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스레드 : Phantome Thread

#29. movie sketch

by Yearn


사랑에 관한
깊은 통찰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내용과 흐름이 비슷한 데다 사유의 깊이가 '장르'를 핑계 삼아 점점 얄팍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얕고 쉽게, 화려하고 빠르게, 요즘 영화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식인 거 같습니다. 보는 동안은 즐겁지만 끝이 훤히 보이고, 어떤 감상도 남기지 않아 뒤돌아서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런 영화들이 늘고 있는 거 같아요. 곳곳에서 일어나는 명작 재개봉 바람은 요즘 영화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영화적인 것에 대한 관객의 보상심리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팬텀 스레드>는 오랜만에 만나는 영화 같은 영화입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넓은 땅에 빌딩 여러 개를 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의 첨탑을 높게 쌓는 방식을 택합니다. 높이 쌓으려면 토대가 단단해야 하죠. 영화는 인물과 배경을 충분히 제공하고 그걸 바탕으로 사건을 하나씩 더해 갑니다. 탑이 높아질수록 인물의 감정은 복잡해지고 관객이 보는 풍경도 달라집니다.



<팬텀 스레드>



이 영화는 굉장히 효율적이지만 그래서 보는 내내 집중해야 합니다. 인물의 작은 행동과 표정으로 이야기에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거든요. 전개에 불필요한 정보는 전하지 않아요. <팬텀 스레드>의 오프닝은 주인공 레이놀드의 성격을 한 번에 보여줍니다. 대사는 한마디도 없지만 영화의 주요한 배경과(레이놀드의 집), 인물의 캐릭터(소리 없이 주전자의 차를 따르는 레이놀드)를 관객에게 확실히 각인시키죠. 여자 주인공 알마가 등장하고 레이놀드가 그녀의 소음을 견디지 못할 때 관객은 영화의 오프닝을 떠올리게 됩니다. '맞아, 저 남자는 여자가 오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하루를 조용히 보내는 사람이었지.'



<팬텀 스레드>



레이놀드와 알마가 식당에서 만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는 단순히 음식을 주문하고 웨이트리스인 여자는 주문을 받을 뿐이지만 바라보는 시선, 빨개진 볼, 배우의 표정 밑에 무수한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레이놀드가 알마에게 느끼는 감정을 보여주는 장면도 마찬가지죠. 디자이너인 그는 드레스를 만들 때 절대로 옷 입은 여자의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옷을 향해있죠. 그런 그가 패션쇼를 하는 동안 문구멍 밖으로 유일하게 '바라본' 사람은 알마 뿐이었습니다. 영화는 이야기 속 인물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감정을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아주 조금씩 힌트를 주는 거죠. 사실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요.



<팬텀 스레드>



<팬텀 스레드>는 치정극을 가장한 사랑 영화입니다. 사랑으로 시작해 치정으로 치닫는 전개에는 익숙하지만 위험해 보이는 관계가 사랑으로 변하는 과정은 굉장히 낯설게 느껴집니다. <팬텀 스레드>가 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건 이 영화의 반전이자 이야기를 끝맺는 방식입니다. 레이놀드는 마치 생전 이브 생 로랑을 보는 듯합니다. 온화하고 우아하지만, 예민하고 인간미가 결여된, 평생 단 한 번의 행복도 누려본 적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죠. 그리고 그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여인 알마는 그와는 정 반대의 사람입니다. 무모하고 자기 마음에 충실하며 인간적입니다. 그녀는 그전까지 레이놀드의 근처를 맴돌았던 여인들과 다르게 쉽게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알마라는 여인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녀의 광기는 점점 심해졌고 레이놀드를 향한 지나친 헌신은 정신병의 징후처럼 보였어요.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서로에게 길들여져 가는 과정이죠. 알마는 곁을 내주지 않는 레이놀드의 사랑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씁니다. 그가 아파 쓰러지거나 마음이 괴로워 무장해제 된 순간마다 그의 삶에 조금씩 침투하고, 기회가 오지 않으면 일부러 쓰러지게 만들었죠. 레이놀드는 그 기이한 시너지에 굴복하고 맙니다.



<팬텀 스레드>



<팬텀 스레드>는 굉장히 상징적인 영화입니다. 문제를 지닌 두 남녀가 만나 각자의 불완전함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놀즈는 옷이 아닌 알마의 눈을 바라봅니다. 그 씬은 영화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죠. 레이놀드는 알마의 속임수를 알면서도 기꺼이 독버섯을 먹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이성을 초월한 무언가가 느껴져 감동적입니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를 이끄는 것. 그게 사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팬텀 스레드>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은퇴작이기도 합니다. 그는 원래도 작품을 까다롭게 고르는 걸로 유명해 경력에 비해 참여 작품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은퇴야 언제든 번복할 수 있는 거지만 (스티븐 소더버그를 떠올려봅니다) 그가 은퇴 이유를 '아티스트로써의 사명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라고 말한 걸로 보아 아마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 같습니다. 좋은 배우와 좋은 감독이 만나는 경우는 의외로 흔치 않은데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그의 연기 인생 후반에 쟁쟁한 감독들을 만나 엄청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폴 토마스 앤더슨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 이상은 없다 싶을 정도의 궁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니엘 루이스 역시 효율적으로 연기를 전달하는 배우니까요.



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 배우 : 다니엘 데이 루이스



<팬텀 스레드>에서 그는 세상 핸섬한 나이스 가이와 예민한 강박증 환자를 자유자재로 오갑니다. 스콜세지 감독의 <순수의 시대>에서 맡았던 아처 역할처럼 큰 소리를 내는 장면은 하나도 없지만 시선과 표정만으로 관객은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아주 적은 재료로 만든 화려한 만찬 같아요. 경제적인 감독과 경제적인 배우의 만남이죠.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이제 와서 트로피 하나 더 받는 게 뭐가 중요하겠냐만은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지 못한 건 안타깝습니다. <팬텀 스레드>의 레이놀드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자기 옷처럼 꼭 맞는 배역이었거든요. 그는 예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 그냥... 시끄러운 게 싫어요. 제가 정말로 집중해야 할 일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거든요.'


<팬텀 스레드>



그는 마지막 작품인 <팬텀 스레드>에서 자기와 가장 닮은 인물로, 늘 그랬듯 최고의 연기를 선사합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알마는 레이놀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너무 잘생겼어요.'


올해 들어 가장 공감한 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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