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도공화국 꿈삶글 0048
그리고 약간 위쪽을 바라본 나는/철학자의 가족에 들어갈 수 있는/사람들의 스승을 알아보았다//모두 그를 우러러보고 영광을 돌렸는데,/그들 중에서 누구보다 가까이 있는/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나는 보았다//세상을 우연의 산물로 본 데모크리토스,/디오게네스, 아낙사고라스, 탈레스,/엠페도클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제논,//그리고 위대한 약초 수집가였던/디오스코리데스, 또한 오르페우스,/키케로, 리노스, 도덕가 세네카,//기하학자 에우클리데스, 프톨레마이오스,/히포크라테스, 아비켄나, 갈레노스,/위대한 주석가 아베로에스를 보았다//그들 모두를 충분하게 묘사할 수 없는데,/기나긴 주제가 나를 뒤쫓고, 또한 때로는/이야기가 사실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여섯 시인의 무리는 두 명으로 줄었고,/현명한 안내자는 다른 길을 통하여 나를/평온한 곳에서 떨리는 대기 속으로 안내했으니//나는 빛 한 점 없는 곳으로 갔다// ― 단테의『신곡(神曲)』37
「오후(午後)의 구장(球場))」//늦은 봄 기다리던/토요일 날,/오후 세시 반의 경성행 열차는,/석탄 연기를 자욱이 품기고,/소리치고 지나가고,//한 몸을 끌기에 강하던/공이 자력을 잃고/한 모금의 물이/불붙는 목을 축이기에/넉넉하다/젊은 가슴의 피 순환이 잦고,/두 철각(鐵脚)이 늘어진다//검은 기차 연기와 함께/푸른 산이/
아지랑이 저쪽으로/가라앉는다// _ (1936년 5월, 추정, 윤동주 19세)/24. 오후(午後)의 구장(球場) (시)/제1집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최현배 선생님의 정음사 출판사 삼판 1976년// ―『윤동주』24
제20장//배우는 일을 그만두면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예'라는 대답과 '응'이라는 대답의 차이가 얼마이겠습니까?/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의 차이가 얼마이겠습니까?/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 나도 두려워해야 합니까?/얼마나 허황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입니까?//딴 사람 모두 소 잡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즐거워하고,/봄철 망두에 오른 것처럼 기뻐하는데,/나 홀로 멍청하여 무슨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기만 합니다/지친 몸이나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도 같습니다//세상 사람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내 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흐리멍텅하기만 합니다/세상 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딴 사람 모두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입니다/나 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은 결국/나 홀로 어머니 [젖] 먹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_ (제20장 세상 사람 모두 기뻐하는데 - 위대한 인물의 실존적 고독 ―『도덕경(道德經)』20
「비의 근원」//하늘이 자신을 녹였다/그 한 방울이 떨어져/땅을 깨웠다//비는 하늘의 회한이었다/태어나기 위해선/자신을 낮춰야 했다//비는 흙을 적시며 말했다/낮음이 곧 깊음이다//그리고 세상은/그 한 방울의 순종에서/다시 자라났다//모든 생명은/비의 자손이었다// _ (『숨의 연대기』제2부 - 돌과 바람의 언어(형태의 창조) 6 「비의 근원」) ―『청람 김왕식』17
「세한도」//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있다/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께서 문을 열고 불을 켠다/잠시 후에 천사들이 들어오며 출근 체크를 한다/피를 뽑아 검사를 하는 동안 나는 세한도를 본다/늙은 한 그루는 소나무가 분명한데/젊은 세 그루는 소나무일까 잣나무일까/나무들보다 둥그런 문이 더 궁금하다/보름달 안에서 반달이 보인다/초승달과 그믐달도 보인다/그 문에서 나의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대동맥판막 반월문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반달 두 개도 보인다/엎어놓은 반달의 잔디 위에도 눈이 쌓여 있으리라/아직은 나의 반달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히고 있으리라/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문을 지나가는 피가 떡이 되어 핏줄을 막아버릴 수도 있으리라/혈전이 뇌로 가서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 수도 있으리라/아, 나는 이제 심장에서 나가는 문이 가장 무섭다/아,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달이 