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엄마가 시를 쓰고 계셨다. 엄마의 일기장에는 터뜨리면 수습되지 못할 수많은 말 주머니가 떠돌았다. 그 주머니가 터지면 감당할수 없을 엄마의 섬세한 마음도, 버텨왔던 삶도 펑, 터질세라, 엄마는 절제되고 오묘한 단어로 차라리 시를 쓰셨다. 때론 산문의 글 보다 시가 마음을 더 극적으로 잘 담아 준다는 것이 엄마의 시를 통해 느껴졌다. 어떤 시는 유쾌하고 소녀 같으면서, 어떤 시는 마음을 찡하고 울렸다.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가 초등학교 교육밖에 받지 못했어도, 통영 골목 한 모퉁이에서 구멍가게를 하며 부식가게 아줌마, 할머니가 되어 살았어도.. 엄마는 이미, 뭔가 배우고 싶고, 글로 쓰고 싶은, 학구파 문학소녀 DNA를 타고나셨구나..
내가 과연 우리 엄마를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암투병으로 아픈 아빠를 돌보던 모습과, 엄마가 우리 자식을 대하던 모습들 뒤에는 내가 정말 몰랐던, 엄마 본연의 '송옥례'가 있었다. 초등교육만 겨우 받은, 열세 살 이후로 타 지역으로 돈 벌러 나간 소녀가 아니라, 좋은 학교 교육을 받고, 엄마 이름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보았더라면 엄마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아마도 대학교 교수님은 족히 되셨을 것 같다.
엄마는 내게 묵묵한 산이다. 평생을, 산과 같은 엄마는 바다와 같은 아빠를 품고 세상이 되어 살아가셨다.
엄마의 시 중에서 나이 들어감과 꽃을 보며 느끼는 생의 감사가 담긴 시가 있는데 하나를 소개해본다.
<내 꽃은 육십팔 세 >
내 노안으로 보는 꽃은
색깔도 희미하게 퇴색되어 보인다.
더 예쁜 꽃을 보기 위해
돋보기안경으로 보았더니
어머! 어쩜 색깔도 그리 선명하고 고울까?
늙는 것도 서러운데...
나를 위해 선물한 부활절 화분 두 개,
한 보름 보았더니, 꼭 내 나이만큼 시들었네
날마다 너희들 보는 즐거움에 행복했어!
나도 누군가에게 예쁜 꽃이 되어 주었으면..
이 밤은 이 행복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딱 엄마처럼 예쁜 마음의 시였다. 나도 엄마처럼 예순여덟의 나이가 올 텐데.. 엄마처럼 이렇게 시를 쓰며 삶을 감사할 줄 아는 행복한 할머니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예쁜 꽃이 되어 행복을 주는 할머니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칠순의 우리 엄마는 구멍가게에서 과일을 팔고, 두부, 콩나물을 팔고, 물건을 팔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사실 물건보다 따뜻한 우리 엄마의 마음을 사 가고 싶어서 자꾸 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이렇게 40년 구멍가게에서 행복해지는 것에 도가 트인 큰 어른이 되어, 행복을 팔고 계신다. 한번 오면 또 오고 싶은 북신 부식 가게 구멍가게 할머니가 참 정겹다.
마지막으로 시 하나를 더 선물드린다. 아빠를 돌보며 병원 생활하실 적에 쓰신 시인데 건강하게 일상을 누리는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주신 시였다.
<사월의 하늘>
대학 병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월의 하늘..
하늘의 구름이 자유로워 보인다.
하얀 솜사탕 같다.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머무는 듯
움직이는 듯
온 세상이 평화롭다.
그때 엄마의 마음을 생각해보면서 이 시를 보니 마음이 먹먹했다. 언제 좋아져서 퇴원을 할지도 모를 아빠의 병세에 엄마는 아마도 자유롭고 건강하게 돌아다니던 날들과, 앞으로의 그런 날을 꿈 꾸며 희망을 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마음은 병원에 갇혀 있지만 언제나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며 희망을 찾아서 엄마가 여기까지 오셨다. 암도 물리치고, 심한 교통사고에 분쇄 골절된 한쪽 다리도 회복해 가면서, 엄마가 여기에 계신다. 어릴 적 우리 삼 남매를 다 키워내던 그 예전 구멍가게가 아직 살아 쉼 쉰다. 엄마의 삶의 터전이 참 멋지고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