올리브 따기》1889년 12월73 x 92 cm아테네 굴란드리스 현대미술관 (F654)
250px-Van_Gogh_-_Olivenpfl%C3%BCcker1.jpg 《올리브를 따는 여인들》1889년 12월72.4 x 89.9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F655)
250px-Van_Gogh_-_Olivenpfl%C3%BCcker.jpeg 《올리브 과수원》1889년 12월73 x 92 cm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워싱턴 D.C. (F656)
250px-Van_Gogh_-_Oilvenhain_mit_pfl%C3%BCckenden_Figuren.jpeg 《올리브를 따는 부부가 있는 올리브 과수원》1889년 12월크뢸러 뮐러 미술관, 네덜란드 오텔로 (F587)


1889년 5월과 6월에 그린 그림


반 고흐는 1889년 5월과 6월에 네 점의 그림을 그렸다. 첫 번째 작품인 《초승달이 뜬 산악 풍경 속 올리브 나무 사이를 걷는 연인》 (F704)은 브라질 상파울루의 상파울루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250px-Van_Gogh_-_Passeio_ao_Crep%C3%BAsculo.jpg 산악 풍경 속 초승달 아래 올리브 나무 사이를 걷는 부부1890년 5월49.5 x 45.5상파울루 미술관, 브라질 상파울루 (F704)


반 고흐가 요양원에 머문 두 번째 달인 6월에 세 점의 《올리브 나무》를 그렸음이 확인된다


넬슨-앳킨스 미술관의 《올리브 과수원》 (F715)은 반 고흐가 1889년 7월 편지에서 회색 잎사귀를 가진 올리브 과수원으로 묘사했으며, "햇볕 쨍한 모래 위에 드리운 보라색 그림자"를 언급했다 대조적으로, 그림자들은 프로방스의 뜨거운 태양을 강조한다 "반복적이고 직사각형적인 붓놀림"은 이 작품의 감정적 영향을 고조시키는 에너지를 전달한다 2017년 11월, 이 그림 속에서 죽은 메뚜기의 잔해가 발견되었는데,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이미 죽은 상태로 그림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반 고흐 미술관의 《올리브 나무들 : 밝은 푸른 하늘》 (F709)은 시원한 푸른 낮 색조를 띠며, 따뜻한 가을 색조의 연구인 예테보리 미술관의 《올리브 숲》과 유사하다 가을 색조의 그림은 반 고흐가 자신의 작품에 "거칠고 투박한" 사실주의를 달성하려는 목표를 충족시켰다 그는 이 그림을 친구이자 의사인 가셰 박사에게 선물했는데, 가셰 박사는 다음 해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를 보살피고 감독하였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의 《올리브 과수원》 (F585)은 1889년 6월에 그려졌다


올리브 나무들 (1889년 6월)


250px-Van_Gogh_-_Olvivenhain.jpeg 《올리브 과수원》1889년 6월73 x 92 cm넬슨-앳킨스 미술관, 캔자스시티 (F715)


250px-Van_Gogh_-_Olivenhain_mit_blauem_Himmel.jpeg 《올리브 나무들: 밝은 푸른 하늘》1889년 6월45.5 x 59.5 cm반 고흐 미술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F709)


250px-Vincent_Willem_van_Gogh_079.jpg 《올리브 과수원》1889년 6월 중순72 x 92 cm크뢸러 뮐러 미술관, 네덜란드 오텔로 (F585)


1889년 9월, 11월, 12월에 그린 그림


이 기간 동안 제작된 그림들은 "정신적 의미" 섹션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고갱과 베르나르의 겟세마네 그림에 대한 반 고흐의 반응이 예술적으로 나타난 결과물이다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의 《올리브 나무들》 (F714)에 담긴 강렬한 성격은 반 고흐가 이 작품을 완성할 당시의 격앙된 정신 상태를 잘 드러내며, 그의 붓놀림과 색채 사용 모두에서 극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푸른색-녹색과 시원한 색조를 특징으로 하는 6월의 올리브 나무 그림들과 대조적으로, 《노란 하늘과 태양이 있는 올리브 나무들》 (F710)의 생생한 주황색과 노란색은 가을 계절을 연상시킨다 소설가 워렌 키스 라이트는 15년 동안 미니애폴리스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방문하며 그림에 매료되었지만 그 이유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이 매혹이 그림이 두 시기를 나타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은 오후의 태양은 산 위에 정서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그림자는 왼쪽, 즉 가을에 그림자가 드리워질 남서쪽에서 비스듬히 드리워진다 이 그림은 시간과 계절 모두와 어긋난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고, 자신의 과거로 되돌아간다"


올리브 나무들 (1889년 9월, 11월, 12월)


250px-Van_Gogh_-_Olivenb%C3%A4ume.jpeg 《올리브 나무들》1889년 9월개인 소장품 (F711)
250px-Olive_Trees_%28Van_Gogh%29.jpg 《올리브 나무들》1889년 11월51 x 65.2 cm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에든버러, 암스테르담 순회 전시 중 (F714)
250px-Vincent_van_Gogh_Olive_Trees_MIA_517.jpg 《노란 하늘과 태양이 있는 올리브 나무들》1889년 11월73.6 x 92.7 cm미니애폴리스 미술관, 미니애폴리스 (F710)


1889년 11월 또는 12월, 반 고흐는 MoMA의 《올리브 과수원》 (F708)을 작업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그림은 예테보리 스웨덴의 예테보리 미술관에 소장된 《올리브 숲 : 주황색 하늘》 (F586)이다


250px-Van_Gogh_-_Olivenhain2.jpeg 《올리브 과수원》1889년 11월72.7 x 92.1 cm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F708)
250px-Van_Gogh_-_Olivenhain3.jpg 《올리브 숲》1889년 11월–12월73 x 92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F707)
250px-Vincent_van_Gogh_-_Champs_pr%C3%A8s_des_Alpilles_%28F663%29.jpg 《올리브 나무와 멀리 산이 보이는 풍경》1889년 12월45 x 55 cm개인 소장품 (F663)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목록

[그림이야기] 올리브나무 -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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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치듯 일렁이는 선들이 화면 전체를 감싸며 살아 있는 듯한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 푸른색과 초록색이 뒤섞인 나무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자연의 숨결이 느껴지는 존재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늘, 산, 나무, 땅이 각각의 형태를 지니면서도 서로의 경계를 녹이며 하나로 이어집니다 두껍게 올린 물감의 질감은 자연의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전해 줍니다 하늘의 소용돌이치는 구름과 산의 율동적인 곡선, 비틀린 올리브나무의 줄기가 마치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 보입니다 작가는 자연을 단순히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감정과 생명력을 함께 그려냈습니다 색채는 현실의 재현을 넘어 감정의 언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짙은 남색과 초록은 고요함 속의 격정을, 노란빛은 희미한 희망과 따스함을 상징합니다 그 안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동시에 인간 내면의 불안과 열망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은 자연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숨 쉬며 느낀 마음의 풍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붓끝에서 자연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닌, 존재 그 자체의 노래로 피어오릅니다



960px-Van_Gogh_-_Weißes_Bauernhaus_zwischen_Olivenbäumen.jpeg 《올리브 나무 사이의 흰색 오두막》1889년 12월 70 x 60 개인 소장품 (F664)
1280px-Van_Gogh_The_Olive_Trees..jpg 《산악 풍경 속 올리브 나무》1889년 6월 72.6 x 91.4 cm 뉴욕 근대미술관, 뉴욕 (F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