가장 무섭다/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나온다/세한도 밖으로 폭설은 멈출 줄 모르는데/늙은 소나무 한 그루 아직은 잘 살아가고 있다/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_ (2023년 『이어도공화국 6 - 서천꽃밭 달문 moon』 「세한도」) ―『배진성』13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빈센트 반 고흐의 현재 전해지는 편지는 총 903개의 편지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쓴 편지 820개, 받은 편지 83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650개 이상은 빈센트가 그의 남동생인 테오에게 보낸 것이다 편지 중에는 빈센트가 여동생인 빌이나 다른 친척에게 보낸 것들이나 폴 고갱, 안톤 반 라파르트, 에밀 베르나르와 주고받은 것들도 있다 테오의 부인이었던 요한나 반 고흐-봉허는 남편인 테오가 1891년 사망한 이후 수년 동안 편지들을 엮어 1914년 처음 서간집으로 출판하였다 1966년 편지 셀렉션의 편집자였던 아놀드 포메란스는 테오가 "편지의 가장 작은 조각까지 보존했던 종류의 사람"이라고 썼으며 테오의 이러한 특징 덕에 빈센트로부터 온 663개의 편지들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테오와는 대조적으로 빈센트는 자기에게 온 편지를 잘 남겨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빈센트에게 온 편지는 84개만이 남아 있으며 그중 39개가 테오에게 온 편지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알려진 많은 사실은 형제간의 이 편지들 덕이다 현재 빈센트에 대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기는 형제가 함께 파리에서 살아서 편지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던 때이다 공쿠르 형제 사이의 편지가 문학 분야에서 그러하듯, 빈센트와 테오 형제 사이의 편지는 그 시대의 예술을 조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는 내 삶의 꿈이고 삶이고 글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공화국] 만들기는 내가 죽은 다음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요즘 올리브 나무와 고흐와 테오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한다 고흐가 말년에 만난 올리브 나무를 생각한다 올리브 나무는 성경에도 많이 등장하는 나무이다 노아의 방주로 비둘기가 물고 온 나뭇가지도 올리브 나무라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살아생전 많은 편지를 썼다 빈센트 반 고흐의 현재 전해지는 편지는 총 903개의 편지라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쓴 편지 820개, 받은 편지 83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650개 이상은 빈센트가 그의 남동생인 테오에게 보낸 것이다 편지 중에는 빈센트가 여동생인 빌이나 다른 친척에게 보낸 것들이나 폴 고갱, 안톤 반 라파르트, 에밀 베르나르와 주고받은 것들도 있다
테오의 부인이었던 요한나 반 고흐-봉허는 남편인 테오가 1891년 사망한 이후 수년 동안 편지들을 엮어 1914년 처음 서간집으로 출판하였다 1966년 편지 셀렉션의 편집자였던 아놀드 포메란스는 테오가 "편지의 가장 작은 조각까지 보존했던 종류의 사람"이라고 썼으며 테오의 이러한 특징 덕에 빈센트로부터 온 663개의 편지들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그런데 테오는 고흐가 죽은 다음 해에 죽었다 왜 그렇게 빨리 죽었을까? 고흐(1853년 3월 30일~1890년 7월 29일, 37세) 테오(1857년 5월 1일~1891년 1월 25일, 33세)
테오와는 대조적으로 빈센트는 자기에게 온 편지를 잘 남겨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빈센트에게 온 편지는 84개만이 남아 있으며 그중 39개가 테오에게 온 편지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알려진 많은 사실은 형제간의 이 편지들 덕이다 현재 빈센트에 대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기는 형제가 함께 파리에서 살아서 편지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던 때이다 공쿠르 형제 사이의 편지가 문학 분야에서 그러하듯, 빈센트와 테오 형제 사이의 편지는 그 시대의 예술을 조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1885년 4월 빈센트는 그의 남동생에게 자신의 첫 걸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에 대해 편지에 적었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여러 인물이 들어간 복잡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며, 편지에 그림의 스케치를 그려 보냈다.
