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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bbers Jan 03. 2021

성장은 지겹다

-김치 국물 닦아주는 내 베프-

초등학교를 옮기자 활발했던 내가 다시 소심해졌다. 첫날엔 아무와도 얘기를 하지 못했다. 다른 애들은 어느 정도 서로서로 친한 느낌이었다. 그 사이를 들어가자니 너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막막했다. 학교가 끝나고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바로 엄마한테 가서 불평하려고 했다. 그런데 거실에는 못 보던 사람들이 있었다. 한 부부였는데, 한국인들 같았다. 아 한국말을 하셨으니 한국분들이셨다. 엄마 아빠와 얘기 중이셨는데 내가 들어오니 웃으며 나를 반기셨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 옆에서 어떤 여자애가 나타났다. 놀라서 쳐다보는데, 나랑 비슷한 나이 같았다. 그제야 소개를 들었다. 이름은 나랑 비슷한, '예은'이었다. 김예은.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나이에,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단지 반이 달라 못 만났을 뿐. 미국은 중학교 때까지는 한국과 비슷하게 각자의 반이 있고, 점심시간에는 섞여서 다른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말에 갑자기 행복해졌다. 적어도 점심시간 때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친구가 생긴다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예은이는 나를 보더니 웃었다. 웃고 있는 사이에 이빨 사이에 딱 두 개가 비어있는 걸 봤다. 내가 내 이빨에 똑같이 비어있는 위치를 손가락으로 탁탁 쳐 보이자, 예은이가 '빠졌어'라고 말한 뒤 웃었다. 웃는 게 너무 이쁜 아이라 나도 같이 웃었다. 둘은 그렇게 어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예은이는 성격이 활발한 건 아니었지만 나랑 잘 맞았다. 같이 노는 게 지루할 틈이 없었다. 대화도 끊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물론 대화라 해봤자, '그 숲엔 진흙이 많아서 술래잡기 하기가 불편해' 정도였지만.


예은이와 친해지고 학교생활은 다시 평탄해졌다. 처음엔 점심시간에만 설레 하다가 나중에서야 반 아이들과 친해지자, 학교 가는 것이 행복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 초등학교는 점심시간에 애들이 집에서 가져온 런치박스를 열어 밥을 먹는다. 보통의 미국애들은 점심이 그리 다양하지는 않다. 채소라 하면은 브로콜리나 샐러리가 제일 자주 보였고, 주로 메인은 샌드위치, 그리고 거의 모든 애들은 간식으로 미니 오레오를 가져왔다. 하지만 내 런치박스는 달랐다. 엄마는 한식이 가장 건강한 음식이라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내 런치박스를 열면 항상 밥과 반찬이 있었다. 난 매일 집에서 먹던 거였기에 개의치 않아했다. 그런데 그날 점심시간에 런치박스를 여는데, 내 옆에 있던 남자애가 얼굴을 찡그렸다. 열어보니 김치 국물이 온 밥과 반찬에 침투하여 새어있었고, 그 냄새 때문에 그 아이는 코를 잡고 있었다. 예은이도 그걸 보더니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온 런치박스가 빨간색이었고, 냄새까지 났다. 갑자기 다른 애들에게서 '너 런치박스에서 냄새나', '혹시 잘못 싸온 거 아냐?', '설마 저걸 먹겠다는 건 아니겠지?' 등등의 말소리가 들렸다. 너무 창피했다. 그때는 온갖 생각들과 원망이 내 머릿속을 무자비하게 채웠던 것 같다. 순간 나는, 김치를 싸준 엄마, 넘쳐흐르는 김치 국물을 지탱하지 못한 나의 쓸모없는 런치박스, 새어 나오는 냄새를 다잡지 못해 결국 들키게 한 나의 런치백, 그리고 심지어, 김치 국물을 흡수하지 못한 밥까지 원망스러웠다. 나는 황급히 런치박스를 닫고 화장실로 가서 빨갛게 물든 내 손을 씻고, 냄새를 씻었다. 따라 들어온 예은이도 내 런치박스를 같이 닦아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괜찮아, 나도 몇 번 김치 싸왔었어. 그래도 다음날이면 애들은 금방 잊어버려'라고 하며 날 안심시켜 주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 많이 생각을 안 했지만, 날 창피해하지 않고 내 편을 들어준 예은이를 만난 건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이다. 런치박스를 다 닦고, 어쩔 수 없이 물과 섞여버린 내 점심은 먹을 수 없어 버려 버렸다. 예은이는 나에게 자신의 미리 오레오를 주었다. 그걸 받는 나는 겉으론 썩쏘를 짓고 있었지만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었다.


집으로 도착한 나는 엄마에게 말할까 생각했다. 그냥 다른 애들처럼 평범한 점심을 먹고 싶다고 말할까 고민하던 중에, 식탁 위에는 스팸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뒤돌아서 나를 봤는지, '햄 사 왔는데 내일은 네가 좋아하는 햄 계란말이 해줄까?'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알게 되었다. 내가 굉장히 단순한 애라는 걸. 나는 햄 계란말이가 먹고 싶었기에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리고 다음날 내 런치박스 안에는 햄조차 없는 김치볶음밥이 있었다.


다행히 점심시간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예상외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단 걸 알았다. 그럼에도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분했다. 분명 그 햄은 언니들 런치박스 안에 있었을 것이다. 분명 첫째 언니겠지. 그 언니는 욕심이 많으니깐. 집으로 도착했는데 엄마의 표정이 안 좋았다. 그게 다음날까지도 이어졌다. 엄마는 학교 가기 전에 나에게 미니 오레오를 건네주며, '사랑해'라고 하셨다. 나중에 엄마께 들어보니 학교 선생님이 점심시간 때 사건을 엄마에게 전화로 알려준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내 런치박스는 점점 화려해졌다. 어느 날은 김밥, 어느 날엔 오므라이스, 그리고 정말 놀라웠던 건, 어느 날 엄마가 칵테일 새우를 싸주신 것이다. 나도 놀랐는데 그 주위 애들은 그걸 보며 얼마나 놀랬을까. 삶은 새우와 작은 용기에 담아진 빨간 소스는 너무 이상했다. 이상했지만 맛있었다. 예은이도 한입 하더니 맛있어서 같이 먹었다. 그러자, 다른 애들도 붙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씩 새우를 집어 찍어먹었다. 아직 나는 충분히 먹지도 못했는데 내 점심이 빠르게 사라지는 걸 봤는데도 나는 행복했다. 미니 오레오로 배를 채워야 했는데도, 나는 기뻤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이걸 전해주었을 때 그제야 엄마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보았다. 또 한 번, 나는 엄마가 나를 많이 사랑하신다고 느꼈다. 또 이사를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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