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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Mar 03. 2021

뒷간과 화장실

- 강산 시인의 꿈삶글 27




뒷간과 화장실

- 강산 시인의 꿈삶글 27




# 똥은 밥이다


똥은 우리들의 밥이다

똥을 더럽히지 말라

우리들의 밥을 죽이지 말라

뒷간이 화장실로 바뀌면서

우리들의 똥이 죽어간다

우리들의 밥이 죽어간다

우리들의 똥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물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다

익사한 똥들이 

똥물이 되어

멀고 어두운 똥강으로 흐른다

우리는 다시 똥이 

흙으로 돌아가게 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다시 기어이

똥이 밥이 되게 해야만 한다

제발 이제는 다시

밥이 되어야 할 우리들의 똥이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숨결을 불어넣어야만 한다

<강아지똥>은 민들레의 꽃을 피워야만 하고

'사람의 똥'은 우리들의 밥이 되어야만 한다 



# 해우소(解憂所)


해우소는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자연순환과 생태순환에 대하여 생각한다

해우소는 이제

친구들과 헤어지는 곳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명이 태어나는 곳이다

해우소는 이제

한 때 내 몸으로 왔다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거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곳이다



# 생명의 방


화장하는 화장실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방을 하나 구상 중

1. 똥돼지 키우던 방식 응용하여 하나 만들고

2. 수세식으로 만든 후 자체 정화 장치인 연못을 만들어 수생식물들의 천국 만들기

2009년에 내가 만들어서 10년 넘게 사용하던 이동식 친환경 좌변기를 활용하여 

이제 다시 한 단계 더 진화를 시도한다

옛날 똥돼지 기르던 경험을 살려

2층으로 생명의 방을 만들어야겠다

1층에는 돼지 대신

두엄 창고와 농기구 보관용 헛간을 만들면 좋겠다 

지금 사용하는 우리들의 대부분의 수세식 화장실은

지구의 환경을 위해서는 반드시 바뀌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의 몸이었던 똥은 처음부터 물보다 흙을 더 좋아한다


* 20091127 - 이동식 친황경 좌변기를 만들었다




강아지똥 Doggy Poo


권정생(權正生) 선생님의 동화


1969년『기독교교육』의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당선작이며 작자의 등단작이다. 작가가 가정 형편과 신병을 비관하던 중에 쓴 작품이다.


시골의 어느 돌담 아래에 홀로 떨어진 강아지똥은 지나가는 참새나 흙조차 무시하는 하찮고 냄새나는 존재이다. 봄비가 내리던 날, 강아지똥은 옆에 핀 민들레를 보게 된다. 민들레는 자신을 부러워하는 강아지똥에게 거름이 있어야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알려준다. 강아지똥은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따뜻한 말과 세상 어디에도 쓸모없는 줄 알았던 자신이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강아지똥은 민들레의 바람대로 빗물을 기꺼이 받아 자신의 몸을 잘게 부수어 노란 민들레꽃을 피운다. 민들레꽃은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희생을 꽃 속에 담아 더욱 노랗게 피어난다.


이 작품은 2003년 아이타스카 스튜디오에서 권오성 감독·각본으로 클레이 애니메이션화 되었다.


이 작품은 세상의 모든 물건들은 저마다 쓸모가 있다는 작가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탄생하였다. 작가는 온갖 물상들로부터 소외당하는 강아지똥을 푸근한 사랑으로 포용하는 민들레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의 생명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말하고, 생명이란 상생의 미학적 결정인 걸 포착하고 있다. 작가의 감각적 단문은 불필요한 수사를 생략하여 독자의 감동을 이끌어낸다. 작품의 저변에 장치된 사랑은 작가 고유의 메시지로, 그의 동화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기본 정조이다. 곧, 작가는 말년에 생태주의적 세계관으로 나아갈 발판을 이 작품에서 마련해 둔 셈이다.





한국의 생활사 뒷간


집 뒤쪽에 가려두던 곳에서 깨끗한 화장실로 탈바꿈하기까지

인간이 일생 동안 1년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며, 사색과 독서의 공간으로 깨우침과 휴식을 주는 곳이 있다. 하지만 쉽게 언급하기조차 꺼리며 집 앞 쪽이 아닌 뒤쪽에 가려두었던 곳. 그곳이 뒷간이다.


