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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물들다,무주

예코방방곡곡 시리즈 #10월호_무주편

by YECCO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저희 예콘지기가 이번 10월에 방문한 곳은 바로...! 무주인데요?


여러분들은 무주라고 하면 어떤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이번에 무주로 여행을 가기 전까지 저는 무주 스키장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 같아요! 어릴 적 가족과 함께 눈이 한가득 오는 날씨를 뚫고 도착한 덕유산 무주리조트에서 열심히 스키를 탔던 기억이 있거든요. 아마 여러분에게도 무주 하면 리조트, 겨울에 눈으로 덮인 덕유산의 모습이 먼저 떠오를 것 같은데요? 제가 이번에 방문한 무주는 이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와 매력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지역이었습니다!


그럼, 제가 느끼고 경험한 무주의 매력과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동서 교류의 중심지이자 심산유곡의 무주


저는 새로운 지역에 가기 전에 그 지역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먼저 공부하곤 하는데요? 이렇게 하게 되면 그 지역의 색깔과 매력을 더욱 깊이 즐길 수 있거든요! 그래서 무주에서 제가 방문한 곳을 알려드리기에 앞서 무주에 대해 제가 찾은 정보들을 소개하고자 해요.


가장 먼저 알려드리고 싶은 것은 무주의 역사와 지명의 유래입니다. 무주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4세기 이전 삼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제가 무주에 도착했을 때 가장 처음 받는 인상은 “산이 정말 많다. 진짜 첩첩산중이다.”라는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남북으로 뻗은 소백산맥이 무주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삼한 시대에는 소백산맥을 경계로 현 무주의 동쪽에는 변한의 무풍, 서쪽에는 마한의 주계가 있었습니다. 다들 한국사를 공부하셔서 아시겠지만, 마한은 백제에게, 변한은 가야·신라에 병합되게 되죠. 그래서 삼국시대가 되면 마한의 주계는 백제에 속해 적천현이라 칭해졌으며, 변한의 무풍은 신라에 속해 무산현이라 칭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660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까지 무산과 주계는 백제와 신라 간 국경을 접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고 해요.


무주라는 지명이 탄생하게 된 것은 바로 조선시대였습니다. 태종 14년(1414년)에 전국의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무풍주계를 합병했고, 두 고을의 첫 자를 따서 무주라고 지명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는 전주, 진주, 경주 등 주로 끝나는 지명이 많은데요? 무주 지명의 이러한 탄생 배경 속에서 무주는 대한민국의 시/군/광역시의 주로 끝나는 지명 중 유일하게 州(고을 주)가 아닌 朱(붉을 주)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2013년 기준 대한민국 행정구역_져니쌤과 함께 하는 역사 정복.jpeg ▲2013년 기준 대한민국 행정구역 ⓒ져니쌤과 함께 하는 역사 정복

이런 역사 속 오늘날의 지명을 얻은 무주는 역사적으로 동·서 화합과 문화교류, 교통의 중심지였어요. 무주는 전북특별자치도 동북부에 위치해 있는 군인데요? 행정구역이 표시되어 있는 지도를 보시면 무주가 충청북도, 충청남도, 경상남도, 경상북도까지 총 4개의 도와 인접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충청북도의 지역으로는 영동군, 충청남도의 지역으로는 금산군, 경상남도의 지역으로는 거창군, 경상북도의 지역으로는 김천시가 무주와 접해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부터 동서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소백산맥 지도 표기_위키백과.png ▲소맥산맥의 위치 ⓒ위키백과

그리고 무주는 역사적으로도 또 오늘날에도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가진 고장으로 유명한데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무주에는 국립공원인 덕유산과 함께 소맥산맥이 관통하고 있어요. 덕유산을 비롯해, 적상산, 민주지산, 흥덕산, 두문산, 순룡산 등 1,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무주군의 동부에 솟아있고, 이를 통해 자연이 아름다운 심산유곡(깊은 산속의 으슥한 골짜기)의 무주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특징들이 무주가 내륙지방 중 가장 중심부를 점유한 산악지대로 불려왔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자, 이제 무주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어느 정도 아시게 되셨을 텐데요? 이를 배경지식으로 제가 지금부터 소개드리고자 하는 장소의 매력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태권도의 성지, 태권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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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원 ⓒ태권도원(좌), 이상민(우)