반 고흐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1차 자료는 그의 남동생 테오와 나눈 서신이다 형제의 평생에 걸친 우정과 빈센트의 생각 및 예술 이론 대부분은 1872년부터 1890년까지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테오 반 고흐는 미술상이었으며 형에게 재정적, 정서적 지원뿐만 아니라 당시 예술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의 교류를 주선했다
테오는 빈센트가 보낸 모든 편지를 보관했지만, 빈센트는 자신이 받은 편지 중 극히 일부만 보관했다 두 사람 모두 사망한 후, 테오의 미망인 요한나 반 고흐-봉허가 그들의 편지를 정리하여 출판하였다 1906년과 1913년에 몇 통이 공개되었고, 대다수는 1914년에 출판되었다 빈센트의 편지는 웅변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며 "일기 같은 친밀함"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어 왔으며, 부분적으로는 자서전처럼 읽힌다 번역가 아놀드 포머런스는 이 편지들의 출판이 "사실상 다른 어떤 화가에게서도 허용되지 않는, 반 고흐의 예술적 성취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한다"라고 썼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600통이 넘고, 테오가 빈센트에게 보낸 편지는 약 40 통이다 여동생 빌에게 보낸 편지 22통,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 58통,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22 통이며, 폴 시냐크, 폴 고갱,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 등에게 보낸 편지들도 있다 일부 편지에는 스케치가 그려져 있다 많은 편지에 날짜가 적혀 있지 않지만, 미술사학자들은 대부분을 연대순으로 배치하였다 아를에서 보낸 편지의 경우 필사 및 날짜 표기에 문제가 남아 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빈센트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영어로 약 200통의 편지를 썼다 형제가 함께 살았던 파리 시절에는 서신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기에 기록에 공백이 있다
빈센트의 편지에는 당시 높은 보수를 받던 화가 쥘 브르통이 자주 언급되었다 1875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는 브르통을 보았다고 언급하고, 살롱에서 본 브르통의 그림들에 대해 논의하며, 브르통의 책을 하나 보내주는데 반드시 돌려달라는 내용도 있다 1884년 3월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브르통의 시 한 편이 자신의 그림에 영감을 주었다고 언급한다 1885년에 그는 브르통의 유명한 작품인 《종달새의 노래》를 "훌륭하다"라고 묘사하였다 이 편지들 사이의 시점인 1880년 3월경, 반 고흐는 쿠리에르 마을에 있는 브르통을 만나기 위해 도보로 80 km를 걸어갔다 하지만 브르통의 성공과 그의 저택을 둘러싼 높은 담벼락에 위축되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돌아왔다 브르통은 반 고흐나 그의 방문 시도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화가 사이에 오간 알려진 편지는 없으며, 브르통이 1891년 자서전 《예술가의 삶》에서 여러 동시대 화가를 언급했지만, 그중에 반 고흐는 없다
출생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쥔데르트
사망
1890년 7월 29일,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
국적
네덜란드
19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자화상>과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에>. 네덜란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과 프랑스를 떠돌면서 책방 점원과 선교사 등을 지냈다. 1880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천직임을 깨닫고 습작에 열중했다. 네덜란드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한 후 프랑스에서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면서 그의 독특한 붓놀림으로 자연의 형태와 색채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개성적인 화풍이 확립되었다. 그는 현대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걸작으로는 수많은 자화상과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1889)이 있다.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는 시골 들판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호우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반 고흐의 활동시기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1873~85년의 첫 번째 시기는 잇따른 실패와 진로의 전환이 있었던 수습기로 자신의 까다로운 기질과 씨름하면서 진정한 자기표현의 수단을 찾으려 애쓴 시기였다. 1886 ~ 90년의 2번째 시기는 그림에 몰두하면서 빠른 성장과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시기였지만, 1889년부터 정신적인 위기가 잇따랐다.
1873~75년 5월까지는 런던에서,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호우필 화랑에서 일했다. 날마다 예술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 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의 한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졌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 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드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878년에 브뤼셀에서 복음전도사로 단기연수를 받기 위해 이 계획을 포기했다. 정통교리의 접근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다.