뒷간의 기원과 종류


인간은 음식을 먹어 삶을 유지하지만, 소화시키고 남은 것은 반드시 배설해야만 한다. 농업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인류는 늘 이동을 했고, 이동 중에 강가나 산기슭에 배설물을 쏟아냈다. 흐르는 물은 똥오줌을 치워주었고, 흙과 낙엽은 이것의 자연분해를 도와주었으니, 특별한 시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소변은 땅 위에서보다 땅 속에 묻힐 때 빨리 분해되기 때문에, 위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땅에 구멍을 파고 용변을 해결하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똥과 오줌을 따로 모을 필요가 생겨났다. 인간의 배설물이 농작물 성장에 필요한 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는 구덩이를 파거나 항아리를 묻고 그것을 모았다. 배설물은 이곳에서 숙성되어 거름이 되었고, 인간은 거름을 퍼내 농토에 뿌렸다.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재래식(푸세식) 뒷간의 역사는 농업의 시작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거름을 만드는 공간으로서 뒷간은 불쾌한 냄새와 청결상의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등장한 것이 물로 변을 빠르게 처리하는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기원전 3천년 경 인더스, 수메르 문명권에서 배설물을 떠내려 보내는 장치가 있는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배설물을 처리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휴대용 변기였다. 수레나 가마를 타고 이동할 때, 또는 밤에 화장실을 이용하고자 할 때, 밖에서 급히 용변을 보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이 휴대용 변기였다.


백제의 뒷간 유적


우리 역사에서 뒷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년)>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궐 북쪽 뒷간(측청, 厠圊) 속에서 두 줄기의 연꽃이 피어났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보다 앞선 고조선 시대나 삼국시대 초기에도 뒷간이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뚜렷한 유적과 기록은 없다. 다행히 2003년 익산 왕궁리 백제 유적 발굴 현장에서 공방(工房)시설 남측에 위치한 3기의 뒷간 유적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의 뒷간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뒷간 모형. 왕궁리 유적 발굴 당시 뒷간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궁의 서북쪽에 격리되어 있었으며 1.5~3미터 가량 깊이의 구덩이에 담긴 분뇨가 대형 배수로를 거쳐 궁 외부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되었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년)이 익산지역에 세운 별궁(別宮)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여기에서 뒷간은 궁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유목민들은 게르(Ger: 이동식 집)의 서북쪽에서 용변을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찬가지로 궁의 서북쪽에 뒷간이 위치했다는 것은 더럽고 부정한 곳은 서쪽이며, 앞쪽이 아닌 뒤쪽에 뒷간을 두는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뒷간은 담장에 의해 다른 지역과 격리되어 있으며, 공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던 곳이라고 여겨진다. 뒷간은 깊이 1.5∼3.1m 구덩이에 일정기간 배설물을 저장했다가, 일정한 높이까지 차오르게 되면 배설물이 뒷간 수로와 인접한 대형 배수로를 거쳐 궁성 외부로 배출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뒤처리는 어떻게?


익산 왕궁리 유적 전시관에 있는 백제 뒷간의 재현 모습. 앞쪽에 뒤처리를 위한 나무막대(厠籌)가 항아리에 담겨있다.


육식을 많이 한 사람들은 똥이 덩어리가 지기 때문에 뒤처리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식물성 섬유질을 많이 섭취한 사람들은 뒤처리가 필요하다. 백제 사람들은 뒤처리를 위해 뒤처리용 나무막대(측주, 厠籌)를 사용했다. 왕궁리 뒷간에서는 길이 26〜30㎝ 크기의 뒤처리용 막대 6점이 출토되었는데, 신체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어 있었다. 뒤처리용 나무 막대는 다시 물에 씻어 재사용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이가 비쌌던 과거에는 풀잎이나 볏짚 등으로 뒤처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농촌에서는 용변을 본 어린아이의 밑을 개가 핥아 해결하도록 하는 일도 흔했다. 물론 왕실 가족이나 귀족들은 비단 등의 옷감으로 뒤처리를 했다.


