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movie sketch
끝을 아는 이야기
<저니스 엔드>는 포스터부터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전쟁영화입니다. 예고편도 익숙한 전쟁영화의 문법을 사용하죠. 그런데 실제는 이전의 전쟁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전쟁영화가 물량전을 기본으로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저니스 앤드>는 전쟁 당시 그 한가운데 있던 사람들의 생활을 통해 전쟁이 어떤 것인지를 그리려 합니다. 1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최전방 대피호는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지뢰밭이었습니다. 운 좋게 내가 교대한 후에 공습이 시작될 수도 있고 내가 있는 이 순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겁니다. 오랜 기간 극도의 긴장상태에 노출된 군인들은 차라리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니스 엔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을 기다리며 매일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저니스 엔드>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오스본입니다. 그는 군인들 중 가장 연장자로 그곳의 리더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죠. 그의 옆에는 뒷모습만으로도 한참 어려 보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영화는 주인공인 스탠호프 대위가 등장하기 전 관객에게 그에 관한 두 가지 소문을 전달합니다. 전쟁 전 다정한 친구로 기억되었던 그와 다른 부대원들마저도 기피할 정도로 주정뱅이인 현재의 모습을요. 스탠호프는 최전방 대피호의 책임자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전쟁 전후로 나뉩니다. 마침내 등장한 스탠호프는 소문에 걸맞게 히스테릭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대원들을 들들 볶고 술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가 의지하는 유일한 인물은 나이와 경험으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오스본 중위뿐입니다. 오스본은 이 전쟁이 젊은 스태호프에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그의 히스테릭함을 이해합니다.
불안정한 스탠호프에게 자기를 찾아온 친구 롤리는 또 하나의 짐이자 달라진 자신을 깨닫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아직 그곳을 경험하지 못한 롤리의 의욕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뭐야 들어온 지 5분 됐어?’ 최전방 대치 상황에서 스탠호프를 비롯한 대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괜찮은 척하는 것뿐입니다. 트로터는 맛도 없는 음식의 재료나 내일은 뭘 먹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며 하루를 보내고 스탠호프는 술로 불안감을 잊으려 합니다.
제목처럼 영화는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군대는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조직입니다. 철저한 수직구조로 불복종이란 없습니다. 위에서 결정을 내려줘야 하기 때문에 계급이 높을수록 오래 살아남아야 하죠. 한마디로 일반 병사는 총알받이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대위인 스탠호프는 수요일의 게릴라 작전에 직접 나설 수 없었기에 가장 의지하는 오스본과 친구 롤리를 사지로 보내야 했습니다. 죽으러 가라는 명령이 억울할 법도 한데 오스본은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그는 아는 듯합니다. 순서의 차이일 뿐 이 일은 그곳에 있는 모두가 겪게 될 일이라는 것을요. 마지막 편지를 쓰며 오스본은 말합니다. '나는 어느 정도 살았지만 이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운이 없는지 알지 못해.' 그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이미 이러한 일을 여러 번 겪었을 스탠퍼드는 친구인 롤리가 자기를 찾아 부대로 왔을 때 반갑다는 인사조차 할 수 없었고 술로도 극복이 안 되는 날이면 주위 사람들을 들들 볶아댔습니다. 스탠호프는 살아 돌아온 롤리에게 날것의 감정을 부딪히며 괜찮을 수 없는 일도 있다고 외칩니다. 오스본이 죽은 다음날은 실제 공습이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스탠호프는 유일하게 따랐던 사람의 죽음을 반나절 만에 억지로 삼켜야 했습니다.
장교들이 묵는 지하벙커는 그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계단을 마지막으로 오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쟁이 시작되고 롤리가 죽지만 전쟁은 한 명의 죽음에 슬퍼할 시간 따윈 주지 않습니다. 롤리가 죽자마자 한 병사가 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병사에 대한 소식을 전해오죠. 스탠호프는 눈물이 채 흐르기도 전에 마지막으로 벙커의 계단을 오릅니다.
<저니스 엔드>의 엔딩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공습이 끝나고 폐허가 된 최전방 지대를 살피는 실루엣이 등장합니다. 관객은 습관적으로 그가 살아남은 주인공일 거라 기대해보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최전방에 있던 그들은 남김없이 모두 죽었습니다. 롤리의 누나에게 도착한 편지에는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저니스 엔드>는 전쟁 장면 없이 전쟁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곧 죽을 그들이 전선을 지켜라!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장면은 전쟁의 허망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떤 시대에 태어나 불운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소망이 소박했기에 더 안타깝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