1879~80년 겨울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그가 순간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그가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90년의 10년뿐이었고, 처음 4년 동안은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먼저 브뤼셀 아카데미에 데생을 공부하러 갔다가 1881년 네덜란드 에텐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열심히 체계적으로 공부했지만, 곧 독학의 어려움을 느끼고 좀 더 경험이 많은 예술가의 지도를 받고자 했다. 1881년 말 그는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와 함께 일했다. 그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과 자주 만나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혔으며,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다. 1883년에 '자연 속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과 농부들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모베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찾아가는 네덜란드 북부의 황량한 드렌테 지역으로 떠나 3개월을 지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의 집은 이때 브라반트의 뇌넨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그 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뇌넨에서 보냈으며, 이 시기에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풍경·인물을 그렸는데,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탄광지역을 다룬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제르미날 Germinal〉(1885)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많은 그림, 예를 들면 〈베 짜는 사람들 Weavers〉과 〈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점차 그는 뇌넨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림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할스를 연구하면서, 전통적인 끝손질기법이 시각적 인상의 참신함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았고 베로네세와 들라크루아로부터는 색채 자체가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 뒤 루벤스에 열중하게 되어,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안트웨르펜으로 갑자기 떠났다.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방법,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같은 시기에 고흐는 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했다.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웨르펜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웨르펜을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던 반 고흐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폴 고갱 등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을 통하여 당시 프랑스 회화가 이룩한 발전에 눈을 떴다. 또한 테오는 호우필 화랑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카미유 피사로와 조르주 쇠라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 무렵에는 고흐도 인상파의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몽마르트르를 그린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색상은 마침내 다채로워졌고, 시각도 전통적인 시각에서 더욱 많이 벗어났으며 색조도 밝아졌다. 1888년 초 파리 교외를 그린 몇 점의 풍경화 및 〈탕기 영감의 초상 Portrait of Père Tanguy〉과 〈이젤 앞에 선 자화상 Self-Portrait in Front of an Easel〉 같은 걸작에서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양식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2년 뒤 고흐는 도시생활에 싫증이 나고 육체적으로도 기진맥진하여, '좀 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느끼고 그리는 방식'과 '색채의 완전한 효과'에 열중해 있었고, 결국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그 후 12개월 동안(첫 번째 전성기)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마을과 그 주변풍경,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집의 안팎,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이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ipe and Bandaged Ear〉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La Berceuse〉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 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Garden of the Asylum〉·〈삼나무 Cypresses〉·〈올리브 나무 Olive Trees〉·〈알피유 가족 Les Alpilles〉, 의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들라크루아·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은 모두 이 시기에 그린 것들이다.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 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선이 색채와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지방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나흘 뒤, 호메오파시(질병의 원인이 되는 약품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는 치료방법)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폴 세잔의 친구인 폴 페르디낭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가셰가 사는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갔다. 4년 전 뇌넨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마을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동생 테오(그는 결혼하여 아들 1명을 낳았음)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고독을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6개월 뒤(1891. 1. 25) 만성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생애의 마지막 3년 동안 제작한 작품들로 반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은 현대회화의 발전, 특히 수틴과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 가운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데생 1점뿐이었다. 항상 가난했던 그는 그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시급히 전달해야 한다는 확신과 형을 무조건 믿었던 테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했다. 1872년부터 테오와 친구들에게 쓴 편지들은 그의 목표와 믿음, 희망과 절망, 수시로 달라지는 건강상태와 정신상태를 생생하게 담고 있어서, 위대한 인간기록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하고 감동적인 전기자료이다.
그가 자살했을 때, 반 고흐라는 이름은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1888~90년에 파리의 앵데팡당 미술전람회에, 그리고 1890년 브뤼셀에서 그림 몇 점을 출품했다. 그가 죽은 뒤 1891년에는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를 기념하여 몇 점 안 되는 그의 작품을 전시했을 뿐이다. 그의 개인전은 1892년에야 열렸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에 대한 비평은 단 1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20세기초부터 주로 다른 화가들에 의해 명성을 얻기 시작한 뒤 그에 대한 평가는 끝없이 높아져가고 있다.
늦은 봄 기다리던
토요일 날,
오후 세시 반의 경성행 열차는,
석탄 연기를 자욱이 품기고,
소리치고 지나가고,
한 몸을 끌기에 강하던
공이 자력을 잃고
한 모금의 물이
불붙는 목을 축이기에
넉넉하다.