무주에는 전 세계의 태권도인이 방문하고자 하는 태권도의 성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바로 태권도원인데요? 2014년 4월 24일에 개관했으며, 경기, 체험, 수련, 교육, 연구, 교류 등 태권도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이 이뤄지는 세계 유일의 태권도 전문공간입니다.


제가 이곳에 처음 갔을 때 처음으로 느꼈던 인상은 “정말 크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태권도원은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10배이며, 태권도원 내를 다니는 버스가 자체적으로 운영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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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원 전경, 전망대 ⓒ태권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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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원 수련공간, 경기장, 박물관 ⓒ태권도원

그래서 이렇게 큰 규모를 가진 태권도원에는 없는 시설이 없었어요. 경기장부터 수련 및 수양 시설, 강의 시설, 공연장, 태권도 박물관, 숙박시설, 식음시설, 자연 정원, 전망대까지 정말 다양한 목적의 시설이 있었어요. 이러한 시설들을 방문하며 “태권도원의 성지로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관계자분의 설명에 따르면, 태권도원에서는 교류 및 경기 진행뿐만 아니라 태권도 진흥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태권도원에 머무르면서 전 세계에서 온 태권도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주를 소개하는 입장에서 “이 태권도원이 여행으로 왔을 때 방문하기 좋은 곳인가?”가 제일 중요한 측면일 것 같은데요? 저는 “네!”라고 답을 할 것 같아요.


태권도원 태권도공연_태권도원.jpg ▲태권도 공연 ⓒ태권도원

저는 태권도원의 숙박시설에서 머무르며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는데요. 첫 번째는 태권도 공연 관람이었습니다. 공연장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사실 저는 “이전에 많이 봤던 태권도 공연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그 생각이 철저하게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다양한 장르의 노래에 맞춰 태권도, 대련, 격파와 이를 활용한 군무를 보여주시는데 박수가 자동으로 나올 정도로 멋졌거든요. “아 이게 태권도의 매력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국뽕(?)이 차오르는 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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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전, 태권루, 백운정 ⓒ태권도원

공연 관람을 마친 후에 방문한 곳은 태권도원의 상징지구였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다가 전각, 루, 정 등 여러 한국 전통 형식의 건축물을 볼 수 있었는데요? 각각 이름은 태권전, 태권루, 백운정으로, 태권도원과 이곳이 위치한 산인 백운산의 상징을 담고 있는 공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상징지구에서 본 풍경 ⓒ이상민

이 건물들 자체도 무척이나 멋있었지만, 긴 오르막길을 오르다 도착한 곳이었기에 이곳에서 아래로 내다보이는 태권도원과 자연풍경이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태권도는 태도에서 시작해 태도로 끝나는 무예라고 하는데요? 이곳이야말로 태권도의 본질을 지키는 수양을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곳인 것 같았습니다!


▲전망대에서 본 풍경 ⓒ이상민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태권도원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전망대였는데요? 전망대까지는 걸어서 가거나, 모노레일을 타고 갈 수 있으며, 저는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전망대에서는 태원도원의 전경과 함께 이후에 소개드릴 무주 33경의 시작 지점인 라제통문을 볼 수 있었으며 첩첩산중의 무주를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망대를 마지막으로 제가 한 태권도원 프로그램은 끝이 났지만, 이외에도 태권도 수련, 태권도 관련 체험 프로그램, 태권도 박물관 관람, 자연 산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으니 무주에 여행을 오시게 된다면 태권도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며 무주의 아름다운 자연 속 태권도의 매력을 물씬 느끼기를 바랍니다!