이동식 변기


왕궁리의 배수로 조사과정에서 뒷간과 관련된 유물로 변기형 토기 2개가 출토된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이 토기는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 주로 이용한 휴대용 변기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부여군 군수리에서는 호랑이의 모습을 본뜬 형태에 아가리를 크게 벌린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호자(虎子)로 남성들이 사용하는 휴대용 변기다. 호자는 부여 관북리, 여수 고락산성, 연천 호로고루 등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특히 고구려 전방의 군사시설인 호로고루에서 발견된 호자는 군 지휘관용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볼일을 보기 위해 근무자가 근무지를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거나, 오줌을 따로 받아 둔전(屯田: 군량 확보를 위해 군인이 경작하는 농토) 농사에 사용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1)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여성들이 사용했던 휴대용 변기


2) 호자(虎子)는 남성용 휴대용 변기다.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유적이다.


3) 요강은 주로 밤에 사용하는 이동식 변기로, 조선 후기로 올수록 장식적 요소가 가미되었다.


호자는 뚜껑이 없어 실내에 오래 두면 냄새가 난다. 이를 개선한 것이 요강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강은 고려시대 이전에 등장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요강은 남녀 구분 없이 집집마다 사용했다. 특히 밤에 먼 거리에 있는 뒷간에 가기 어려울 때 요강을 이용했다. 여성들이 가마에 탈 때는 가마 안에 요강과 대야를 반드시 넣고 다녔다. 요강은 오지, 놋쇠, 사기, 양은 등으로 만들며, 조선시대에는 청자, 백자, 목칠 요강도 생겼다. 요강은 여성들이 시집갈 때 마련해가는 필수 품목이기도 했던, 안방 살림살이의 하나였다.


조선시대 임금이 쓰던 매화틀


조선 왕실에서는 이동식 변기인 매우틀을 사용했다. ‘매우(梅雨)’에서 ‘梅’는 대변, ‘雨’는 소변을 빗댄 것으로, 무척이나 향기로운 이름이다. 매우틀은 ‘매화틀’로도 알려져 있는데, 1527년 어린이들을 위해 지은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투(

)'를 ‘매우통 투’라고 새긴 것으로 볼 때 조선 초기 또는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매화틀은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앉기 편하도록 비단 등으로 감쌌다. 가운데 구멍이 뚫어져 볼일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구멍 바로 아래에는 매화그릇을 두었다. 매화그릇에는 ‘매추’라고 불리는 잘게 썬 여물을 뿌려 놓아 분뇨가 튀지 않고 소리도 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조선의 왕실가족이 사용한 매화틀과 매화그릇. 나무로 만든 후 앉기 편하도록 비단으로 감쌌다. 사대부 집인 강릉시 선교장에도 비슷한 매화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상류층에서 널리 사용된 듯하다. 사진은 고양 화장실 전시관의 전시품이다.


경복궁 동궁전 옆의 뒷간. 경복궁 내의 뒷간은 총 28곳이다. 조선 최고의 직장이자 왕실 가족이 거주하던 궁궐 안에는 곳곳에 뒷간이 있었다.


경복궁의 뒷간은 28곳이고, 창덕궁과 창경궁에도 21곳의 뒷간이 있었다. 궁궐의 뒷간은 별채로 짓거나, 본채를 둘러싸고 있는 행각 일부에 설치했다. 그런데 왕과 왕비가 사는 내전이나 왕이 공식적으로 신료들을 만나는 외전 등 궁궐의 중심부에는 뒷간이 없다. 그것은 왕실 가족들이 매화틀과 요강으로 용변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궁궐 안의 뒷간은 궁녀, 내시, 노비, 군인 등 궁궐에서 살거나 머물며 일을 하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에 주로 설치되어 있었다. 궁궐은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자, 최고ㆍ최대의 직장인만큼 많은 이들이 북적거린 곳이었으니 당연히 많은 뒷간이 있었던 것이다.