젊은 가슴의 피 순환이 잦고,
두 철각(鐵脚)이 늘어진다.
검은 기차 연기와 함께
푸른 산이
아지랑이 저쪽으로
가라앉는다.
_ (1936년 5월, 추정, 윤동주 20세)
24. 오후(午後)의 구장(球場) (시)
제1집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최현배 선생님의 정음사 출판사
삼판 1976년
https://youtu.be/9Qihr9wAXqg?si=5nZ7yPSRGKFS4hHM
― 제작 시기와 작품 나열 순서는 윤일주 교수가 작성한 것을 토대로 하였다
1. 초한대(시) _1934.12.24. 1집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 정음사 출판사, 중판 1955년, 삼판 1976년
2. 삶과 죽음(시) _1934.12.24. 1집, 정음사출판 중판, 삼판
3. 내일은 없다(시) _1934.12.24. 1집, 삼판
4. 거리에서(시) _1935.01.18. 1집, 중판, 삼판
5. 공상(空想)(시) _(?) 1집, 삼판, * <숭실활천> 1935년 10월 발표
6. 창공(蒼空)(시) _1935.10.20. 1집, 중판, 삼판
7. 남(南) 쪽 하늘(시) _1935.10. 1집, 2집, 중판, 삼판, 1에서 2로 개작 옮겨 씀
8. 조개껍질(동요) _1935.12. 1집, 중판, 삼판,
9. 고향집(동시) _1936.01.06. 1집, 삼판, 본인이 작성한 목차에는 (동요)
10. 병아리(동요) _1936.01.06. 1집, 중판, 삼판, * <카톨릭소년> 1936.11.
11. 오줌싸개 지도(동시) _(?) 1집, 중판, 삼판, * <카톨릭소년> 1937.01.
12. 창구멍(동요) _(?) 1집, *미발표작
13. 짝수갑(동요) _(?) * 제목만 있음
14. 기와장 내외(동요) _(?) 1집, 중판, 삼판
15. 비둘기(시) _(?) 1집, 중판, 삼판
16. 이별(離別)(시) _1936.03.20. 1집, 삼판,
17. 식권(食券)(시) _1936.03.20. 1집, 삼판,
18. 모란봉(牡丹峰)에서(시) _1936.03.24. 1집, 삼판
19. 황혼(黃昏)(시) _1936.03.25. 1집, 2집, 중판, 삼판, *1에서2로 개작
20. 가슴1(시) _1936.03.25. 1집, 2집, 중판, 삼판, *1에서2로 개작
21. 가슴2(시) _1936.03.25. 1집, 2집, *1에서2로 옮겨 씀. 2에 삭제표시
22. 종달새(시) _1936.03. 1집, 삼판
23. 산상(山上)(시) _1936.05. 1집, 2집, 중판, 삼판, *1에서2로 옮겨 씀.
24. 오후(午後)의 구장(球場)(시) _1936.05. 1집, 삼판,
25. 이런 날(시) _1936.06.10. 1집, 중판, 삼판
26. 양지(陽地)쪽(시) _1936.06.26. 1집, 2집, 중판, 삼판, *1에서2로 개작
27. 산림(山林)(시) _1936.06.26. 1집, 2집, 중판, 삼판, *1에서2로 개작, 5(습유작품)에도 있음
28. 닭(시) _1936.봄. 1집, 2집, 중판, 삼판, *1에서2로 개작
29. 가슴3(시) _1936.07.24. 1집, 2집, 중판, 삼판, *1에서2로 개작
30. 꿈은 깨어지고(시) _1936.07.27.(개작일) 1집, 중판, 삼판, * 19351027
31. 곡간(谷間)(시) _1936.여름. 1집, 2집, 삼판, * 1에서2로 개작
32. 빨래(시) _(?) 1집, 2집, 중판, 삼판, * 1에서2로 옮겨 씀
33. 빗자루(동시) _1936.09.09. 1집, 중판, 삼판, * <카톨릭소년> 1936.12.
