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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12. 2020

24. 초승달과 그믐달

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초승달과 그믐달을 생각한다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과 부활을 생각한다

아버지와 아들을 생각한다

변하지 않을 그 무엇을 생각한다     


초승달은 서쪽에서 뜨고 그믐달은 동쪽에서 진다. 초승달은 저녁에 눈을 뜨고 그믐달은 새벽에 눈을 뜬다. 초승달은 하루 종일 기어 다니고 그믐달은 하루 종일 누워있다. 초승달과 그믐달은 잘 만나지 못하고 초승달과 그믐달은 모두 배가 고프다. 초승달과 그믐달은 같은 하늘에 살아도 초승달과 그믐달은 다른 세상의 달이다. 나와 아들은 초승달과 그믐달이다. 그믐달은 동쪽 하늘에 태양을 불러내고 스스로 구름 속으로 사라져 구름이 된다. 초승달은 서쪽 하늘까지 태양을 따라가 목 놓아 부르다가 바닷물에 몸을 던진다.   

  

‘오늘 오전 11시 화순문화회관에서 2020년도 화순리마을회 신년하례회를 개최하오니 리민 여러분들의 많은 참석바랍니다. ※ 경자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성취하시고 건강과 행복 가득한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화순리장 박정수 올림     


설날 밤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아침부터 길을 만들고 수선화 옮겨 심는 일을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다른 때 같으면 바로 잠을 자야하는데 설날연휴라 그런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해마다 설 다음날은 마을 어르신들께 세배를 올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올해는 한 번 나도 참석하고 싶었다. 내가 몸이 약해서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은 잘 참석하지 않는데 올해는 꼭 한 번 참석하고 싶었다. ‘우한 폐렴’이라고 불리는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잠시 망설이기도 했으나 나는 문화회관으로 올라갔다. 문화회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벌써 와 있었다.   

  

제주도 시골에는 대부분, 평소 리장과 사무장들이 근무를 하는 회관 외에 마을마다 문화회관이 따로 있다. 주로 결혼식 피로연과 장례식이 열리는 장소로 사용된다. 잔치와 상례의 장소로 이용되는 화순 문화회관은 원래 감귤 선과장과 감귤창고였는데 문화회관으로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다. 문화회관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앉아있고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 행사의 대강을 알 수 있었다.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은 방에 모두 앉아계시고 64세부터 5살 간격으로 합동 세배를 올리는 행사였다. 그런데 보통 65세에서 75세까지는 잘 오지 않으시고 75세 이상의 어르신들만 주로 오신다고 하였다. 방에 앉아계신 분들은 대략 보아도 100명이 훨씬 넘어 보였다. 그리고 밖에도 그 정도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이 마을에 20년 이상 살다보니 아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이런 행사장에 와서 보면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주로 서로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모두 인사를 하고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오늘 가만히 서서 참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였다.    

 

드디어 행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면장과 조합장을 비롯한 기관장들의 세배가 있었고 64~60, 59~55, 54~50… 순서로 합동 세배를 올렸다. 세배가 끝나고 떡국과 돼지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이 경사스러운 날에도 정신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순리 부녀회원들이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많은 음식을 장만하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음식을 배달하고 있었다. 물론 자발적으로 하는 봉사라고 하지만 이런 문화는 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문화를 당장 바꿀 수 없다면 하다못해 금전적으로라도 충분한 보상이 있기를 바라며 맛있게 먹었다. 세배 앞뒤로 한 번씩 하고 떡국 한 끼 함께 먹었을 뿐인데도 나는 어느덧 화순리 가족이 되는 것 같아서 좋은 하루였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죽은 사람은 떠나기 전에 산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일이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죽은 사람들은 주로 몸국이나 국수를 대접한다. 몸을 생각하거나 긴 국수처럼 오래 살라는 뜻이 담겨있을 것이다.    

 

콩팥 이식을 기다리던 사람과, 신장을 비롯한 모든 장기를 기증한, 너무나 젊은 사람이 같은 날 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삶을 잠시 펼쳐보고 다시 세상 속으로 흩어진다. 하늘에는 죽은 사람들의 못 다한 말들이 구름으로 떠 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배영옥 시인을 생각한다. 불현 듯 찾아온 배영옥 시인이 나를 읽고 있다. 나는 배영옥 시인과 단 하루도 함께 살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죽어서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친척들의 모임이나 갑장들의 모임에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장례식장에서 잠시 내가 읽었던 망자들은 양지공원에서 연기로 피어오를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나의 죽음의 형식을 결정하지 못했다. 연기로 피어올라 이 지구의 공기를 조금 더 오염시키고 떠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나의 나무 아래 누워서 나무의 거름이 되어 돌아갈 것인가. 어쩌면 나의 의지와는 달리 산 사람들의 입장에서 편리성과 경제적인 측면이 먼저 고려되어 결정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또한 부질없는 고민일 것이다.  

   

밤에 비가 내린다. 망자들의 못 다한 말들이 구름으로 떠 있다가 땅으로 스며든다. 망자들의 발자국소리가 부드럽게 들린다. 바퀴벌레들과 모기들과 함께 살고 있는 나는 침대에 누워 망자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내가 옛날에 죽인 바퀴벌레를 떠올리고 모기를 잡으려고 내 뺨을 스스로 때리던 나의 손바닥도 들여다본다. 이제는 모기의 숨소리도 좋고 바퀴벌레의 발자국소리도 정답다.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망자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나를 읽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일을 하고 싶다.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하고 싶다. 산 사람들을 먹이는 일을 하고 싶다. 죽은 사람들의 못 다한 말을 들어주는 일을 하고 싶다. 배영옥 시인의 시를 처음부터 천천히 읽으면서 나도 자꾸만 아름다운 시인으로 부활하고 싶어진다.     


나는 아직도 배영옥 시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2018년 6월 1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녀가 어떤 지병으로 떠났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아팠는지도 모른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녀는 2014년부터 시집 한 권을 준비한 듯하다. 그리고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시집 한 권을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가 준비했던 시집은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고 1년 후에야 비로소 발행된 듯하다.  

   

나는 나의 피 농도를 잘 조절해야만 비로소 살 수 있다. 피가 너무 진하면 핏줄이 막혀서 뇌졸중으로 죽을 것이고 피가 너무 묽으면 뇌출혈로 죽을 확률이 많다. 금속판막으로 바꾼 다음부터 나는 나의 심장에서 금속성 시계소리를 들으며 살아야만 한다. 나도 모르게 밖에는 벌써 환한 세상이 되어 있다. 오늘 아침에는 조용히 들국화와 제주수선화가 나란히 비에 젖고 있다. 어제 내가 조문한 망자는 지금쯤 가장 좋은 차를 타고 양지공원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배영옥


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 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세로 빛살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나를 읽고 있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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