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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an 07. 2023

4. 나에 관하여 1

도박과 우울증 14




인생 일기 (현성, 20190919) 4. 나에 관하여 1 

도박과 우울증 14




4. 나에 관하여 1     


그냥 나에 관하여 내 이야기나 적어야겠다. 가장 먼저 지금의 악마 같은 나에 대해서 적어야겠다. 나는 망가진 사람이다. 아까 옮겨 적은 5억 가량의 빚이 있는 저 한심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보다 더 한심한 사람이다. 저 사람은 도박의 길로 이끈 사람이라도 있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나는 누가 나를 도박의 길로 이끈 것도 아니다. 그냥 스스로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나를 원망한다.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싶던 내가 조용한 곳이 좋아졌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 지금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 몸의 안정과 마음의 안정을 찾고 또 지금은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다. 방금 시청을 다녀왔다. 떡볶이를 먹는데 고구마튀김이 2,000원이었다. 하지만 너무 아까워 한참을 고민했다. 나 자신이 불쌍했다. 더 이상 울고 싶지 않다. 나는 요즘 아는 사람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아까는 멀리서 리은이가 보였다. 나는 못 본 척을 하였다. 지금도 연락을 하고 리은이에게 빚도 없고 그렇지만 나 스스로 아주 불편하다. 그 이유는 아마 스스로에게 아직 떳떳하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 요즘 돈 때문에 생활이 불편하니 돈 때문에 걱정이 없었던 군대 가기 전 20대 초가 떠오른다. 그러다 보니 지금 생각하면 돈이 없어 마음대로 놀지 못했던 나와 달랐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 때 나는 학과대표였다. 1학년끼리 엠티를 가게 되었다. 똑똑히 기억난다. 우리의 엠티 참가비는 35,000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비쌌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죽어도 못 갈 정도의 엠티비는 아니었기 때문에 엠티비에 관해 신경을 조금 덜 썼었나 보다. 한 친구가 물어봤다. 엠티비가 왜 이렇게 비싸냐고. 물론 이유는 있었다. 우리는 소수였고 숙소비가 비싸 최대한 맞추다 보니 35,000으로 책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돈이 없었을 수도 있다. 또 오늘 마주쳤던 사람들 중 나보다 빚이 훨씬 많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돈이 대체 무엇일까. 돈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 수도 강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일까? 시청 술집에서 일할 때 같이 일했던 사장님의 아버지가 60대였다. 사장님의 어머니는 50대였다. 하지만 쉬는 날 없이 매일 일을 하신다. 50대 60대인데 돈 때문에 여유 없이 매일을 산다. 돈을 많이 모으게 되더라도 나중에 보면 인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지 않을까? 사는 것이 뭘까?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으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까? 과연 사후세계는 존재할까? 거기서도 돈이 존재할까? 요즘 래퍼들의 가사는 대부분 돈 이야기이다. 그 솔직하다는 래퍼들이 솔직하게 쓰는 가사들이 돈 이야기이다. 대부분이 돈에 관한 가사들이라고, 진부하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돈에 관한 가사들이다. 나는 평생 얼마나 모을 수 있을까? 내 생각엔 내가 지금 당장 돈에 스트레스를 안 받고 당장 돈 버는 것에 몰두를 한다면 나를 팔아 1년에 1억씩 모을 수 있다. 


돈이 어떤 놈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일단 내 어린 시절부터 망가지기 전의 나까지를 떠올리고 읽고 되짚으며 지금 혼란스러운 머리를 좀 쉬게 해 주어야겠다. 우선 내 기억으로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나는 소심했다. 부끄러움도 많이 탔고 그냥 그저 조용한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인생에서는 나름 중요하고 기쁜 일이 생겼다.

 

처음 5학년이 되고 나서 우리 반 남자들끼리 축구를 했는데 내가 혼자 5골 정도 넣은 것 같다. 아마 그래서 5대 0으로 축구가 끝났던 것 같다. 4학년 때까지의 나는 축구를 할 때도 소심한 면이 그대로 나타났다. 자신이 없어 수비만 했고 공을 잡아도 드리블은 할 생각도 안 하고 무조건 같은 팀 친구에게 공을 넘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갑자기 내가 축구를 5학년 올라가면서 잘했던 이유는 집에서 매일 현동이랑 엄마 몰래 거실에서 축구를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전등도 많이 깨 먹고 (엄마 미안해!) 아래층 아저씨도 자주 올라오게 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축구 실력이 늘었던 것 같다.

