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종 영세불망비
나의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 나는
불가능을 넘어선 사람, 김광종
선생님을 만나려고 길을 떠난다
감귤꽃과 레몬꽃 향기를 따라서
큰 길을 건너면 퍼물이 나오고
퍼물논을 지나면 개끄리민소가 나온다
개끄리민교를 건너면 월라봉이 나온다
개끄리민소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왼쪽으로 돌아 안덕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도채비빌레에서 보(도)막은소까지
수로을 따라 만들어진 김광종 길을 걷는다
데크길을 걸으면서 정 소리와 망치 소리를 듣는다
김광종 선생님의 땀과 눈물과 웃음소리가 들린다
보막은소 윗쪽에 있는
장군석과 올랭이소(오리소)
고래소와 임금내를 보려면
개끄리민교를 건너 월라봉쪽 길에서 보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나는 장군석은 가끔만 보고
김광종길에서 도깨비들을 자주 만난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김광종 영세불망비 앞에서
김광종 선생님과 같이 도깨들과 함께 춤을 춘다
안덕계곡의 물소리가 도깨비들을 만나 덩실덩실 춤을 춘다
나와 김광종 선생님과 도깨비들이 한 몸으로 춤을 춘다
곁에 있는 월라봉도 덩달아 신이 나서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다
월라봉 뒤에 숨어서 지켜보던 보름달도 덩실덩실 춤을 춘다
오늘은 자꾸만 더 멀리 걸어가고만 싶다
오늘은 자꾸만 더 높이 날아가고만 싶다
도깨들과 춤을 추다보니 나도 모르게 도깨비기 된다
다리를 건너 월라봉으로 간다
월라봉 산책길을 걸어간다
유반석을 지나 동굴진지로 간다
유반석 아래서 푸른 비둘기 소리가 들린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 앉아보기도 한다
안덕계곡 쪽으로 다시 내려와 장군석을 본다
장군석 아래로 휘돌아가는 물길이 아름답다
이어도공화국으로 돌아와 유반석과 무반석을 생각한다
나도 모르게 스스르 잠 속으로 빠져든다
꿈속에서 나는 오늘 김광종 선생님 대신에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을 만난다
김남주 시인께서는 나에게 '남과 북'을 읽어주신다
고정희 시인께서는 나에게 '상한 영혼을 위하여'를 읽어주신다
꿈 밖으로 나와보니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은 보이지 않고
아주 옛날에 헤어졌던 김주남 친구와 고희정 친구가 나를 보고 있다
* 김광종
조선후기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 일대의 수로 개척자.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출생으로 본관이 김해(金海)인 김광종(金光宗)은 1832년(순조 32) 3월부터 1841년(헌종 7) 9월까지 10여년에 걸쳐 오직 자신의 사재(私財)만을 이용하여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의 황개천 바위를 뚫고 약 1만여 평이나 되는 화순마을의 넓은 들에 물을 끌어올 수 있게 수로를 개척하였다. 당시 이 공사에 인부를 대고 자신의 재력을 바친 일은 중국 한(漢)나라의 태수(太守) 소신신(召信臣)의 선정과 버금가는 일로 평가되었다. 김광종의 업적에 대해 『제주향교지』에는 “바위를 뚫어 최초로 농업용수를 개발한 관개농업의 개척자”라고 평가하면서, ‘1832년(순조 32) 수로 공사 착공을 시작으로 10년 만에 1.100미터의 용수로 완공과 더불어 오만평을 개답(開畓)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광종의 수로 개척은 한말(韓末) 채구석(蔡龜錫)의 중문(中文) 벼릿내(星川) 수로 개척과 일제 강점기 때 백창유(白昌由)의 어승생 물을 이용한 애월읍 광령리 수로 개척 업적과 함께 제주 삼대(三大) 수로 개척으로 불린다. 김광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화순리 사람들은 김광종를 전조(田祖)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이후 수로로 혜택을 받은 농지의 주인들이 모여 화순답주회(和順畓主會)를 조직하고, 화순리 수로를 개척한 김광종의 공로비를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5월에 답주회 양시권(梁時權) 회장의 발기로 후손과 합의해 송운옥(宋雲玉)이 비문을 지어 5월 5일에 김해 김광종 영세불망비(金海金光宗 永世不忘碑)를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 황개천[속칭 도채비빌레]에 건립하였다. 30년 후인 1978년에는 한문비가 어렵다는 이유로 당시 화순답주회원과 그의 6대손이었던 제주도 기획담당관 김창진(金昌辰)이 의논하여 원래 비석 옆에 한자를 번역한 비석을 새롭게 세워 관리하고 있다.
