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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벽화에서 왕비의 바람을 읽다

경복궁 교태전의 화조도와 원후반도도

by YEC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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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교태전이 두 점의 그림을 품었습니다.


새들이 지저귀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모습을 담은 <화조도(花鳥圖)>와 바위와 소나무, 그리고 복숭아나무 사이에서 뛰노는 원숭이들의 모습을 담은 <원후반도도(猿猴蟠桃圖)>가 그 주인공입니다.


두 그림은, 본래 1888년~1895년 사이에 제작되어 교태전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이 걸린 지 불과 30년 남짓 지난 1918년, 일제에 의해 교태전이 훼철 결정이 나며 두 그림도 보금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렇게 헐리고 만 교태전은 77년이 지난 1995년에 복원되었지만, 그 뒤로도 그림을 품었던 자리는 한동안 하얀색 빈 벽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29년이 흐른 2024년 12월, 교태전은 드디어 두 그림을 모사도(模寫圖)로나마 다시 품었습니다.


왕비의 공간이었던 교태전에 장장 106년 만에 다시 걸린 두 점의 부벽화. 파란만장한 시간을 지낸 두 그림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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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벽의 화조도에는 금계와 앵무, 참새를 비롯한 상서로운 새들과 아름다운 꽃들이 그림을 수놓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뻗은 가지를 따라 맨 끝부터 꽃을 살펴보면, 봄에 피는 목련, 여름에 피는 장미, 가을에 피는 계화(목서), 겨울에 피는 매화까지 사계절의 심상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동시에 피어날 수 없는 꽃들을 한 폭의 그림 안에 담아내는 방식은, 궁중화의 일종인 ‘사계화조도(四季花鳥圖)’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배정영, 2025, 36쪽), 이에 따라 본 그림 자체가 사계화조도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태전의 화조도는 뭔가 특별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을 새들인 금계와 앵무새가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궁중의 화가들은 어째서 이렇게 이국적인 새를 궁중화의 소재로 채택했을까요? 바로 이 새들이 왕과 왕비에 대한 상징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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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 장끼(수컷) ⓒDavid Castor / <화조도> 속 금계 ⓒ국가유산청

금계는 위 이미지에서 보이듯 본래 머리 부분이 금빛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조도> 속 금계는, 머리의 색이 얼핏 금계보다도 꿩 쪽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머리를 이렇게 묘사해 놓은 이유는, 당대 왕실 여성의 대례복인 적문(翟紋)의 형태가 반영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배정영, 38쪽). 당대의 화가들이 금계를 실제로 보기는 어려웠던 상황에서, 간접적으로 들은 금계의 모습에 꿩의 문양을 투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왕비에 대한 상징으로 채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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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앵무새 ⓒhans / <화조도> 속 앵무새 ⓒ국가유산청

또 다른 이국적 새인 앵무새는, 화려한 색상과 사람 말을 따라 하는 능력 덕분에 일찍이 상서로이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상서로운 새가 한 번 짝을 지으면 평생 일부일처제로 살아가는 생활 습성까지 가졌으니, 한 쌍의 앵무새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풍경은 왕과 왕비의 백년해로를 기원하는 상징으로 채택하기에 더없이 좋았습니다.


이처럼 이국적인 새들과 함께, 왕비의 장수, 가정의 평안, 부부금슬 등을 기원하는 각종 길상적인 의미의 자연물들을 그려놓았기에, <화조도>는 왕비를 위한 그림으로서 교태전에 걸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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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후반도도 ⓒ국가유산청

이제 <원후반도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원후반도도>는 ‘원후장생도(猿猴長生圖)’라고도 불리는데, 궁중화의 또 다른 전통인 ‘십장생도(十長生圖)’의 전통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가, 산림, 계곡이라는 세 공간으로 그림 속 풍경을 나눈 다음 곳곳에 장수를 상징하는 자연물을 배치하는 방식이 십장생도의 전통인데(배정영, 41쪽), 이를 <원후반도도>가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중 화가들이 전통적인 십장생에 해당하는 학, 사슴, 거북을 빼버리고 하필 원숭이를 대신 그려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원숭이가 모성애와 장수 등 여러 길상적 의미를 한 번에 상징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배정영, 44쪽)


원숭이 모자(母子)가 같이 복숭아를 나눠갖는 부분이 바로 모성애를 상징하는 부분입니다. 또한 원숭이가 들고 있는 복숭아는 ‘반도(蟠桃)’로, 십장생도의 본래 목적과 마찬가지로 장수를 상징합니다. 그러니 어머니인 왕후와 아들인 왕자가 같이 무병장수하길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원후반도도>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던 십장생도에서 소재를 살짝 바꾸어, 장수를 비롯해 왕비와 관련된 길상적인 의미를 담아낸 맞춤형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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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무병장수, 가정의 평화, 좋은 부부금슬 등 왕비의 바람을 듬뿍 담아 교태전 맞춤형으로 제작된 두 점의 부벽화는, 안타깝게도 제 역할을 30년 정도밖에 하지 못한 채 교태전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림에 담긴 왕비의 바람은 보금자리를 떠나서도 살아 숨 쉬었고, 2024년 제자리로 돌아와 우리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은 뒤로 왕비의 공간 교태전을 거닐 기회가 생긴다면, 화조도와 원후반도도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그러면 두 그림이 여러분에게 재밌는 왕후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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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국가유산청, (2024). 부벽화 2점(화조도, 원후반도도) 모사도로 제작‧공개… 사전신청 없이 교태전 대청 개방(12.19.~12.30.). https://www.khs.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705203§ionId=b_sec_1&pageIndex=1&pageUnit=1

배정영. (2025). 경복궁 교태전 〈사자도〉를 통해 본 궁중 서수도 제작과 의미. 미술사연구, (48), 31-60. 10.52799/JAH.2025.06.48.31

신하순. (2024). 경복궁 교태전 부벽화 모사도 제작 보고서. 서울: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YECCO 콘텐츠팀 공윤재, 이승아, 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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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공윤재, 이승아, 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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