분뇨는 귀중한 자원


751년 경 창건된 불국사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수세식 변기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불국사 극락전 옆 석재들을 살펴보면, 두툼한 돌 가운데를 참외꼴로 파내고, 그 앞쪽에 구멍을 내어 물을 부어 배설물을 구멍으로 흘려버리도록 만든 구조다. 사찰의 해우소(解憂所)는 텃밭에 뿌릴 퇴비의 생산처였다. 비탈 위에 설치된 뒷간 아래가 채마밭으로, 위에 떨어진 분뇨가 자연스레 거름이 되도록 처리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수세식 변기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뒷간은 백제 왕궁리 뒷간처럼 급수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고 분뇨가 축적되는 재래식 뒷간이었다. 농민들에게 분뇨가 쌀과 같이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남의 집에서 똥을 누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뒷간에 모아둔 분뇨는 거름이 되어 농사에 사용되었다. 뒷간은 쓸모없는 배설물을 버리는 곳이 아니라, 작물을 생산하기 위한 비료 공장인 셈이었다. 그런데 분뇨를 논밭에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면 효과가 적다. 뒷간에서 적당히 썩혀야 거름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농민들은 뒷간에 가득 찬 분뇨를 똥장군과 오줌장군에 담아 논과 밭으로 날라다 뿌렸다. 따라서 재래식(푸세식) 뒷간에는그것을 쉽게 퍼갈 수 있도록 똥구덩이 위에 긴 나무판을 올려놓았을 뿐 윗면을 다 덮지 않았던 것이다.


잿간과 뒷간


‘똥오줌이 어떻게 농사에 이용되어 왔는가?’의 역사에 대한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분뇨는 처음에는 그대로 농토에 뿌린 후, 한참 후에 토지를 갈아 버리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분뇨를 숙성시켜 비료로 사용한 것은 이웃한 중국의 경우 가사협(賈思勰)이 6세기경에 편찬한 중국 최고의 농업서적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도 분뇨를 숙성시켜 농사에 이용하는 방법을 받아들여 사용했겠지만, 언제부터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1429년에 정초(鄭招, ?~1434) 등이 편찬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업서적인 [농사직설(農事直設)]에는 여러 종류의 비료가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에 사람의 똥(人糞)과 함께 똥재(糞灰-똥과 재를 썩은 것)가 언급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한 비료는 똥재였다. 하지만 똥재를 만들기 위한 재(灰)는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온돌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가에서는 재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일부 농가에서는 재를 모아두는 잿간 한켠에 볼일을 보는 발판을 놓고 뒷간을 겸하게 했다. 용변을 본 후, 잿간에 쌓아둔 재와 왕겨 등을 뿌려 삽으로 떠서 잿간 한쪽에 쌓아둔 후 퇴비로 숙성시켜 쓰기도 했던 것이다. 똥재는 악취도 없고 다루기에 편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농업에 사용하는 거름의 양이 많아졌다. 또한 19세기에는 똥과 오줌을 별도로 숙성시켜 거름으로 만들면 비료로서의 효과가 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따라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똥오줌을 효과적으로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렇듯 분뇨는 농민들에게는 보물이었고, 뒷간은 보물창고였다.


똥장수의 등장


1778년 청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에 대해 적은 [북학의(北學議)]에서 거름(糞)에 대해 언급했다.


“청나라 사람들은 거름을 금처럼 아끼고, 재를 함부로 버리는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성 안에 있는 분뇨를 전부 수거하지 못해 냄새가 길에 가득하다. 분뇨를 수거해 가지 않고, 재를 함부로 길에다 버려 바람에 날려 불결하기도 하다. 시골에는 사람이 적어 재를 구하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도성 안의 재를 1년만 모아도 몇 만 섬은 되는데, 이를 버리고 이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몇 만 섬의 곡식을 버리는 것과 같다.”

고양 화장실 전시관에 전시된 똥장군과 오줌장군. 농부들은 분뇨를 여기에 퍼담아 지게에 싣고 논밭에 가서 뿌렸고, 이는 좋은 거름이 되었다.


농가 뒷간의 분뇨와 아궁이에서 생산된 재, 마구간과 외양간에서 생긴 가축의 배설물이나 축사에 까는 짚 등은 모두 비료로 이용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도성 안에서는 원칙적으로 농사가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도시의 화장실과 아궁이에서 나오는 분뇨와 재는 골칫덩이였다.