 

사실 축구 얘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처음 축구를 하자마자 5골을 혼자 넣으니 반 친구들이 왕 대접을 해주었다. 그때는 축구 잘하는 것이 곧 권력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때부터 아,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때 당시에는 나에게는 맞지 않는 가면이었지만 어떻게든 얼굴을 집어넣고 쓰려고 했던 것 같다. 친구들이 왕 대접을 해준 이후에는 축구를 해도 수비는 절대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공격지역에서만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나름 우리 반의 에이스라고 생각하며 골 넣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또 친구들에게 항상 착하게 대하고 할 말이 있어도 못하던 내가 감정표현이라는 것을 시작했던 때인 것 같다.


그렇게 내게 맞지 않는 가면이 조금씩 맞아 갈 때쯤 6학년에 진학을 했다.

6학년 때의 기억은 정말 행복하다. 정말 친구들이 나를 사랑해줬고 서로 친했고 선생님도 나를 사랑해 주셨다. 지금도 그 친구들과 선생님과 연락하며 가끔 만나기도 한다. 그 선생님이 자식을 낳으셨는데 이름이 현성이다. 아마 내가 정말 좋으셔서 그렇게 지으신 것 같다. 그때는 반장도 하고 공부도 정말 잘했다. 또 정말 하고 싶어 나가고 싶어 하던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 아이들의 추천으로 내가 전교 회장 후보에도 나가게 되었다. 결과는 별로 안 좋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수업시간엔 정말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놀 때는 정말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6학년 그러니까 13살 때 정말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다. 그때 기억은 눈이 정말 컸고 양쪽 눈 크기가 달랐으며 피부는 약간 까만 편이었고 보라색을 좋아했다. 어디선가 여자가 보라색을 좋아하는데 보라색이 잘 어울리면 약간 또라이 라고 들었다. 그 얘기에 걸맞게 성격도 약간 특이했다 정말 밝았고 귀여웠다. 오죽하면 지금 있는 6학년 때의 일기장에 제목이 허리은 이었던 날도 있었다.

 

일화를 소개하자면 나 말고도 리은이를 좋아하던 애가 둘이나 더 있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남자 셋이서 동시에 고백이라며 동시에 자기 마음을 말했다. 여자에 관해서는 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때도 내가 이겼다. 하지만 일주일인가 만나고 헤어졌다. 정말 의아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 같았다. 나중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내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나를 위한답시고 리은이한테 나랑 사귀어주면 선물을 주겠다고 말해서 리은이가 나를 선택해줬던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가 자꾸 선물을 주지 않자 결국 나와 헤어졌던 것이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린 나이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얘기도 웃으면서 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리은이가 언제 어디서든 부를 수 있는 둘도 없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나도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성인이 되고 난 후 13살 때 좋아하던 친구한테 뜬금없이 연락해 둘도 없는 친구로 만든 내가. 생각해보니 리은이는 지금도 참 명랑하고 귀여운 것 같다. 그리고 리은이를 보고 처음 백치미가 이런 거구나 하고 알게 됐다. 한 번은 만경이랑 나랑 얘기하던 도중에 무엇이랑 뭐가 상성이 안 좋다. 이런 얘기를 했는데, 그때 리은이가 “상성이 뭐야????” 라고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봤을 때, 나랑 만경이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던 기억이 난다. 만경이랑 리은이는 내가 리은이한테 만경이를 소개해주면서 알게 됐다. 물론 친구로. 그리고 리은이는 또 은주라는 친구를 소개해줬다. 그렇게 넷이 둘도 없는, 이 아닌 셋이나 있는,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난 이 친구들과 놀 때가 제일 편하고 재밌다. 자고로 남자와 여자 비율이 같을 때 가장 재밌는 법이다. 이왕 친구 얘기가 나온 거 가장 친한 친구 셋에 대해서 간단히 적고 싶다.

 

우선 리은이는 정말 게으르다. 항상 주위 친구들이 리은이한테 택시 좀 그만  타라고 말한다. 정말 가까운 거리도 택시를 탄다. 신기할 정도로. 아마 리은이가 그 택시비를 모았으면 람보르기니 정도는 뽑을 수 있지 않았을까? 리은이는 귀찮은 걸 싫어한다. 약간 나랑 비슷하다. 하지만 리은이는 참 잘 웃고 밝아서 주위 사람들 기분을 좋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큰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몸매가 좋다. 같이 길을 걸어 다니면 가끔 리은이의 몸을 훑어보는 늑대들의 시선이 나까지도 느껴진다. 물론 나는 자주 봐서 감흥이 없다.

