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역사가 잠든 곳을 찾아서
이번 역은, 선릉, 선릉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지하철 2호선 강남 구간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자주 들을 안내입니다. 실제로 선릉역은 2024년 12월 기준 하루 평균 약 12만 7천 명이 타고 내릴 만큼 붐비는 역이므로,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아마 2호선이나 분당선을 타면서 한 번쯤 이 안내를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매일매일 들려오는 12만 7천 명의 발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던 나머지, 선릉에 잠들어있던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가 깨어났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들은 일어나서 가장 먼저 어떤 말을 꺼낼까요?
예상 답안은 아마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내가 누군지 아느냐!’
‘이 앞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였느냐?’
이때 여러분이라면 이 세 가지 질문에 뭐라고 답할 것 같나요? 아마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여기가 그만큼 번화가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면 될 것 같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사 시간에 ‘성종’ 하면 ‘경국대전 완성’을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으니 아마 대다수의 사람이 이 내용으로 대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술술 대답이 나왔나요? 선릉을 대답했다면, 옆에 붙어있는 정릉(靖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대답이 술술 나왔나요? 태릉도 잘 대답했나요? 서울 성북구의 정릉(貞陵)은요? 구리시의 동구릉이나 고양시의 창릉은 어땠나요? 아마도 이렇게 질문 공세가 이어지면, 분명히 들어본 이름인데도 어느 순간 말문이 막히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물론 말문이 막혀도 괜찮습니다. 선릉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관련 업무 종사자가 아닌 이상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성종과 정현왕후가 이 말을 듣는다면 뭐라고 생각할까요? 한반도의 통치자였던 자신들이 미래에 이렇게까지 외면당한다는 사실에 절망하지 않을까요?
지금, 이 글을 쓰는 저와,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마찬가지이리라고 생각합니다. 먼 훗날 과거가 될 우리의 현재가, 미래로부터 외면당한다면 아마 우리는 슬픔과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현재가 미래로부터 조명받았을 때 우리는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저는 이 글에서 과거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던 역사의 잠자리, 조선왕릉에 잠든 기억을 잠시 깨워보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잠을 깨운다고 해서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과거를 조명하러 제 발로 찾아온 이들에게, 왕릉이 품은 기억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까요. 지금부터, 조선왕릉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과거의 기억을 깨우기 위해 조선왕릉에 도착하면, 우뚝 서 있는 홍살문이 손님을 반겨줍니다. 홍살문은 화살 여러 개가 하늘 방향으로 꽂혀 있는 붉은 관문으로,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홍살문의 바로 옆에는 격자무늬가 새겨진 사각형 돌바닥이 보이는데, 그 정체는 바로 판위(版位)입니다. 조선시대에 제향을 지낼 때 왕은 능역에 입장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올렸는데, 판위는 그때 왕이 절을 올리던 곳입니다.
왕은 판위에서 절을 올린 이후, 박석(薄石)이 깔린 길을 따라 능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 길을 자세히 보면 좌우의 높이와 폭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양쪽 길의 용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두 길은 각각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라는 이름으로 구분됩니다. 향로는 제향할 때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용도로 난 길이고, 어로는 제향하러 온 왕이 걸어가는 용도의 길입니다.
