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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Dec 25. 2018

[브런치 무비 패스] 그린북

#44. movie sketch


가짜 같은
진짜 이야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없다고들 합니다. 스토리텔링의 역사가 길어진 만큼 모든 이야기는 다 어딘가에 있던 것들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의외로 다르지 않고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론가들의 별점이 보통 관객들과 다른 것은 그들이 더 많은 레퍼런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신박한 어떤 이야기도 저장소가 훨씬 넓은 전문가들에게는 지겹도록 봐온 이야기이거나 어떤 영화를 양심도 없이 복제한 영화이기도 한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이 잘 보이지 않는, 특히 결말이 예상되지 않는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곤 합니다. <반지의 제왕> 아르곤으로 유명한 비고 모텐슨과 <문라이트>에서 소년의 든든한 지원자를 연기한 마허 샬라 알리가 열연한 <그린북>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흑인과 백인의 우정을 다룬 로드무비라면 포스터만으로도 시작부터 결말까지 예상 가능하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북>은 관객을 영화 속에 머무르게 합니다.



<그린북>



그린북이란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지역을 여행할 때 흑인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이드북입니다. 많은 장소가 흑인 출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흑인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들어갈 수 있는 숙소와 레스토랑이 어디인지 알려줘야 했던 겁니다. 노예제도는 끝이 났지만 흑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던 그 시절. 당시의 인종차별은 더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린북> 속의 인종차별은 <노예 12년> 같은 차별이 아닌 좀 더 요즘 시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집에 불러 문화인 인척 하고 싶어 하지만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화장실에는 들일 수 없는 그런 것 말이죠. <그린북>은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에 흑인 주인공 돈 셜리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 돈 셜리(마허 샬라 알리)



<그린북>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편편한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주인공 돈 셜리는 일반적인 흑인 문화권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으로 고등교육을 받아왔고 금전적으로 상류문화를 접하며 클래식을 공부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동성애자죠. 동성애가 백인들의 문화라고 생각하는 흑인들은 게이에 대한 차별이 더 심하다고 합니다. 돈 셜리는 흑인 문화에 소속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흔히 떠오르는 교육받지 못하고 금목걸이를 찬 다혈질 인물들과는 접점이 없어요. 그러나 피부색 하나만으로 백인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지도 못합니다. 늘 완벽하게 차려입고 예의 바른 말투를 사용하며 우아한 손짓을 하는 흑인 캐릭터는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간 영화에서 흑인 캐릭터를 얼마나 단순하게 사용해 왔는지도 느끼게 됩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돈 셜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자진해서 남부로 투어를 떠납니다. 


 

<그린북> - 돈 셜리



또 한 명의 주인공 토니 립은 흑인이 사용한 컵을 쓰레기통에 몰래 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백인이지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죠. 남부 투어 기간 동안 돈 셜리와 토니 립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지녔던 고정관념을 깨나 갑니다. 돈 셜리는 남부에서 그동안 받지 않을 수 있었던 인종차별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더 높은 인격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토니 립은 부당함에도 인격적으로 반응하고자 노력하는 돈 셜리의 모습에 감동합니다. 나중에는 돈 셜리가 당하는 부당함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우정을 쌓아갑니다. <그린북>의 로드무비 스타일은 영화의 주제와 굉장히 잘 어울립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니까요. 영화는 현명하게도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별 장벽인 빈부격차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토니 립은 종종 돈 셜리에게 그가 얼마나 성탑 위에 사는 사람인가를 상기시켜주려 합니다. 돈 셜리가 느끼는 인종의 벽 못지않게 가난의 장벽도 넘기 힘들다고요.



<그린북>



<그린북>은 익숙하다 못해 전통적이기까지 한 버디무비이지만 기본에 충실한 주제로 큰 감동을 선사합니다. 감동실화라는 말은 이제와서는 아무런 감동 없는 공식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분명 보기 드문 희귀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보태 만들어진 <그린북>의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마음속에 따뜻하게 스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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