무주의 경승지, 구천동 계곡

구천동 33경 지도_자연특별시무주.jpg ▲구천동 33경 지도 ⓒ자연특별시무주

구천동 33경은 36㎞에 걸쳐 라제통문에서 덕유산 향적봉까지 형성된, 덕유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절묘한 기암괴석, 수림이 어울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독특한 풍경을 자랑하는 소(沼)나 담(潭)과 폭포 등 구천동 계곡 33곳의 경승지를 의미하는데요. 구천동 계곡은 풍화작용에 약한 화강암층으로 되어 있어 물이 급경사를 이루면서 꼬불꼬불 흐르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두고 경승지와 기이한 바위, 마산동굴 등이 형성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라제통문_한국관광공사.JPG ▲라제통문 ⓒ한국관광공사

구천동 33경의 제1경은 바로 라제통문이라는 곳입니다. 제가 앞서 무주의 역사에 대해 설명드릴 때 무주는 소백산맥을 경계로 동쪽은 신라에, 서쪽은 백제에 속해있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바로 이 라제통문이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굴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의 언어와 풍습이 서로 다른데 옛 신라 지역인 동쪽은 경상권 방언을 쓰고 풍습도 경상권을 따르며, 옛 백제 지역인 서쪽은 전라권 방언을 쓴다고 해요. 흥미롭지 않나요?


하지만 삼국시대에는 이 굴이 뚫려있지 않았고, 당시에 이곳에는 사람들이 넘어다니던 고갯길이 있었다고 전해져요. 그렇다면 이 굴은 언제 뚫리게 된 것일까요? 바로 일제강점기에 금광 개발 등을 위해 이 굴을 뚫었다고 합니다. 이 라제통문은 두 국가의 국경인 동시에, 동서의 교류 중심지이자,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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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동 계곡 풍경 ⓒ연합뉴스

라제통문을 지나면 구천동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구천동 33경의 주요 무대인 구천동의 이름과 관련해 다양한 설화 및 유래담이 있는데요?


첫 번째 설은 이곳에 구 씨와 천 씨가 많이 살아 그 두 성씨를 따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유래담은 어사 박문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요. 그와 관련된 설화는 대단히 많지만, 대개 착한 구 씨를 나쁜 천 씨가 핍박하자 박문수가 어사출두하여 구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설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숙종 때 어사 박문수가 나그네 차림으로 무주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한 외딴집에 들었는데 주인이 근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주인은 구재서라는 사람인데, 마을에 천동수라는 욕심 많은 사람이 구재서의 식구들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재서의 아들이 천동수의 부인을 꾀어내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려서 천동수가 구재서의 며느리를 데려가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입니다. 사연을 들은 박문수는 다음 날 무주 관아로 가서 군졸들을 준비시키고 황·청·흑·백 네 가지 색깔의 옷을 입혀 하늘에서 보낸 사자로 분장하여 천동수를 잡아 벌주고, 멀리 귀양 보냈습니다. 이를 통해, 구재서는 아들 며느리와 행복하게 살았으며, 이후 마을에 구 씨 사람들과 천 씨 사람들이 어울려 살게 되었고, 이 동네는 구천동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설은 32경인 백련사와 관련이 있는데요. 백련사는 구천동 계곡의 거의 끝부분인 해발 900m 지점에 있는 절로서, 우리나라 절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빼어난 절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옛날에 백련사를 둘러싸고 빼어난 절경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의 수도승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그 수가 구천 명에 이르렀다고 해요. 그래서 구천인(九千人)의 둔지(屯地)라는 의미의 ‘구천둔(九千屯)’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하여 ‘구천동(九千洞)’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주 백련사지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jpg ▲무주 백련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 번째 설은 구천동은 중국 원나라 임금 순제가 붙여준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설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원(元)나라 황제는 어느 날 옥새를 잃고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황제는 고려 왕에게 옥새를 찾아 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간청을 했어요. 그때 지금의 구천동에 유해(劉海)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하여 고려 왕은 유해를 원나라로 보내 옥새를 찾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원나라로 들어간 유해는 한 달 안에 옥새를 찾아내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초조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담배만 계속 피우며 유해는 “에라, 모르겠다. 담배나 죽이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이때 방 밖에서 유심히 유해의 행동을 살피고 있던 두 사나이가 사색이 되어 유해의 무릎 앞에 꿇어 엎드린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담거와 배소였는데, 바로 이들이 옥새를 훔친 도둑들이었던 것입니다. 유해의 “담배를 죽이자” 하는 말에 두 사람은 자기들을 죽이겠다는 말로 알고 용서를 빌게 된 것이죠. 옥새를 찾은 황제는 유해에게 큰 잔치를 베풀고 후한 상도 주었으며, 유해가 태어난 곳을 ‘구천동’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천승지국(天乘之國)의 구국제후(九國諸候)가 모여서 가히 축하할 만한 사람이 태어난 곳’이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깊은 산골이라고 생각했던 구천동이 이런 연유로 해서 ‘구천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천동의 이름을 둘러싸고 다양한 설화가 있지만, 이러한 설화들은 공통적으로 구천동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데요? 첫 번째 어사 박문수 설화에서 첩첩산중, 심산유곡의 구천동은 외부와는 고립되어 관의 지배력이 제대로 닿지 않는 곳이며, 두 번째와 세 번째 설화에서는 풍경이 빼어난 곳이자, 중국 황제가 신선이 살만한 곳으로 인정해 준 곳이라는 점이지요. 즉, 이러한 설화들 모두 아름답지만 굽이진 계곡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차단된 구천동 계곡만이 갖고 있는 지역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과거부터 이 지역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으로 명망이 있었으며, 이는 오늘날 구천동 33경이라는 경승지로 이어지게 된 것이죠.