34. 햇비(동시) _1936.09.09. 1집, 중판, 삼판,
35. 비행기(동시) _1936.10.초. 1집, 삼판,
36. 가을밤(시) _1936.10.23. 1집, 2집, 삼판, * 1에는 아인양, 2에는 가을밤, 삼판에는 <가을밤>으로 발표
37. 굴뚝(동시) _1936.가을. 1집, 중판, 삼판,
38. 무얼먹구 사나(동시) _1936.10. 1집, 중판, 삼판 * <카톨릭소년> 1937.03. 발표
39. 봄(동시) _1936.10. 1집, 중판, 삼판
40. 참새(동시) _1936.10. 1집, 중판, 삼판
41. 개(동시) _(?) 1집, 삼판
42. 편지(동시) _(?)
43. 버선본(시) _1936.12.초.
44. 눈(동시) _1936.12.
45. 사과(동시) _(?) 1집, 삼판
46. 눈(동시) _(?) 1집, 삼판
47. 닭(동시) _1936.겨울. 1집, 삼판
48. 아침(시) _1936.12. 또는 1937.1. 1집, 2집, 중판, 삼판 * 1에서2로 옮겨 씀
49. 겨울(동시) _(?) 1집, 2집, 중판, 삼판 * 1에서2로 옮겨 씀
50. 호주머니(동시)_1936. 1집, 삼판
51. 황혼(黃昏)이 바다가 되어(시) _1937.1. 1집, 2집, 습유작품, 중판, 삼판 * 1에서2로 옮겨 씀
52. 거짓부리(동시) _(?) 1집, 중판, 삼판
53. 둘다(동시) _(?) 1집, 중판, 삼판
54. 반디불(동시) _(?) 1집, 중판, 삼판
55. 밤(시) _1937.3. 1집, 2집, 초판, 중판, 삼판 * 1에서2로 옮겨 씀
56. 할아버지(동시) _1937.3.10 1집, 2집, 삼판 * 1에서2로 옮겨 씀
57. 만돌이(동시) _(?) 1집, 삼판
58. 개(동시) _(?) 1집,
59. 나무(동시) _(?) 1집, 삼판
60. 장(시) 2집, 중판, 삼판
61. 달밤(시) _1937.4.15 2집, 중판, 삼판
62. 풍경(風景)(시) _1937.5.29 2집, 중판, 삼판
63. 울적(鬱寂)(시) _1937.6. 2집,
64. 한란계(寒暖計)(시) _1937.7.1. 2집, 중판, 삼판
65. 그 여자(女子)(시) _1937.7.26. 2집, 삼판
66. 야행(夜行)(시) _1937.7.26. 2집,
67. 빗뒤(시) _1937.7.26. 2집,
68. 소낙비(시) _1937.8.9. 2집, 중판, 삼판
69. 비애(悲哀)(시) _1937.8.18. 2집, 삼판
70. 명상(瞑想)(시) _1937.8.20. 2집, 중판, 삼판
71. 바다(시) _1937.9. 2집, 중판, 삼판
72. 산협(山峽)의 오후(午後)(시) _1937.9. 2집, 중판, 삼판
73. 비로봉(毘盧峯)(시) _1937.9. 2집, 중판, 삼판
74. 창(窓)(시) _1937.10. 2집, 중판, 삼판
75. 유언(遺言)(시) _1937.10.24 2집, 초판, 중판, 삼판
76. 새로운 길(시) _1938.5.10 2집,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77. 어머니(시) _1938.5.28 2집,
78. 가로수(街路樹)(시) _1938.6.1 2집,
79. 비 오는 밤(시) _1938.6.11 2집, 중판, 삼판
80. 사랑의 전당(殿堂)(시) _1938.6.19 2집, 중판, 삼판
81. 이적(異蹟)(시) _1938.6.19 2집, 중판, 삼판
82. 아우의 인상화(印象畫)(시) _1938.9.15 2집, 초판, 중판, 삼판
83. 코스모스(시) _1938.9.20 2집, 삼판
84. 슬픈 족속(族屬)(시) _1938.9. 2집,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85. 고추밭(시) _1938.10.26 2집, 중판, 삼판
86. 햇빛·바람(동요) _(?) 2집, 중판, 삼판
87. 해바라기 얼굴(동시) _(?) 2집, 중판, 삼판
88. 애기의 새벽(동시) _(?) 2집, 중판, 삼판
89. 귀뚜라미와 나와(동시) _(?) 2집, 중판, 삼판
90. 산울림(동시) _(?) 2집, 중판, 삼판
91. 달을 쏘다(산문) _(?) 산문집, 중판, 삼판
92. 달같이(시) _1939.9. 2집, 중판, 삼판
93. 장미(薔薇) 병들어(시) _1939.9. 2집, 삼판
94. 투르게네프의 언덕(산문시) _1939.9. 2집, 중판, 삼판
95. 산골물(시) _(?) 2집, 초판, 중판, 삼판
96. 자화상(自畫像)(시) _1939.9. 2집,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97. 소년(少年)(시) _(?)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98. 팔복(八福)(시) _1940. 습유작품, 중판, 삼판