 

그리고 만경이, 만경이는 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지금은 같은 대학교 같은 과다. 정말 나와는 다르게 차분한 편이다. 그리고 부드럽다, 물론 성격이. 또 말도 많고 그 많은 말도 누구보다 재밌게 한다. 만경이만큼 말을 재밌게 하는 사람은 못 봤다. 늘 보고 배운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내 성격을 잘 받아준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나에 대해 많이 안다. 그만큼 정말 소중한 친구다. 아마 내 결혼식 축가는 만경이가 부를 것이다.


그다음 은주, 은주는 정말 사랑스러운 친구다. 누가 봐도 사랑받고 자랐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는 표현 없이 은주를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은주가 옆에서 웃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마 집에서 공주님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아주 가끔 공주님인 게 느껴질 때가 있다. 조금은 안 좋은 쪽으로.

 

친구들 얘기가 너무 길어진 것 같다. 이제 다시 나에 관해 써야겠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게 행복했던 6학년 생활이 끝이 나고 나는 한라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입학하고 나서는 적응이 잘 안 됐다. 또 한창 다들 사춘기인 나이라서 그 속에 있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정말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나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뭐든 신경이 쓰이고 당당하지 않았다. 다시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왕따를 당한다거나 친구가 없던 것도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가장 암울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1년 전에는 하나도 무서울 게 없던 아이가 갑자기 바뀌어버린 환경 때문에 너무 놀랐던 것 같다. 무서운 친구들도 생겼고 성에 대해서도 눈을 뜨기 시작했고 공부도 어려웠다. 그래서 정말 학교-집-학교-집 이 생활을 반복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중학교 때 암울하게만 지낸 것은 아니다. 중학교 올라가고 나서부터는 축구를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야구를 했다. 중학교 때 처음 야구 규칙도 알게 되고 직접 해보면서 친구들도 생기고 좋아하는 운동이 하나 더 생겨 좋았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중학교 때 원어민교사가 있었다. 이름은 Eric Reese였는데 야구선수 출신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랑 야구도 같이 하고 무엇보다도 장비도 지원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타국에 와서 생판 처음 보는 외국인 아이들에게 베풀어 줬다는 게 정말 고맙다. 특히 내가 주로 포수를 했는데 마스크 없이 야구를 하다가 안경을 한 두세 번 부러트렸다. Reese가 그걸 보더니 바로 포수 마스크를 사다가 나에게 갖다 주었다. 정말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만날 수 있다면 Reese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끔 야구가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정말 중학교 시절에는 나 스스로 방황을 많이 한 것 같다. 밤에 집에서 자기 싫어 차에서 자고 싶었던 적도 있고, 이유는 뚜렷하게 없었지만 살기가 싫었던 적도 있다. 그리고 정말 예민해서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늘 폭발했다. 그때 난 공부를 못했다. 그래서 결국 중학교 3학년 때 이제 고등학교 진학을 하는데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기 힘든 성적이 되었다. 솔직히 나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그렇게까지 가고 싶지 않았고 그냥 제주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울면서 너무 속상해하며 나에게 전학을 갔다 오자는 부탁을 했고 결국 나는 중학교 때 육지로 전학을 갔다가 거기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하고 다시 제주도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을 오는, 소위 말하는 낙하산이 되었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 말에 안산 별망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었다. 이모 집에서 사는 것도 불편했고 제주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친구들과 지내는 것도 불편했고, 무엇보다 처음 얼마간 나 혼자 다른 교복을 입고 다니던 게 너무 힘들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별망중학교 교복은 회색이었는데 한라중학교 교복은 검은색이었다. 그래서 너무 눈에 띄었다. 또 교복에 한라산도 그려져 있어서 다른 친구들이 놀리기도 하였다. 쉬는 시간에 다른 반 친구들이 제주도에서 전학을 온 게 신기하다며 날 보러 우리 반으로 오기도 하였다. 그때 당시에는 관심을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게 관심을 많이 받는 게 좀 힘들었다. 내가 체구도 작고 강해 보이는 상이 아니어서 나를 괴롭히려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다.