어사길 걷기 행사_자연특별시무주.jpg ▲어사길 걷기 행사 포스터 ⓒ자연특별시무주

무주군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경승지 그리고 이를 잇는 길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어사 박문수의 설화에 기반한 어사길 걷기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올해에는 10월 25일 ~ 26일 이틀 동안 여러 프로그램과 함께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구천동 33경을 다 보지는 못하고 태권도원을 떠나 덕유산 곤돌라를 타러 가는 길에 일부를 보았는데요? 1경 라제통문을 거쳐 13경 세심대까지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 풍경조차도 너무 아름다워 그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이후에 무주에 여행 올 계획이 있으시다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어사 박문수가 걸었던 길을 걸으며 구천동 계곡의 빼어난 풍경을 즐기길 바라요!



덕이 많고 여유로운 산, 덕유산


그렇게 구천동 계곡의 경승지를 보며 덕유산 국립공원에 도착했습니다!

덕유산 풍경_한국관광공사.jpg ▲덕유산 국립공원 ⓒ한국관광공사

덕유산은 해발 고도 1614m로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명산이며, 무주 서쪽 무풍의 삼봉산에서 시작해 남덕유에 이르는 덕유영봉은 40km의 대간을 이루고 영·호남을 가를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크다고 해요. 그리고 덕유산은 구천동 계곡과 같은 뛰어난 경관을 비롯해 멸종 위기 동식물, 천연기념물이 함께 공존하고 있을 정도로 생태계의 보존이 우수하여 1975년 2월 1일 오대산과 함께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답니다.


