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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도 사라지고 싶어. 우울의 되물림에 대하여.

Part 3. 마흔, 치유의 시간

by 김리사



우리는 얼마나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는가? 대부분의 어른들의 현재 자아의 모습은 태어나 7세 이전에 대부분 형성된 관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태교부터 시작하여 어린 시절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고자 노력한다.



어쩌면 이 짧은 시기의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가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는 정서적 근간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학적인 기전을 책을 통해서 읽고 공부하면서 나는 내 우울감에 대해서 근원을 찾아보았다. 나는 언제부터 우울을 알았을까?



사춘기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하고 어른이 된 나는 뒤늦은 사춘기를 앓았다. 내가 사춘기였을 때, 아빠는 위암 투병을 하였다. 엄마도 그런 아빠를 돌보며, 엄마 자신도 유방암에 걸리며 이중 삼중으로 생에 최고로 힘든 시기를 보낸 엄마였다. 그런 와중에 내가 십 대 시절이라고 사춘기 반항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마음속에서는 부모님에 대한 걱정과 연민, 돈 걱정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일 뿐이었다. 열심히 하여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성적도 제자리걸음일 때, 스스로가 그렇게 싫고 무능해서 땅속으로 꺼지고 싶은 그런 시절이 지나고 나는 대학을 가고, 어른이 되었다.



나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것은 대학을 가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다. 뭔가 관계나 삶이 힘들다고 생각이 들면 나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힘든 상황으로부터 회피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먼저 든다. 적이 와서 잡아 먹힐 위기에 처한 타조가 땅속으로 머리를 처박고 모르는 척하는 그런 꼴로, 오랫동안 삶을 산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은 없으나 일순간 고요해지니, 위기를 모면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의지하며 그렇게 내 모든 것을 맡겼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의지하듯 그렇게 내게 다가 온 인연에 의지해서 삶을 살아갔다. 의지하는 만큼 그 사람이 다 채워주지 못할 때 또 나는 사라지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절망의 절망을 거듭했던 시간이었다.



대학생이 되어도 엄마 아빠가 계신 고향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아빠의 술이 걱정이고, 건강이 걱정이고, 엄마의 안녕이 걱정이고, 두 분 마음이 편안한 것 같으면, 돈이 걱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냥 엄마 아빠의 일이니 모든 마음을 분리시키고 대학생답게 재밌게 살면 될 일인데 어줍지 않게 마음만 무것운 대학생이었던 내가 바보 같기만 하다.


나름대로 연애도 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그렇게 지냈지만 내 마음 만큼은 통영 고향집에 늘 안타깝게 가 있었던 시간이 길었다. 그렇게 항상 마음이 가 있던 곳이 부모님 댁이었다. 그런 어리석은 나를 다시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 잘 살고 싶었고 크게 성공하고 싶었던 나였다.



지난 시절의 나에게 다시 돌아가서 어른으로서 충고를 해준다면, 그냥 네가 즐기고 싶은 대학생활을 더 많이 즐겨보라고 해주고 싶다. '부모님은 부모님 나름대로의 삶이 있으니, 그만 걱정을 내려놓아라. 아이야..더 많이 놀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충실하게 사랑하렴'이라고 말이다. 빛나는 20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부모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이었을 것이니까. 내가 행복하고 자유롭고 즐겁게 사는 것 말이다. 부모가 되어 보니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어떤 부모도 자식이 자신들의 문제를 가져가져 스스로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부모가 가장 두려워하고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힘든 삶을 살아도 자식만큼은 해맑고 밝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것 말이다.



아빠가 우울해서 내가 우울한 어른이 되었다고 푸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내 마음 깊숙이 뿌리내린 삶의 슬픔이 내가 맺는 관계 속에서 수시로 터지면서 깨달았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도망치고 싶고 숨고 싶은 내면 아이가 함께 한다는 것을 말이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내 안의 슬프고 무기력한 내면 아이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 내면 아이를 마주 보는 시간을 갖는다. 내 슬프고 나약한 내면 아이가 내 귀하고 소중한 자식들에게도 대물림 되지 않도록 내가 먼저 바라보는 시간을 이렇게 가지는 것이다.



