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내가 이 질문을 치열하게 하게 된 것은 바로 부모가 된 후의 내 삶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나'라고 규정짓던 내가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어는 날은 한없이 친절하고 사랑 가득한 엄마의 역할놀이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무서운 괴물이 된다. 나는 세상 가장 끔찍한 혐오스러운 괴물 같은 엄마였다. 어린아이를 두고 세상 끔찍한 얼굴로 협박을 하고 소리를 질러댄다. 왜 이렇게 육아가 끔찍하고 힘들까?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들을 둘을 두고 나는 깊은 우울과 자괴감에 빠져 한동안 많이 힘들었다.
내가 알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나와서 마음대로 나를 휘두르다가 가는 느낌이다. 이 많은 분노는 다 어디서 올라오는 것일까? 내 안에는 도대체 누가 있길래 이렇게도 낯설게 나는 모습을 바꾸는 것일까? 아이를 키우면서 심리학 책들과 육아서를 많이 읽고 공부했다. 내 마음은 도대체 왜 이렇게 날뛰는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는 것이 좋은지 도무지 답을 몰라서 방황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내면 아이'의 존재였다. 내면 아이는 우리 안의 억눌린 무의식, 혹은 관념들이 인격이 되어 존재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정여울 작가님의 글에는 이런 내면아이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나의 치유에 큰 도움을 받았다. 특히 <나의 어린왕자> 책으로 내면아이와 대화하는 법을 많이 배웠다.
나는 내면 아이의 개념을 이해하면서 내가 느낀 그 감정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어린 시절로 다시 들어간다. 내 안에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상처가 가득한 내면 아이가 있다. 수많은 억눌린 관념들이 인격이 되어 자신의 감정을 알아봐 달라고, 내가 아이를 키우며 수시로 그 감정들이 터져 나온다. 내가 아이일 적에 알코올 중독에 무서웠던 아빠 때문에 표출하지 못했던 나의 두려움과 원망과 사랑에 대한 욕구를 그 내면 아이는 고스란히 갖고 살고 있었다. 그 아이가 수시로 나타나서, 내 아이를 키울 때 나의 감정을 건드렸다.
나의 남편은 우리 아빠처럼 무섭지도 않고 정말 내가 그 어린 시절 꿈꾸던 친절하고 친구 같고 다정한 아빠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아빠의 사랑을 받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질투가 났다. 이것은 바로 나의 내면 아이가 하는 질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안에는 정말 유치하고 어린아이 같은 감정이 존재하고 있고 특히 아이들이 어릴 적 그 내면 아이는 툭 툭 터져 나와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내면 아이들의 터져 나오는 감정들을 끌어안았다. 내 안에 자라지 못한 내면 아이들을 그렇게 같이 키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내가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나의 육아 시기이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그저 아이들이 아프면 병원에 뛰어다니고 먹을 것을 먹이고, 놀리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다른 생각보다는 이 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보살펴야 되는 막중한 임무를 해결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썼다. 그렇게 아이들이 스스로 하는 초등학년 시절이 다가오고, 나는 몸이 자유로워졌다. 마음도 같이 자유로워졌고 한숨을 돌리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었을 때, 뜻밖에도 나는 심리적 마흔 앓이를 했다. 이제 편하고 좋은데 이 마음에 이는 폭풍과도 같은 감정은 무엇인지 혼란스럽고 힘들어서 상담이 절실했던 시간이었다.
남편과도 불화하며 이혼의 위기가 찾아왔고, 친구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마음도 바뀌었다. 필요한 관계만 남기고 나에게 집중하면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비로소 처음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내 마음보다 타인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편하고 좋았던 내가 불편하기 시작했다. 내면 아이가 불쑥 튀어나와 수시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나도 이제 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둬! ' 내 감정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고 살았는데 내가 관계 속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고 어떤 대접을 받고 싶은지를 알았다. 내가 아닌 것은 그 무엇도 하고 싶지도 되고 싶지도 않아서 많이 싸우고 많이 부딪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내가 갖지 못한 청소년기의 사춘기와도 같았으며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 한 숨을 돌리고 튀어나온 나의 내면 아이의 목소리였다. "힘들게 몰아붙이지만 말고, 나 좀 알아봐 줘. 나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너는 한 번도 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더라. 계속 일만 시키고, 노력하지 않으면 무능한 사람이니 더 더 노력하고 살라고 종용하는 악덕 고용주야!" 이런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다 사실이었다. 내가 나를 제대로 인정해주고 알아봐 준 적이 거의 없었으며 이런 인정을 남편이나 타인에서 늘 구했다.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면 그렇게 서운하고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어서 또 우울했다.
그러나 결국, 이 시기를 보내면서 느낀 것은, 내가 나를 정말 알지 못하고, 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항상 함께 하고 죽기 전까지 함께 할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인데 이렇게 나는 나를 싫어했던 것이다. 칭찬보다는 비난을, 쉼 보다는 더 달려가는 채찍질을 늘 내가 나에게 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참 많은 눈물을 쏟았다. 너무 미안하고 너무 안쓰러운 나에게 눈물로 화해하며, 이제 더 많이 끌어안고 사랑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그렇게 나의 뿌리 깊은 슬픔과 우울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나의 우울증은, 나의 아빠, '정윤'처럼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을 밖에서 찾았던 어리석음이었음을 알았다.
내가 스스로를 채우고 사랑하니, 조금 부족하고 실수하는 타인을 더 너그럽게 바라보게 된다. 가장 가까운 나의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화를 덜 내고, 더 편안해진 엄마이자 아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신기하게도, 내가 나를 더 끌어안고 사랑하는 마음을 낸 것뿐인데 많은 것이 변하고 있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발 이 마음 좀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파고 쳐서 괴롭던 내가, 이제 조금씩 평온해 지고 있다. 아이들 둘의 엄마가 되고, 아빠 정윤을 끌어안은 딸이 되어 비로소 편안함이 무엇인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