사실 덕유산은 옛날부터 광여산, 여산이라고 불렸어요. 하지만, 덕유산은 임진왜란 때에는 많은 사람들의 피난처로, 구한말에는 구국 항쟁에 앞장섰던 의병들의 활동지로, 6·25 전쟁 때에는 빨치산의 은거지로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함께 해왔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이곳에 피신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지나갈 때면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산속에 숨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고 해요. 이렇게 전쟁의 참화를 면하게 해 준 광여산의 신비로움에 사람들은 덕이 있는 산이라 하여 덕유산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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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라 입구와 곤돌라 내부에서 본 덕유산 국립공원 ⓒ이상민

이 덕유산의 정상인 향적봉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곤돌라를 탈 수도 있고, 구천동 33경을 따라 올라갈 수도 있으며, 등산코스를 따라갈 수도 있어요! 저는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는데요, 곤돌라가 정상을 향해 구름 너머로 올라가는 모습이 덕유산의 풍경과 함께 잘 어우러져 마치 아시아의 알프스를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상제루_자연특별시무주.jpg ▲상제루 ⓒ자연특별시무주

그렇게 곤돌라를 타면 해발 1520m의 설천봉에 도착하게 되는데요? 이곳에는 ‘옥황상제관’이라는 깊은 뜻을 갖고 있으며, 1997년에 지어진 상제루라는 건물이 있어요. 백두대간 끝자락에 있는 덕유산은 어머니의 산이라 불릴만큼 풍수지리학적으로 여성의 기가 매우 강하다고 하여 기를 눌러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상제루를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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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봉, 가을의 덕유산, 겨울의 덕유산 ⓒ한국관광공사, 연합뉴스, 자연특별시무주

그리고 이곳에서 20분 정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덕유산의 주봉이자 정상인 해발 1614m의 향적봉에 도달할 수 있어요. 제가 정상에 도착해서 본 덕유산은 이제 다가오는 가을에 맞춰 붉은빛의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어요. 활기가 느껴지는 초록빛의 덕유산도 좋았지만, 붉은 단풍으로 가득 찬 덕유산의 모습도 너무 아름다웠을 것 같아 가을이 제대로 왔을 때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이 물씬 들었어요!


저는 산과 바다 밸런스 게임을 할 때, 산이라고 답할 만큼 산을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아름다운 산의 절경을 곤돌라를 통해 편히 볼 수 있어서 몸도 마음도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세 곳을 보고 무주 여행을 마무리하였는데요! 시간이 많지 않아 아쉽게 가지 못한 두 곳을 여러분들께 추가로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다, 적상산

첫 번째 장소는 적상산과 이곳에 있는 사고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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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과 산 정상으로 이어진 도로 ⓒ서울신문(좌), 자연특별시무주(우)

적상산은 해발 1030.6m로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절벽 주변에 유난히도 빨간 단풍나무가 많아서 가을철이면 마치 온 산이 빨간 치마를 입은 듯하다고 하여 赤(붉을 적), 裳(아랫도리옷 상)의 적상산(赤裳山)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가을철에 온 산이 붉게 물드는 적상산은 한국 100경 중 하나라고 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가을이고, 단풍을 좋아해서가 그 이유여서 가을철 적상산의 사진을 보았을 때 가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쉬웠던 것 같아요.


적상산 사고_송희짱.png ▲적상산 사고 ⓒ송희짱

적상산에도 덕유산과 같이 다양한 자연명소와 유서 깊은 문화 유적이 있지만, 제가 여러분께 가장 소개드리고 싶은 곳은 바로 적상산의 정상에 있는 적상산 사고인데요! 사고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왕실과 관련한 기록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적상산 사고에도 조선왕조실록이 300년 간 보관되었어요.


조선 왕실은 조선왕조실록이 멸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 초기에 실록 4질을 간행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4대 사고에 봉안하였어요.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4대 사고 중 3대 사고가 소실되고 유일하게 전주 사고만 남게 돼요.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주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초고로 삼아 5질을 간행하고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마니산 등 5대 사고를 설치해 각 실록을 보관했어요. 소실을 피하기 위해 산 깊은 곳에 사고를 짓게 된 것이죠.


그러면 언제 적상산 사고가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바로 광해군이 집권한 시기입니다. 광해군 6년(1614년)에 적상산성에도 사고를 설치하게 됐고, 인조 11년(1633년) 묘향산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적상산 사고로 옮겨 보관하게 됩니다. 적상산 사고에는 실록 외에도, 아름다운 옥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왕실 족보였던 선원록, 의궤 등도 보관되었다고 해요.