따라서 도성 안의 분뇨를 퍼서 도성 근처의 논밭에 파는 똥장수가 생겼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연암집(燕巖集)]에는 똥거름을 져서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실려 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왕십리의 무, 살곶이의 순무, 연희궁의 고추와 마늘 등 도성 인근의 밭작물들은 모두 예덕선생의똥을 가져다가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고 했다. 똥장수는 20세기 초까지도 존재했던 엄연한 직업이었다. 1910년대에 똥과 재를 섞은 똥재 한 섬은 10〜30전에 팔리기도 했다. 도시의 분뇨는 이렇듯 똥장수들이 처리했다. 과거 한양 사람들은 똥장수에게 똥을 팔았으나, 1935년 이후부터는 시대가 바뀌어 배설물의 처리비용을 따로 지불하는 것으로 변했다.


서양의 수세식 화장실의 도입


오늘날 화장실이 거실의 한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물을 흘려 처리하는 수세식 변기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화장실은 집 뒤쪽에 가려두던 것에서 씻고 화장하는 기능까지 겸비한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출처: gettyimages>


농촌과 달리 배설물의 처리는 도시에서 늘 문제였다. 중세 유럽의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대소변을 거리에 마구 버려 위생과 미관상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수세식 화장실이다. 1775년 영국의 시계 제조공 알렉산더 커밍스가 처음 발명했다고 알려진 수세식 화장실은 현대식 도시문명의 청결함을 가져다 준 위대한 발명품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변기 배수관에 S자 모양의 트랩을 만들어 악취가 관 밑에 머물러 실내 공기 중으로 배출되지 않도록 만듦으로써, 배설물을 처리하는 장소(뒷간)를 실내의 한 공간에 둘 수 있도록 하였다. 20세기 후반 수세식 화장실은 우리나라에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1972년 서울시내 화장실 중 수세식은 놀랍게도 7%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수세식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외형적 깨끗함과 달리 수세식 화장실은 똥오줌을 단순한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다. 수세식 화장실에서 분뇨를 처리하려면 그 50배에 달하는 물을 소비해야 한다. 많은 물을 낭비하며 처리된 분뇨는 하수처리 과정을 거쳐 정화되지만, 하천이나 바다의 수질오염을 포함한 환경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고 배설물을 배출하고, 이것은 다시 거름이 되어 음식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자연의 순환고리에서 뒷간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수세식 화장실은 이러한 고리를 끊어 버려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왔다. 이제 뒷간이란 이름은 낯설어지고, 용변뿐 아니라 씻고 화장하는 기능까지 겸비한 ‘화장실’이란 이름이 더욱 널리 사용되고 있다.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 과거와 같은 재래식 화장실의 부활은 불가능하다. 또한 농촌에서도 천연비료인 똥재를 사용하기 보다는 화학비료에 더욱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음식 - 똥 - 거름 - 음식으로 이어지는 자연 순환의 고리는 단절되고 말았다.


뒷간과 화장실


언제부터인가 화장실의 청결도가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평가하는 잣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각 지자체별로 수억 원을 들여 고급 화장실을 만드는 것이 경쟁처럼 번지기도 했다. 하지만 겉으로 화려하고 깨끗한 화장실이 자연을 오염시키고 생태계의 순환고리를 단절시켰다는 문제는 여전하다. 비록 많은 문제가 있지만, 재래식 뒷간이 생태계의 순환 고리를 이어주는 자연 친화적인 것임은 분명하다.


최근 들어 현대 화장실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보다 자연 친화적인 순환식 화장실, 생화학 변기, 자연 발효식 화장실 등이 차츰 늘어가고 있다. 자연에서 발생한 존재인 인간의 배설물을 자연으로 환원시키기 위한 변화의 계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김광언,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002;다니엘 푸러 저, 선우미정 역, [화장실의 작은 역사], 들녘, 2005;전용호,「익산왕궁리유적의 화장실에 대한 일고찰」, [백제학보] 2집, 2009;홍순민, [궁궐의 뒷간],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2011;김영진 외, [조선시대 시비기술과 분뇨 이용], [농업사연구] 7집, 2008;강준만, [한국화장실의 역사], [인물과사상] 102집, 2006;정연학, [뒷간 그 서구문화의 확실한 식민지], [실천민속학 새책] 3집, 200          


뒷간 - 집 뒤쪽에 가려두던 곳에서 깨끗한 화장실로 탈바꿈하기까지 (한국의 생활사, 김용만)