어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하나의 건물이 나오는데, 바로 정자각입니다. 고무래 정(丁) 자를 닮아서 정자각이라 이름 붙은 이 건물의 용도는, 바로 제향을 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입니다. 따라서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제향 의식은 이곳 정자각에서 치러집니다. 따라서 제향 의식을 치르는 날, 즉 피장자의 기일에 각각의 능을 방문한다면 정자각 앞에서 제향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생생히 참관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정자각 옆에는 몇 가지 부속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데, 각각 비각(碑閣), 수라간(水刺間), 수복방(守僕房)이라는 건물입니다. 비각은 피장자의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건물이고, 수라간은 제향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던 건물입니다. 수복방은 능의 관리자인 ’수복‘이 머무는 공간으로서 지어진 건물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대부분의 조선왕릉은 정자각까지만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실제 무덤이 있는 곳, 즉 봉분 바로 앞까지 발을 들일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봉분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자각 이야기까지만 듣고 끝내버리는 건, 이야기꾼이 발단-전개-위기까지 말을 마친 상황에서 절정-결말을 안 듣고 자리를 떠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 비록 조금은 멀찍이 떨어져서 들어야 하지만, 봉분의 이야기까지 귀담아야 비로소 조선왕릉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온전히 즐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궁능유적본부 등지에서 종종 봉분 앞까지 입장시켜주는 행사를 개최하는데, 거기에 참여할 기회를 잡았을 때 예전에 들었던 봉분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그날의 추억을 더 다채롭게 물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봉분(封墳)은 왕 혹은 왕비가 묻힌 곳으로, 능침(陵寢)이나 능상(陵上)이라고도 불립니다. 한 국가의 최고 군주와 그 배우자의 무덤인 만큼, 봉분 중에는 병풍석(屛風石)을 아래에 두르거나, 난간석(欄干石)을 주위에 둘러 무덤을 보호하는 사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봉분 주위에 각각 양과 호랑이 모양으로 조각된 석물인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두고, 정자각 방향을 제외한 세 방향을 둘러싸는 담장인 곡장(曲墻)을 세워 당대부터 물리적으로나 관념적으로나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큰 노력을 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자각 방향에도 관념적으로 봉분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석물이 있는데, 석인(石人)과 석마(石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석인은 현실의 문인을 상징하는 문석인과, 현실의 무인을 상징하는 무석인으로 나뉘어 무덤의 주인을 보좌하고 호위합니다.
석인과 석마가 양 옆에 도열해있는 가운데, 정중앙에는 석등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석등의 이름은 장명등(長明燈)으로, 사람들은 장명등이 망자를 수호하고 잡귀를 물리쳐준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봉분을 물리적으로, 또 관념적으로 지키기 위해 다양한 석물과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지만, 막상 이렇게 구조물을 겹겹이 세워두면 무덤 주인의 입장에서 다소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봉분 바로 앞에 혼유석(魂遊石)을 두어, 피장자의 혼이 노닐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처럼 조상을 섬기고 보호하려는 정신은, 조선왕릉 곳곳의 구조물과 제향 의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또 이러한 정신은 왕릉 조성 및 관리 방법, 그리고 제향 방법을 담아낸 각종 기록물을 통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과거의 이야기를 상세히 남겨준 덕에, 의례에 담긴 조상 숭배 의식 등의 관념이 잊히지 않고 계승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조선왕릉이 등재될 때 제향 의식과 관련 기록물도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고 등재 요소에 함께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은 이제 역사 속에 잠들었고, 그 잠자리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품었습니다.
선대의 넋이 잠든 왕릉은 그 공간에서 여전히 조선의 꿈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왕릉의 기억은, 이제 한반도를 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칭호와 함께 세계인의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능에 얽힌 이야기를 이제는 가슴 속에 새겼으니, 때로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나러 주변의 왕릉에 한 번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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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서울교통공사, 2024년 12월 서울교통공사 수송실적, http://www.seoulmetro.co.kr/kr/board.do?menuIdx=548&bbsIdx=2218783
코레일, 2024 광역철도 수송실적, https://info.korail.com/info/selectBbsNttView.do?key=867&bbsNo=425&nttNo=21054&searchCtgry=&searchCnd=all&searchKrwd=&integrDeptCode=&pageIndex=1
국가유산포털, ‘인릉 제향’(이미지),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24626&ccbaKdcd=13&ccbaAsno=0001940000000&ccbaCtcd=11
송진욱 외. (2020). <가보자 陵>. 서울: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UNESCO. (2009). Nomination of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for Inscription on the World Heritage List. https://whc.unesco.org/uploads/nominations/1319bi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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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공윤재, 심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