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 끝난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
양조사로 일할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낭만적이다”였다. 직접 맥주를 빚는다는 것, 내 손끝에서 술이 만들어진다는 것. 확실히 매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낭만은 아주 잠시뿐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청소와 세척,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문제들로 채워진다.
현장의 문제는 늘 예고 없이 발생한다. 늘 같은 공정을 지켰음에도 유난히 맛이 튀거나, 똑같은 레시피인데 지난번과 결과가 다르다. 손님들은 “오늘 맥주 맛이 다르네요, 더 맛있어요”라고 칭찬하지만 양조사들은 등골이 서늘해진다. 의도하지 않은 변화는 성공이 아니라 사고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업계에서는 관습적으로 ‘손맛’이나 ‘감’이라는 단어를 썼다. “오늘은 효모 컨디션이 좀 괜찮네”, “이게 크래프트 맥주의 매력이지”. 처음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그 말이 핑계처럼 느껴졌다. 설명할 수 없는 맛을 ‘손맛’이라고 뭉개버리면 다음번에도 운에 맡겨야 한다. 재현할 수 없는 결과는 기술이 아니고, 원인을 모르는 성공은 데이터가 아니다.
나는 그 불확실함이 싫었다. 맛있는 맥주를 만드는 것보다 ‘왜 맛있는지’, ‘왜 맛이 변했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맥주가 감각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는 게 답답했다. 내가 다루는 효모와 재료들이 어떤 화학적 반응을 거치는지 과학적으로, 숫자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양조장을 나왔다. 지금 나는 양조장의 펌프 소리 대신, 연구실의 환풍기 소리를 들으며 일한다. 이곳은 낭만이 없는 세계다. 대신 명확한 데이터와 논리가 있다. ‘적당히’ 라거나 ‘느낌상’ 같은 말은 통하지 않는다. 잔당이 정확히 몇 g/L인지, 발효 중에 생성된 향미 분자는 몇 ppm인지. 오직 검증된 사실만 남는다.
누군가는 묻는다. 현장의 생동감이 그립지 않냐고. 언젠가는 자신만의 양조장을 만들고 싶지 않냐고. 물론 그립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건조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 감각으로 배운 맥주를 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 운이나 감이 아니라 정확한 메커니즘으로 맥주를 이해하는 과정.
그때 답할 수 없었던 그 수많은 질문들. 이제는 막연한 감각이 아닌, 명확한 과학의 언어로 그 빈칸들을 하나씩 채워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