자연과 함께 사는 우리 뒷간 머리말

자연을 꿈꾸는 뒷간


얼마 전 필자가 너무나 감동을 받으며 읽은 동화로,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이 있다. 얘기를 줄여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돌이네 흰둥이가 돌담 밑에 똥을 눠서 강아지똥이 태어났다. 강아지똥은 모두들 더럽고 냄새난다고 따돌림 받다가 역시 같은 처지에 처한 흙덩이의 신세타령을 듣게 된다. 하지만 그 흙도 주인이 데려가자 강아지똥의 소외감은 더욱더 커져간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옆에 예쁜 민들레가 꽃을 피우자 강아지똥은 민들레를 부러워한다. 그러자 민들레는 강아지똥에게 네 몸을 녹여 내 몸에 들어와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된다는 말을 건넨다. 강아지똥은 너무 기뻤고 와락 민들레를 껴안았다. 비는 사흘 밤낮을 내렸고 둘은 하나가 되어 예쁜 꽃봉오리를 맺는다. 봄이 가득한 날 바람타고 퍼져가는 민들레향과 방긋 웃는 꽃송이 속엔 귀여운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어려 있다.


나는 평소에 똥을 더럽고 냄새나는 존재로 여겨왔다. 어린 시절 수거식 변소를 드나들던 기억이 물론 유쾌하지 않았고 깔끔하게 단장된 수세식을 선호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내가 세상을 살며 똥이 더럽지 않다는 사실을 관념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은 결혼한 이후 두 차례의 계기를 통해서였다.


한 번은 재택근무를 하며 아내와 같이 두 딸아이의 기저귀를 손대면서였는데 천 기저귀에 묻은 아기똥이 하나도 더럽지 않은 것이었다. 똥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더럽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똥을 더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알았다.


또 한 번은 충남 아산의 농촌마을로 이사해 작은 농사를 지어보며 똥거름의 소중함을 느낀 것이다. 물론 화학비료만큼은 편리하지 않고 대규모 농사경영에는 안 맞을지 몰라도 나 같은 몇백 평 농사에는 똥거름이 꽤나 쏠쏠한 쓰임새가 있었고 더더욱 땅을 살리며 텃밭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뿌듯하게 했다.


뒷간에 대해 글을 쓰게 된 데에는 7년간 '우리문화 답사모임'을 꾸리며 전국 여러 곳의 뒷간들을 둘러볼 기회를 가진 것도 큰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전통 뒷간이 비록 허술하고 냄새나지만 상당히 과학적 근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과, 대부분의 뒷간이 수세식 화장실로 개조되면서 많은 문제점을 떠안고 있다는 사실이 이 글을 서둘러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우리가 시대의 변화를 돌이킬 수 없듯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의 생각도 변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대대로 내려온 것 중 챙길 것은 챙기고 버릴 것은 버리고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 나는 우리의 뒷간을 보면서 바로 그 생각을 했다. 챙길 것은 우리 뒷간의 생태성이고 버릴 것은 뒷간에 대한 편견이며 바꿀 것은 옛 뒷간의 낡은 시설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 넘게 뒷간을 드나든다. 이 뒷간은 우리가 사람이라는 생명체를 유지하는 한, 가지 않을 수 없는 꼭 필요하고 소중한 곳이다. 뒷간은 배설의 욕구를 푸는 행복한 공간이며, 그 과정에서 여유와 사색을 즐길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곳 세 가지를 대라면 '부엌'과 '잠잘 방'과 '뒷간'을 손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뒷간에 대해 우리 조상들은 양면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쉽게 말해서 거기에는 뒷간의 은밀성에 바탕을 둔 부정적인 인식과 뒷간의 생태성에 기초한 긍정적인 인식이 교차되어 있다. 여기서 묘한 것은 뒷간의 두 갈래 잣대가 숟가락 색깔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금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난 계층과 놋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난 계층간에 뒷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금숟가락으로 밥을 먹든, 놋숟가락으로 밥을 먹든 나오는 똥은 똑같겠건만 금숟가락층들에 의해 쓰여진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고려사』 등 역대 역사서들을 훑어보면 한결같이 뒷간은 음모와 비리, 범죄의 공간으로 등장했다. 반면 구전민속이나 풍속사를 통해 살펴본 백성들의 삶 속의 뒷간은 거름을 생산해내는 소중한 공간이요, 약재창고로 취급되었다. 왜 그럴까? 나는 이러한 원인이 사람 몸에서 나오는 똥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똥을 쓰레기로 보는가, 거름으로 보는가! 바로 여기에서 뒷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화학비료가 등장하기 이전, 똥거름으로 농사짓던 이들은 똥의 가치를 절감했고 당연히 뒷간은 이렇듯 소중한 자원을 생산해내는 곳으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