인조 때부터 적상산 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약 300년 간 무사히 보관했지만, 1910년 일제에 병합된 후 조선왕조실록 등이 서울의 규장각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러자 사고는 황폐화되었고, 본래 자리도 1992년 댐 축조로 물에 잠기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죠. 그렇게 유구만 남겨져 있던 적상산 사고는 1997년 선원각 복원을 시작으로 1998년 실록각이 복원되며 제 모습을 찾게 되어 전라북도 기념물 제88호로 선정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고에는 무주도호부, 적상산 사고의 개관 및 연표, 조선왕실 족보 등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추가로, 규장각으로 옮겨져 보관된 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본은 6.25 전쟁 당시 북한으로 반출되어 김일성 종합대학 도서관에서 보관 중이며, 그 일부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해요.


적상호에서 본 적상산 사고_자연특별시무주.jpg ▲적상호에서 본 적상산 사고 ⓒ자연특별시무주

민족의 수난을 함께한 슬픈 역사와 함께 이 사고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고의 배경인 적상산과의 조화인데요! 정상에 있는 호수인 적상호 너머에서 보이는, 적상산 사고가 적상호 그리고 가을철의 붉은 적상산과 어우러지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죠.


적상산 정상까지 도로가 나있습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가며 붉게 물든 적상산의 풍경을 즐기시고, 정상에 도착해 사고를 둘러보며 사고의 한 서린 이야기를 느끼신 후에 적상호 너머로 가서 적상산, 사고, 적상호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떨까요?



머루와인과 함께하는 여행의 마무리, 머루와인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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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와인동굴 ⓒ자연특별시무주

이제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장소입니다! 바로 머루와인동굴인데요? 머루와인동굴은 무주 양수발전소를 건설할 때 굴착 작업용 터널로 사용하던 곳을 머루재배 농가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주고자 2007년 임대 및 리모델링하여 만든 머루와인 저장소 겸 체험공간이에요.


동굴 안 온도는 계절에 따른 온도 차이 없이 평균 14-16도로 유지되어 와인 저장고로 최적의 장소이며, 여름철과 겨울철에 방문하신 여행객분들에게 더위와 추위로부터 잠깐이나마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장소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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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와인동굴 내부 ⓒ자연특별시무주

머루와인동굴의 내부는 무주의 옛 사진과 함께 무주 풍경 사진, 여러 장식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으며, 포토 스팟도 많다고 해요.


머루와인동굴 족욕체험_자연특별시무주.jpg ▲머루와인동굴 족욕체험장 ⓒ자연특별시무주

하지만 머루와인동굴을 무엇보다 매력적인 여행지로 만드는 것은 바로 머루와인 시음과 머루와인 족욕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인데요? 동굴의 끝에는 머루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공간과 족욕체험이 가능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다양한 종류의 머루와인을 온몸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제가 갔던, 그리고 소개드린 여행지는 대부분 차가 있더라도 많이 걸어야 하고, 움직여야 하는 곳이에요. 그렇게 여행 막바지에 갔을 때 여독이 많이 쌓일 텐데, 이곳 머루와인동굴에서 따뜻한 머루와인에 발을 담그고, 와인 한 잔을 마시면서 여독을 푸시며 여행을 마무리하시는 건 어떨까요?


최근 들어 점점 날이 추워지고, 사람들의 옷이 두꺼워지고 있는데요. 곧, 가을은 오고, 무주는 단풍으로 붉게 물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이렇게 갑자기 가을이 온 것처럼 금방 겨울이 올 것 같아 설레는 마음과 함께 이 시간을 잘 즐겨야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단풍이 지기 전 문득 도심에서 벗어나 붉게 물든 무주의 자연 속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무주가 붉게 물든 것처럼, 여러분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물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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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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