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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bbers Jan 17. 2021

성장은 지겹다

-공주야 뭐야 -

시은이라는 아이를 처음 만난 건, 이사를 가기 한 달 전이었다. 아는 언니를 통해서였다. 나랑 예은이는 '보아 언니'라고 부르는 언니가 있었다. 평소 내 언니들이 가수 보아의 뮤직 비디오를 보여줬는데,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나랑 예은이는 멋있는 사람 하면 보아를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러다가 우리보다 8살이 더 많은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는 머리도 보아처럼 울프컷이었고, 옷도 체인 달리고 반짝거리는 옷이 많았고, 무엇보다 항상 신기한 간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언니는 간식을 좋아해서 자주 사 먹었는데, 우리가 그 언니 집에 놀러 가면 간식들을 나누어주었다. 기억나는 간식은, 내가 제일 좋아했던, 뿌리는 사우어 애플 스프레이이었다. 스프레이처럼 생긴 게, 입을 열고 안에다 뿌리면, 안에서 신 사과맛 기체가 가득했다. 이것 말고도 정말 다양하게 많았다. 달팽이처럼 생긴 관 안에서 껌이 나온다던가, 알약처럼 생긴 초콜릿 이라던가, 커피맛 사탕이라던가. 예은이랑 나는 각자 집에서 간식을 볼 수 없었기에, 그 언니의 집에 가는 게 우리의 행복이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예은이랑 보아 언니네 집을 갔는데, 못 보던 아이가 있었다. 머리는 긴 생머리에, 키도 나보다 조금 크고, 옷이랑 신발이 둘 다 흰색이며, 리본 달린 머리띠를 하고 있던 애였다. 토끼를 사람으로 변신시키면, 그 아이와 비슷할 것 같았다. 그 애를 보는데, 보아 언니가 '시은아 인사해, 여기 사는 애들이야. 이사온지 얼마 안 되었는데 잘됐다. 얘네들이랑 놀아 이제'라고 했다. 나랑 예은이는 뻘쭘하게 서서 시은이를 보고 있었다. 보아 언니는 어색한 우리를 보고 제대로 소개를 시켜줬고, 간식까지도 챙겨주며 가서 놀라고 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또다시 그 애를 벤치 중앙에 앉히고 물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어봤던 것 같다. 물어보니, 그 애는 이사온지 얼마 안 되었고, 취미는 공주놀이이고, 학교는 영국이랑 같은 학교였다. 얘기를 하는데, 그 애는 공주라는 단어에 크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공주놀이에 대해서 말하다 보니, 다음에 예은이랑 내가 공주놀이를 할 때 같이 하자는 약속까지 만들었다. 그렇게 또 친구를 얻은 기쁨에 행복했을 때, 그다음 날에 나는 절망과 서러움을 느꼈다.



다음날 나는 약속했듯이 예은이랑 만나서 그 애를 보기로 했다. 나랑 예은이가 예은이네서 같이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익숙한 사람이 오는걸  창문을 통해 보았다. 영국이었다. 두 손으로 종이접시를 들고 오고 있었다. 내가 빠르게 달려가서 문을 열어주니, 영국이는 놀랐다가 웃으며 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너,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라며 웃었다. 그 애의 이쁜 웃음에 보답하듯이 나도 같이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은이 어머니가 불쑥 나타나셔서, '어머, 진짜 괜찮다니깐 또 만들어주셨네! 진짜 맛있겠다! 너무 감사하다고 엄마한테 전해드려'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영국이는 김치전 심부름을 한 것이다. 예은이 어머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영국이에게 들어와서 조금 놀다 가라고 하셨다. 그 말에 나도 들어와서 놀고 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영국이는 고개를 잠깐 숙이며 '네'라고 하고는 들어왔다. 그렇게 셋이 모여서 앉아있을 때 내가 '우리 공주놀이할 거야. 네가 왕자해'라고 하니깐 영국이가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 애도 예은이처럼 마음이 너무 착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역할을 나누어서 내가 공주, 영국이가 왕자, 그리고 예은이가 요정을 하기로 정했을 때, 시은이가 도착했다.