농사 지을 일이 거의 없는 양반층들은 똥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그들에겐 뒷간이 '배설의 욕구충족'과 '사색의 공간'이라는 측면만이 부각되어 받아들여졌다. 사색의 3대 공간으로 측간이 손꼽힌다든가, '여유로움을 훔치는 공간'이라는 뜻의 '투한(偸閒)'이라는 말이 조선시대 양반층들의 입에 회자된 것도 이러한 연유일 듯싶다.


하지만 뒷간의 가치는 여기에서 멈춰버리고 뒷간이 생태순환의 중요한 고리를 쥐고 있다는 생각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관으로 말미암아 뒷간이 허리끈을 풀고 뒤를 봐야 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은밀하게 받아들여진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또한 이들 지배층이 백성들을 대상으로 분전법(糞田法)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던 것으로 보아 똥거름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건만 직접적인 농사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인식과 행동이 따로 노는 태생적 한계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근대 이후부터 나타났다. 뒷간에 대한 이중잣대는 이후 외국 문물이 들어오면서 뒷간의 위상이 급격히 변화함에 따라 더욱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즉 똥을 자원이 아닌 쓰레기로 취급하는 경향이 팽배해지면서 환경오염과 자원낭비라는 문제를 동시에 유발시켰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뒷간이 이렇게 왜곡되다보니 생태순환을 파괴하는 행동이 다른 부분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게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뒷간에 대한 인식, 좀더 따지자면 똥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세우는 일은 이런 면에서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자연은 사람의 모태(母胎)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단지 낳고 죽는 것만이 아니라 일분 일초라도 사람은 자연과 관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매일 몇십억 개의 원자를 먹고 마시며 동시에 몇십억 개의 원자를 배설하고 방출하고 뱉어내며 살아간다. 그래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은 20년만 지나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자연에서 공급받은 새로운 원자들로 재구성된다고 한다. 이 관계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사람과 자연의 긴밀한 관계는 숨쉬고 먹고 배설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숨'과 '밥'과 '똥'은 서로 연관되면서 순환하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른 형태다. 동물이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으면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 탄수화물로 만들어내고 산소를 내뱉는다. 여기에서 식물이 저장한 탄수화물은 동물의 먹이가 된다. 동물의 먹이는 배설물로 나오고 배설물은 다시 흙을 살찌워 식물들의 영양소가 된다.


'自·저절로, 然·그러하다'는 말 자체가 이러한 자연 요소들이 서로 순환하며 관계 맺는 움직임과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니, 우주만물은 곧 순환하지 않고 관계 맺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空'과 '時'와 '人'도 바로 순환과 관계 속에서 실재한다 하여 선조들은 '空間', '時間', '人間'이라는 낱말로 표현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이 이렇듯 서로간에 관계를 주고받으며 순환하는 것을 우리는 '생태순환(生態循環)'이라 부른다.


사람들의 생태순환은 바로 숨쉬고 먹고 배설하는 것으로, 이것들은 사람살이의 기본인데 오늘날 우리들은 생명을 귀중히 여긴다면서 오직 먹는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을 뿐이다. 우리의 '숨'을 공급받는 '대기'가 오염되면 어떻게 숨쉴 것이며, 우리의 '먹을거리'가 오염되면 어떻게 먹을 것이며, 우리의 '똥'이 자연으로 되돌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겠는가.


