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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깊숙히 존재하는 악을 대면할 때.

오늘 한 유명강사의 강의 영상을 보았다.

강의 중 일부 내용이었던,

"내 안의  '악'의 모습을  마주할 때 착한 사람들은 그만 삶을 놓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내 심장을 울리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규율과 규칙을 배우며  도덕을 논하며 해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를 배우며, 우리는 어쩌면 어려서부터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지도록 교육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좋은 사람이고, 사회적으로 늘 호인이어야만 한다.'라는  강박 관념에 쌓여, 누군가에게나 존재하는 자신 안에 있는 '악'에 대한 당연한 '부정'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5살 딸아이는 제법 컸다고 요즘 만나는 친구들이나 동생들에게 꽤나 훈계 중이시다.

줄을 순서대로 서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등등......

하지만,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너나 잘 하세요.!"란 분위기이다.

훈계는 늘 쉽고 잘못에 대한 인정은 아이나 어른이나 늘 힘든 법인 듯하다.

기를 살려주고 긍정적인 아이로 자라게 해준다며, "아이 착해, 네가 최고야!.^^"로 시작된 교육은 어느새  늘 착하고 규율을 잘 지키고 양보해야만 사랑받는 존재로 자라도 록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커갈수록 내면의 소리보다는 주변의 반응에 민감하도록 교육된 것 같다.

그리하여 내 안의 깊은 바닥에 깔려있던 작은 '악'의 모습을, 누군가가 어떤 사건에 의해 들춰낼때 보통사람이라면, 적잖이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인 듯싶다.


또한, 강의 도중 '결혼'이라는 제도가 '내 안의 악을 만나는 일'이라는 농담 섞인  이야기를  덧붙여 주신 강사님의 예가 시원스럽게 다가왔다.


'선악설', '선성설'을 떠나서 우리에게 모두 있는 '선과악'의 모습 중에서 도덕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자제와 내면적 갈등의 고민 끝에 이성적인 판단으로 늘 되도록이면 악의 모습을 잠재우려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새 불쑥 자라나 통제되지 못한 채, 본인도 모르는 악한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는 순간이 오게 되면, 너무나 꽁꽁 감춰진 채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에 몹시 당황하며 죄책감이 커다랗게 다가오며, '내게도 이런 모습이......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하며 스스로도 큰 충격에 빠지곤 하는 것 같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마주하는 시간!


마음이 착한 사람일수록 충격  흡수는 당연히 어려울 터.  작은 자신의 악한 모습에도 큰 충격을 받았던 정치인과 그분과는 상대적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혀 충격을 전혀 모르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마주하는 이 시점에서 나는 다시 질문하고 싶어 졌다.


이러한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교육을 시켜야만 하는지를!


배려하고 사회적 약속과 규율을 지키자고 약속하고 배운 그대로 적용되고 인정되고 그것이 당연한 사회가 온다면 정말 좋겠다.

누구나 희망은 품을 수 있다.

멀지만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소리칠 수 있다.

작은 하나하나의 외침이 모여 커다란 울림을 만들 수 있으리라 나는 굳게 믿는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아진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를 보태는 일!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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