99. 위로(慰勞)(시) _1940.12.3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100. 병원(病院)(시) _(?) 육필자선시집,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101. 무서운 시간(時間)(시) _1941.2.7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02. 눈오는 지도(地圖)(시) _1941.3.12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03. 태초(太初)의 아침(시) _(?)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04. 또 태초(太初)의 아침(시) _1941.5.31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05. 새벽이 올 때까지(시) _1941.5.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06. 십자가(十字架)(시) _1941.5.31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07. 눈감고 간다(시) _1941.5.31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08. 못자는 밤(시) _(?)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109. 돌아와 보는 밤(시) _1941.6. 육필자선시집,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110. 간판(看板)없는 거리(시) _(?)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11. 바람이 불어(시) _1941.6.2.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12. 또 다른 고향(故鄕)(시) _1941.9.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13. 길(시) _1941.9.31.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14. 별 헤는 밤(시) _1941.11.05.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15. 서시(序詩)(시) _1941.11.20.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116. 간(肝)(시) _1941.11.29.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117. 종시(終始)(산문) _(?) 산문집, 중판, 삼판
118. 별똥 떨어진 데(산문) _(?) 산문집, 중판, 삼판
119. 화원(花園)에 꽃이 피다(산문) _(?) 산문집, 중판, 삼판
120. 참회록(懺悔錄)(시) _1942.1.24.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121. 흰 그림자(시) _1942.4.14.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122. 흐르는 거리(시) _1942.5.12.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123. 사랑스런 추억(시) _1942.5.13.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124. 쉽게 씌워진 시(詩)(시) _1942.6.3.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125. 봄(시) _(?) 습유작품, 초판, 중판, 삼판
늦은 봄 기다리던 토요일(土曜日) 날.
오후(午後) 세시(時) 반(半)의 경성행(京城行) 열차(列車)는
석탄연기(石炭煙氣)를 자욱이 품기고
소리치고 지나가고
한몸을 끄을기에 강(强)하던
공이 자력을 잃고
한 모금의 물이
불붙는 목을
축이기에 넉넉하다.
젊은 가슴의 피 순환(循環)이 잦고
두 철각(鐵脚)이 늘어진다.
검은 기차연기(汽車煙氣)와 함께
푸른 산(山)이
아지랑 저 쪽으로
까라앉는다.
_ (1936.5. 추정. 윤동주 20세)
1936년 5월에 창작한 작품으로 운동장에서 공을 찬 이후 숨을 돌리며 주변의 현대적 풍광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다. 시에서 등장하는 여러 시어들(경성행 열차, 석탄연기, 철각, 기차연기)을 통해서 일제의 의지에 의해 강제로 파헤쳐진 한반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의 같은 시기 작품으로 <산상>이라는 시가 있다.
원문에는 '공'이 '공(뽈)'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윤동주 시인은 축구를 즐겨했고 또한 매우 잘 했다고 한다.
'토요일 날'은 겹말 표현이다.
* 원문표기
'기다리던' -> '기다리든'
'끄을기에' -> '끟을기에'
'강하던' -> '강하든'
'한 모금의' -> '한목음의'
'불붙는' -> '불붓는'
'잦고' -> '잣고'
'푸른' -> '풀은'
'까라앉는다.' -> '까라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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