사람의 배설물은 오염원(汚染原)이 아니라 바로 생태순환의 중요한 고리이며 자연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에너지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는 인간의 무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생산력주의로 말미암아 극단적인 에너지 수탈(과잉소비)과 더불어 자연의 생태순환을 가로막고 있다. 물질문화를 강조하는 서구적인 가치체계가 현대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으면서 인간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방식도 반생태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산업화·도시화에 따른 탈농업화 경향으로 흙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배설물을 혐오하게 되었고 눈으로부터 안 띄게, 냄새 안 나도록 멀리 보내는 방식에만 골몰해왔다. 그 결과로 등장한 '수세식'의 보급으로 인해 인간의 배설물은 생태순환 고리에서 떨어져 오염원으로 작용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미래의 인류사회에서 지구의 생태환경이 인류의 존망을 가르는 결정 요소라는 점에서 인간의 배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 글은 사람의 똥이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못하여 생태순환의 고리가 끊어져버린 오늘날의 화장실 문화로 하여금 다시 생태성을 회복케 하여 그것을 생태순환의 원리에 따르도록 한다는 데 목적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우선 '화장실'이라는 용어를 되도록 쓰지 않고 대부분 '뒷간'의 상대적 개념으로 썼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배설하는 공간을 '화장실'이라 부르지만 '화장실'이란 명칭 자체가 사람의 똥을 물에 빠뜨려 도시에서 멀리 보내는 '수세식'의 등장에 따라 붙여진 것으로서 반생태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생태순환의 원리에 입각한 배설 공간을 '뒷간'이라 부르고, 이에 반하는 반생태적 배설 공간을 '화장실'이라 편의상 붙였다.


글의 내용은 먼저, 오늘날 '생태적 뒷간'이 왜 중요하게 나서는가를 얘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자연수탈을 본질로 하는 현대사회와 달리,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공생순환(共生循環)의 관계로 보았던 옛날에는 인간의 배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의 뒷간 문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의 전통 뒷간은 그 생태적 특성상 지역과 생활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음을 소개하고, 최근 전통 뒷간의 원리에 근거하되 요즘 사람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현대적으로 개량한 생태적 뒷간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뒷간의 생태적 원리에 대해서도 정리해보았다. 우리의 뒷간은 아무래도 수세식에 비해 냄새나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뒷간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성질(생태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생태적 원리를 올바로 이해하면 뒷간이 주는 불편함이나 냄새는 기분 좋고 향기롭게 느낄 수도 있다. 아울러 자연을 이해하고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이다. 전통 뒷간이 주는 약간의 불편함과 수세식의 편리함을 고사성어로 비교해보자면 고진감래(苦盡甘來)와 흥진비래(興盡悲來)라고나 할까?


다음으로 자신이 직접 생태적인 뒷간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어떻게 생태적 뒷간을 만들 것인가'에 대해 얘기하기로 한다. 되도록 돈 들이지 않고 쉽게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정리하기 위해 직접 생태적 뒷간을 만든 분들의 경험과 의견을 많이 참조했다.


최근에는 외국에서 들여온 여러 종류의 자연발효 화장실이 많다. 전통 뒷간과 같은 생태적 원리에 근거하되 현대인들의 취향을 고려한 화장실 구조인데 알아두면 좋을 듯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수세식이면서도 생태파괴적 요소를 극소화한 변기들이 최근 선보이고 있어 뜻있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생태적 뒷간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똥과 오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똥과 오줌이 처리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우리의 밥이요, 땅이요, 구원자임을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증명하고 싶었다. 현실 속에서는 뒷간에서 나오는 인분퇴비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소개해 놓았다. 생태순환의 중요한 과정이기에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뒷간 문화가 생태적 관점에서 한층 진전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며 이 책의 발간을 위해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전국귀농운동본부의 일꾼들께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다.


또한 이 글을 읽고 흔쾌히 추천사를 써주신 이병철 전국귀농운동본부 본부장님과 김영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본부장님은 평소 '똥철학'을 재미있고 또한 진지하게 말씀해주어 이 시대에 필요한 생태주의를 단순명쾌하게 지적해주셨다. 또한 김영원 선생님은 직접 똥농사법[糞田]을 실천하신 분으로 똥이 농사에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일깨워주신 분이다. 이런 분들의 추천사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필자에게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아내와 두 딸들에게 책 쓴다고 많은 어려움을 주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2000년 8월 아산 사래마을에서 

이동범


자연을 꿈꾸는 뒷간 2000.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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