시은이는 들어올 때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너, 여기서 뭐해?'라고 하며 영국이에게 말했다. 영국이도 놀란 눈치였다. 나랑 예은이는 바쁘게 눈치를 살폈다. 내가, '너네 알아?'라고 묻자, 시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 쟤 나랑 같은 학교 다니는데? 스쿨버스도 같이타'라고 했다. 그 순간 부러웠다. 영국이랑 스쿨버스를 같이 타다니. 나도 스쿨버스를 같이 타게 되면 지금보다는 더더더,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 텐데. 엄마한테 학교를 바꿔달라고 조를까라고 생각을 하다가 앞에 예은이를 보고 그 생각은 바로 접었다. 예은이 없는 학교는 상상하기 힘들어서였다. 시은이는 들어와서 '무슨 얘기했어 다들?' 이라며 앉았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와 영국이 틈으로 들어와서 그 사이에 앉았다. 나는 시은이를 째려보며 비켜주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바로 다음이었다. 내가, '우리 공주놀이하는데 역할 정했어. 나는 공주고, 영국이는 왕자고, 예은이는 요정이고, 너는 남은 역할인, 할머니 하면 돼'라고 설명했다. 대충 우리가 생각한 내용은, 공주가 왕자랑 결혼하려 하는데 할머니가 나타나 독사과를 주었고, 요정이 그 독을 풀어주어 공주가 다시 왕자랑 결혼하는 내용이었다. 디즈니에게 저작권을 물어야 할 만한 줄거리였다. 그걸 듣자, 시은이는 고개를 저었다. '야, 안돼. 나 한 번도 할머니 해본 적 없어. 항상 공주란 말이야. 난 공주 아니면 갈 거야. 영국이가 왕자면 난 공주 해야지. 그게 더 이쁘잖아'라고 했다. 난 말을 잃었던 것 같다.  시은이의 말에 그 애가 공주여야 한다는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예은이는 바로 반박하듯이, '네가 늦게 왔잖아. 지금은 할머니 하고, 두 번째엔 네가 공주해. 원래 내가 공주 하려고 했는데 양보하는 거야'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 와중에 영국이는, '이걸 두 번 해?' 라며 집에 들어온 걸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은이는 예은이 말이 바로, '그럼 나 간다? 난 항상 공주만 해서 다른 건 못해' 라며 반박했다. 예은이는 당황해서 나랑 눈을 마주쳤다. 나는 당황한 예은이를 보고, 더 이상 이런 싸움은 무의미하겠다 싶어 시은이에게 공주를 하라고 말해줬다. 시은이는 그제야 웃으며 옆에 있는 영국이 팔에 팔짱을 꼈다. 영국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는 그걸 보며 처음으로 씁쓸함을 느꼈던 것 같다. 시은이가 공주병이 살짝 있긴 하지만, 이쁜 편이었고, 그렇지 못해 보였던 나는 이걸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날 하루 종일 공주가 되지 못한 채 집을 가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와 아빠는 온 식구를 거실로 불러, 곧 있으면 아빠의 직장을 따라 버지니아주로 이사를 갈 것이라고 들었다. 예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덤덤했다. 하지만 그날 그 얘기를 들을 때, 그 말들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마구 흔들었다. 여태껏 내가 가꾼 학교생활과, 예은이와 멀어진다는 생각과, 영국이를 볼 수 없고, 또 영국이를 시은이와 같이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처음으로 원망스러워서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그걸 보더니 놀란 눈치셨다.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하는 우리 가족이 미웠지만, 나는 눈물만 흘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이사 속에서 내가 배운건,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간다고 하면, 간다는 것이다. 바뀌는 것은 없기에,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이미 '좋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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