아빠의 내면 아이의 우울과 슬픔은 어쩌면 아빠의 아빠로부터 왔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도 정신적으로 힘드셨고 그렇게 스스로를 내려놓으며, 하늘나라로 가셨으니까. 그 중간에 십 대의 어린 아빠는 아마도 제정신이 아닌 채 슬픔을 안은 어른으로 자랐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있다. 나는 아빠의 슬픔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많은 시간 아빠를 보면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생각했다.


그저 가족들 간의 사랑 속에 폭 안겨 있을 때 아빠는 가장 행복해 보였다. 아빠처럼 나도 사랑을 갈구하는 한 어른으로 자라서, 자주 외롭고 쓸쓸했던 것 같다. 뒤늦게 배운다. 우리가 가진 우울의 문제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껴안을 때 해결되는 것임을 알았다.



아빠가 떠나고 몇 해가 흘렀다. 아빠 탓을 그만하고 나도 이제 독립된 어른으로 다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우울은 그렇게 대를 거쳐 대물림 되었지만 나는 여기에서 내 우울을 끊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어른이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배운다. 삶을 통해 내 무의식에 깊이 자리 잡은 피해의식과 아빠에 대한 원망과 미움, 연민은 모두가 다 나의 공붓거리가 되었다. 마음공부를 하면서 아빠의 삶을 돌아본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아빠를 포옹한다. 진심으로 아빠를 포옹한다. 아빠의 우울까지도 안아주고 나니 나의 우울도 안김을 받아 포근하고 따뜻하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아빠였으니 이제라도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그때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느낌으로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쓴다.



어딘가에 에너지로 존재하며 따스한 햇살 한 자락, 바람 한 점에, 꽃 향기에도 아빠는 살아계시리라고 믿는다. 이 글은 모두 아빠를 사랑하는 나의 뒤늦은 고백의 글이다. 몰라서 미안하고, 표현에 서툰 아빠를 많이 원망했는데 참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 누구라도, 그 어떤 위대한 존재가 와도, 그 시절 아빠와 똑같은 DNA와 환경, 사건, 사고들을 모조리 다 겪었다면, 아빠보다 더 훌륭하게 그 시절을 보냈을 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저 그때에는 그게 아빠에게 최선의 방법들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 미흡하게도 상처 입히고 상처를 받으며 삶을 살았던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 내 삶도 그렇게 수없이 역사 속에 흐르며 쓰인다. 어떤 부분은 참 대단했으며, 성취감에 부풀었고, 또 어떤 부분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숨기고 찢어 버리고 싶은 삶의 조각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나의 인연에 따라온 내 삶이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부디 이 작은 위로의 글이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 가는데 도움이 되기 바라며 마음을 쓴다.



아빠의 숨결이 전해져 오는 오늘도 아빠같이 아름다운 날이다. 그립다고 말하면 사무칠까 하지 못한 고백들을 글에 숨어서 몽땅 토한다. 아빠가 무척 그리운 날이다. 미소도, 오토바이 소리 마저도, 모두가 다 그리운 아름다운 가을날이다.


어느 가을, 노란 은행나무가 수북이 쌓인 그 길에 엄마와 아빠, 내가 셋이서 찾은 적이 있었다. 세상 가장 행복하고 따뜻하고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띠며 아빠는 은행 열매를 주웠고, 엄마도 행복했던 시간의 어린 내가 있다. 나는 그렇게 단지 엄마 아빠가 함께 웃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어린아이였음을.. 그것 만이 내가 원하는 전부였음을 아빠가 알 것 같다. 하늘에 가면 지나간 시간을 주마등처럼 쭉, 펼쳐 보게 된다고 하니 아빠가 그때 행복했던 내 모습과 마음도 읽지 않으셨을까 한다.



언제나, 힘들 때면 엄마와 아빠와 함께 평화로웠던 시간을 떠올렸다. 항상 전쟁만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것 아픈 것을 함께 가져온다. 내가 우리 집에서 자라면서 배운 것은, 아픈 시간보다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했던 엄마 아빠와의 시간임을 알게 되면서. 나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결국 힘들지만 우리가 더 집중해야 할 것은 ''''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에 더욱 집중하는 일일 것이다. '없음' 보다는 '있음'에 집중하는 삶이 행복을 만들어가고 선택하는 삶의 자세이다. 아빠가 남기고 가신 그 모든 결핍된 마음에 사랑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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