또 거기는 남녀합반이어서 정말 많이 신경이 쓰였다. 안산에 있었을 때는 정말 자주 울었던 것 같다. 정작 실제로 안산에 있던 날은 길지 않았지만, 정말 길게 느껴졌고, 지금 생각해도 짧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안산에서 신길고등학교라는 학교에 진학했는데 하루 갔지만 정말 기억이 남는 게 다들 너무 무서웠다. 몸에 피어싱 한 친구들과 문신을 한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무서웠다.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게 점심 딱 한 끼 먹었는데, 밥이 정말 맛이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어찌어찌해서 다시 제주도로 전학을 오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4 지망이었던 대기고등학교가 걸려, 학교를 멀리 다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대기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 나에게는 정말 잘된 일 같다. 물론 나 때문에 엄마가 많이 고생했다. 3년을 매일 학교로 데려다주고 또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그 고생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

 

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애들도 내가 낙하산이라는 것을 다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를 약간은 무시했었던 것 같다. 남고는 그야말로 약해 보이면 무시받고 자신만의 무기가 없으면 무시당하는 동물의 왕국 같았다. 그래서 공부도 잘하지 않았고 체구도 작았던 나는 나만의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방법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말을 참 잘했다. 또 낯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못된 말 일지라도 가감 없이 했고, 나보다 약해 보이면 놀리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된다. 성인이 되고 난 후부터는, 생각나는 내가 잘못을 저지른 친구들에게 일일이 찾아가서 술 한 잔 사주며 사과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더라도 아직 마음에 후회는 남아있다.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남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속상하다. 그때는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이런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이고, 이 경험을 통해 두 번은 실수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고, 잘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생활은 나름 정말 재미있었던 것 같다. 코피가 날 정도로 공부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좋은 친구들과 온종일 같이 있는 것만 해도 즐거웠다. 그 무렵엔 한동안 안 하던 축구를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중학교 때 야구만 해서 인지 아니면 애들과 체격조건이 차이가 나서인지 예전만큼의 기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즐거웠다. 남자들끼리 땀 흘리며 승부를 겨룬다는 것도 좋았고, 내가 열심 운동을 한다는 것도 좋았다.

 

나는 남고에 다니면서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여자친구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한 번도 경험은 없었지만 늘 자신이 있었다. 누구든 꼬실 수 있는 자신이.

 

그렇게 대학교에 가야 될 나이가 되었고 수능을 보고 난 후 제주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제주대학교는 가군 다군 두 개 쓸 수 있었는데 나는 가군 다군 둘 다 일어일문학과를 쓰겠다고, 그때 당시 고3 담임선생님에게 생떼를 부렸다. 선생님은 극구 만류를 하셨다. 안 붙을 거라고 하시면서 나를 말리셨다. 그런데 나는 겁도 없이 하나는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 떨어지면 재수하지 뭐 이런 마음으로 가군 다군 둘 다 일어일문학과에 지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렇게 예비 10번으로, 예비 11번인 내 친구 현석이와 같이 일어일문학과에 붙게 되었다.


그때 예비번호가 나온 뒤 현석이는 100만 원을 줄 테니 혹시 나만 붙으면 양보해 줄 수 있냐고 진지하게 말했던 게 기억이 난다. 지금 보면 둘 다 붙은 게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대학교 입학을 했고 정말 열심히 학교생활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 것 같다. 정말 학교가 내 무대인 것 같았다. 너무 재밌었고 술자리도 사랑했고 사람들도 사랑했다. 아마 전에도 말했지만 남자 여자 비율이 맞아서 내가 더 신이 나 무대를 즐겼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즐기고 있다. 복학준비를 하면서 1학년 때는 학과대표를 했고 2학년 때는 인문대학 학생회를 했다. 또 지금은 우리 과 학생회를 하는 중이다. 학생회 생활을 하면서 500명 앞에서 MC도 봐 봤고 1,300명 앞에서 춤도 춰 봤고 많은 여자도 사귀어봤고, 정말 즐길 건 다 즐겼다.  그렇게 인문대학교 안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지금은 인문대학 복도를 지나가면 애들과 인사하느라 지친다. 물론 그렇게 자랑할 게 아닌데 자랑 중이지만 난 자랑스럽다.

