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깊은 밤 산책을 나간다
오래도록 잊고 지내던 병이 다시 도진다
밤새 서울 남산타워까지 돌고 돌아서 오르고
여천에서 여수까지 밤새도록 걸어 다니던 병
밤새 홀로 걷다가 꿈속에서도 시를 쓰던 병
개 짖는 소리 멀어지고
지상의 불빛 모두 사라지니
깊은 계곡 물소리가 나를 감싼다
물소리를 짚고 가는 지팡이 소리에
하늘에는 젖은 별빛들이 피어나고
월라봉에서는 노루가 노루를 부른다
유반석에서는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고
달도 보이지 않는데 박수기정에서는
항아가 내려와 샘물 마시는 소리 들린다
‘김광종영세불망비’ 앞에 앉아서 나는
도깨비들의 춤을 보며 물소리를 받아 적는다
휴대폰 메모장에 물소리와 별빛을 받아 적고
다시 하늘을 보니
그 많았던 별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
나는 다시 별빛을 찾아서 계곡으로 돌아가는데
별들은 보이지 않고 동백꽃들만 길가에 내려앉아
깊고도 푸른 물소리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있다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를 읽다가 산책을 나간다. 나는 어떤 시인이 되면 좋을까? 나는 앞으로 어떤 시를 쓰면 좋을까? 나는 최인훈 교수님께 배운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를 생각하며, 처음부터 다시 나의 시를 뒤돌아 본다. 나는 80년대의 시인답게 민중시인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리얼리즘의 시를 지나왔다. 나는 이제 리얼리즘의 시대를 지나 신화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자꾸만 삶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이 온몸으로 나를 다시 불러내고 있다. 가난의 시인 함민복 시인이 나를 부른다. 철근 노동자 시인 김해화 시인이 나를 부른다. 족필의 시인 이원규 시인이 나를 부른다. 섬진강 시인 김인호 시인이 나를 부른다. 주말이장 시인 김도수 시인이 나를 부른다. 어머니 시인 양춘선 시인이 나를 부른다.
양춘선 시인은 장석주 시인도 모르는 시인이다. 양춘선 시인은 나만 아는 시인이다. 양춘선 시인은 시를 발표하지 않은 시인이다. 양춘선 시인은 나의 어머니와 꼭 같은 시인이다. 쓰러지신 아버지를 살리려고 평생 동안, 별과 달을 이고 다니셨던 봇짐장수 어머니처럼. 교통사고로 쓰러져 기억을 잃은 남편을 살리려고, 평생 동안 사람을 살려내는 음식을 만드셨던 양춘선 시인. 나는 지금껏 나의 어머니와 양춘선 시인보다 아름다운 시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양춘선 시인은, 1988년 교육공무원이었던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내가 시인이 되었던 바로 그 해 였다. 기억을 잃은 남편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재활에 좋다는 온갖 싱싱한 야채와 음식을 만들면서 ‘천연 전통식품’을 만드는 장인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나의 산책길 곁에 사는 양춘선 시인을 나는 20년 넘게 지켜보고 있다. 그녀의 삶은 비록 시 한 편 발표하지 않았지만 어떤 시 보다도 아름다운 시이며 아름다운 시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