* 유반석과 무반석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는 동동네와 섯동네로 나누어져 있다.
옛날 동동네 동쪽 냇가 언덕 위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고, 섯동네 언덕 위에도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글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사는 동동네의 바위를 유반석(儒班石), 힘센 사람들이 많이 사는 섯동네 바위를 무반석(武班石)이라 불렀다. 한번은 외지에서 온 풍수에 능한 사람이 동동네에 머문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동동네 유반들이 섯동네 무반들에게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그 사람은 동동네에 잠시 더 머물렀다. 어느 날 밤 그는 마을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불빛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니 유반석과 무반석에서 나오는 불빛이었다. 무반석에서 나오는 불빛은 크고 밝은 반면, 유반석에서 나오는 불빛은 무척이나 약했다. 그때서야 그는 유반들이 무반들에게 기를 펴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고, 이런 사실을 유반들에게 알려주었다. 유반들은 모여 무반석을 쓰러뜨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반석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그래서 유반들은 무반의 힘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동네에 상이 났다. 상을 치른 두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유반들은 술을 마시는 척 하며 마시지 않는 반면 무반들은 술을 마셨다. 무반들이 술에 취한 것을 확인한 유반들은 술에 취한 무반들에게 힘 겨루기를 제안했다. 이 돌 저 돌을 가지고 힘을 겨루다가 유반들은 무반석을 가리키며 쓰러뜨려 보자고 했다. 지금까지 계속 지기만 했으니 자신들이 먼저 해보겠다며 유반들이 나섰다. 그러나 무반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에 자신이 있는 무반들은 자신 있게 달려들어 무반석을 쓰러뜨려 버렸다. 무반석이 쓰러지자 그 밑에서 청 비둘기가 나와 하늘로 날아갔다. 그 비둘기를 본 무반들은 힘이 빠졌고, 그제서야 자신들이 속은 사실을 알았다. 화가 난 무반들은 유반석도 쓰러뜨리기 위해 동동네로 달려갔지만, 이미 힘이 약해진 그들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 이후로 섯동네 사람들은 동동네 사람들을 당할 수 없게 되었고, 동동네 사람들이 세력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화순리 동동네에는 유반석이 그대로 있다. 한쪽 밑굽이 들려 있고 거기에 받침돌까지 받쳐져 있는데, 유반석과 무반석에 관한 전설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 주는 전설의 징표다.
* 김남주 / 남과 북
해방 직후 이북의 감옥은
친일한 사람들로 우글우글했지
미처 남으로 도망치지 못해서겠지
해방직후 이남의 감옥은
항일한 사람으로 빽빽했지
미처 북으로 넘어가지 못해서겠지
* 고정희 /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홍일표 4월 24일 오전 6:08
해남 삼산면 봉학리와 송정리는 시인의 고향이다. 김남주, 고정희 시인이 바로 그들이다. 두 시인의 아버지는 서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봉학리에서 태어난 김남주 시인은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어 9년 3개월 만에 출감하였으나 6년여를 자유인으로 살다가 1994년 마흔아홉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별세하였다. 이웃 마을 송정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정희 시인은 1991년 마흔셋의 나이에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하여 작고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운명한 두 시인의 유고 시집을 읽으면서 오래 가슴이 먹먹했다. 김남주 유고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고정희 유고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 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