 

인문대학교 안에서는 인문대학 사람들이 말하는 인문대학 3대 또라이가 있다. 철학과에 한 명 사회학과에 한 명 일어일문과에 한 명, 물론 일어일문학과에 한 명은 나다. 그 또라이 라는게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게 긍정적인 뜻이다. 분명히. 그만큼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 난 더 신나서 내 끼를 발산하고 다녔다. 이런 또라이가 성공을 한다면 정말 멋진 일 아닐까? 이런 점이 나를 더 힘내게 해주는 것 같다. 그렇게 대학교 생활을 하면서 나는 정말 내 장점을 알게 되었고 내가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큰 원동력이 생겼다. 또 군대도 전역하니 정말로 여기저기서 제주대학 총학생회든 인문대학 간부들이든 나를 많이 찾아준다. 나는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를 찾아줄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럴 때 내가 가진 매력을 알게 되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물론 이제는 앞으로 뭘 먹고살아야 할지도 같이 생각을 많이 하므로 머리는 아프지만 그래도 지금 나는 행복하다. 여기까지 대부분의 대학생활 이야기는 지금 현재 많이 변했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주고 또 내가 사람들을 찾았었다. 지금은 아마 내 연락이 무서울 것이다. 혹시 돈을 빌려 달라 할까 봐 정말 무서울 것이다. 나에 대해 돌아보고, 나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객관화해서 나를 보고 싶지 않다. 무섭다.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보일지 말이다. 지금은 또 책을 읽고 싶다. 하지만 책이 없다. 도서관엘 가야겠다. 가까운 도서관이 어딘지부터 찾아봐야겠다.


요즘 사업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 요즘 개나 소나 사업하겠다고 다 덤비는데 함부로 덤비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업은 잘되고 나서도 머리가 아플 것 같아 걱정이 된다. 하지만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을 할 수 있다면 하고 싶다.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벌써 걱정이 된다. 지금 심정으로는 따뜻한 국밥이 먹고 싶다. 국밥이라 하니 생각이 난다. 내가 자취하는 곳 옆에 6,000원짜리 국밥을 판다. 밥도 무한리필이다. 조만간 한 번 가야겠다.





화상으로 얼굴 전체가 녹아내린 아빠에게 사랑한다며 ‘뽀뽀’하는 딸, 그리고 찾아온 기적


우리는 모두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시련들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사람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혹은 다양한 이유로 버티고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있죠.


오늘은 달라스 웨인즈라는 한 남성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2008년, 미국에 사는 달라스 웨인즈는 교회에서 페인트 작업을 하던 중 고압 전선에 걸려 치명적인 감전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한꺼번에 고압 전류를 받아낸 웨인즈는 3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깨어났지만,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웨인즈가 아니었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불에 타버린 웨인즈 몸에는 치명적인 상처들이 남았고 얼굴 전체가 녹아내려버렸습니다. 눈은 물론, 코도 녹아버려 더 이상 앞을 볼 수도 코로 숨 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눈물을 짓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웨인즈의 딸 ‘스칼렛’이었습니다. 얼굴이 녹아내려 변해버린 웨인즈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딸 ‘스칼렛’은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웨인즈는 자신의 기괴한 모습에 좌절하고 있었지만 한없이 사랑해주는 딸을 보며 웨인즈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심하게 됩니다.


바로 얼굴이식을 받기로 한 것이죠.  이 수술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고 두 번 다시는 딸을 못 만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수술이었습니다. 


하지만 웨인즈는 딸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제 모습으로 인해 친구들에게 놀림당할 것을 생각하니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수술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얼굴 이식 수술은 30여 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참여해 무려 17시간이나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수술은  성공으로 끝났고 마취에 깨어난 웨인즈는 깨어나자마자 펑펑 울었습니다.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코로 숨을 쉬는 순간이었죠.


여전히 앞을 보지는 못했지만 수술 후 처음 만나게 될 딸 생각에 그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죠.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얼굴이 녹아버린 채로 평생을 살 수 도 있었어요. 딸이 없었더라면…”,라고 말했습니다.


웨인즈는 “딸의 뽀뽀를 보고 느끼고 싶어 수술을 결정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한 딸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싶다”라며 딸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이어 ” 비록 얼굴 형체는 잃었지만, 사고 이후에 너무나도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 , ” 가족들이 더 돈독해졌고 저 스스로 훨씬 상장하게 되었다. 나는 더 멋진 아빠가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스칼렛 역시 재건 수술에 성공한 아빠의 얼굴을 보자 다시 한번 뽀뽀하며 “잘생긴 아빠”라는 칭찬으로 화답했습니다. 


웨인즈는 치명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역경에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현재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했는데요. 자신의 아버지를 한 없이 사랑하는 딸 스칼렛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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