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가요록》, 조선의 맛을 만나다

by YECCO
포계 ©NETFLIX〈흑백요리사2〉

다들 최근 마지막 화가 공개된 〈흑백요리사2〉를 보셨나요? 프로그램을 통해 정말 다양한 음식들이 만들어지고 소개되었는데요, 제게는 그중 임성근 셰프님이 선보인 ‘포계’라는 음식이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치킨의 원조로 불리며 세종대왕이 즐겨 드셨던 음식이자, 조선시대 고조리서에 기록된 음식이라고 소개되었지요.

이 포계가 기록된 고조리서의 정체는 바로 《산가요록》입니다. 이 책에는 포계를 비롯해 무려 230여 가지에 달하는 조리법이 담겨 있는데요. 저는 그중에서도 여섯 가지 음식을 골라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조선시대의 맛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실까요?



《산가요록》, 서민의 삶을 담다


산가요록2.JPG 《산가요록》본문 中 | 사진제공: (재)궁중음식문화재단


음식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산가요록》과 이 책을 쓴 전순의라는 인물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 책은 흔히 떠올리는 조리서와는 조금 다른 성격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산가요록(山家要錄)》은 1450년경, 조선 시대 세종대왕의 건강을 책임졌던 궁중 의관 전순의가 집필한 책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우리나라 요리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고조리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을 단순한 ‘요리책’으로만 부르기에는 다소 부족합니다. 제목에 담긴 ‘산가(山家)’란 산속의 집을 뜻하기도 하지만, 보다 넓게는 당시의 평범한 서민층을 가리키는 말로, 《산가요록》은 서민의 삶에 필요한 지식 전반을 담아낸 종합 생활서이자 농서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책에는 작물 재배와 원예, 축산과 양잠 같은 농업 기술부터 식생활과 저장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온전히 전해진 부분이 바로 조리와 식생활에 관한 대목으로, 식사류는 물론 술과 장을 빚는 법, 식초와 김치 만드는 법, 과일과 채소, 어육을 저장하는 방법까지 모두 합해 230여 가지에 달하는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산가요록》이 조리법을 기록하는 방식에서도 상당히 체계적이라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잔’, ‘사발’, ‘동이’처럼 모호한 단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산가요록》에서는 각 계량 단위의 관계를 비교적 명확하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양조법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합이 일잔이 되고, 이잔이 일작이 되며…”로 시작하는 설명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꽤 실용적인 기록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동절양채(冬節養菜)’, 즉 겨울철 채소 기르기에 대한 설명입니다. 《산가요록》에는 황토벽과 온돌을 이용해 보온하고, 기름 바른 한지 창으로 채광과 통풍을 조절하는 온실 짓는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서양의 난방 온실보다도 170여 년 앞선 기술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책이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법을 넘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 기록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산가요록》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책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농업 전반을 다룬 부분과 문집으로 보이는 후반부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가운데에 있는 조리 관련 내용만큼은 한 장의 낙장도 없이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15세기 조선의 식탁을 비교적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순의, 4명의 왕을 섬긴 의관

이처럼 방대한 기록을 남긴 저자 전순의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전순의는 궁중에서 의약을 담당하던 전의감의 의관으로, 세종·문종·단종·세조에 이르기까지 네 명의 임금을 섬긴 인물입니다. 출신 배경은 미천했지만, 뛰어난 의술로 인정받아 결국 정2품 자헌대부, 오늘날로 치면 장관급에 해당하는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조선 시대 의관은 임금이 승하할 경우 책임을 물어 탄핵당하는 일이 흔했지만, 전순의는 강등을 겪고도 다시 복권되었고, 세조 즉위 이후에는 오히려 승진을 거듭하며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세조실록》에는 전순의가 병들고 노쇠해지자, 그를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어 다른 신하를 불러들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이는 그의 의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이처럼 《산가요록》은 단순한 조리서가 아니라, 왕의 건강을 책임졌던 궁중 의관이 삶과 음식, 그리고 생존의 기술을 함께 정리해 둔 기록입니다. 이제부터 소개할 여섯 가지 음식 역시, 그 안에 담긴 조선시대의 식문화와 생활의 지혜를 함께 들여다볼 수 있는 단서가 되어줄 것입니다.



육면, 조선시대 여름철 보양식

육면 | 사진제공: (재)궁중음식문화재단

육면은 귀한 소고기를 면처럼 활용한 조선시대의 보양 음식입니다. 소고기를 가늘게 채 썰어 밀가루를 입혀 삶아낸 뒤 헹궈 쫄깃한 식감을 살리고, 이를 청장으로 간한 맑은 장국에 넣어 풋배추와 대파를 더해 끓여냅니다. 고기를 주재료로 사용했음에도 기름지지 않고 담백하게 완성되는 점에서, 재료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으려는 조선시대 식문화의 태도가 잘 드러납니다. 곡물 대신 고기를 면으로 삼았다는 발상 자체가, 영양과 조형미를 함께 고려했던 당시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진주면, 알알이 빛나는 메밀 국수

진주면 | 사진제공: (재)궁중음식문화재단

진주면은 메밀로 지은 밥을 여러 번 씻고 데쳐, 알알이 빛나는 면처럼 만들어낸 음식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진주 같은 면 위에 고기볶음과 나물, 그리고 고소한 깨즙을 곁들여 먹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용되는 재료 자체는 소박하지만, 반복되는 손질과 공정을 거쳐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고려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음식의 미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절제된 구성 속에서도 완성도를 놓치지 않은, 정성이 깃든 한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치저비, 꿩으로 만든 수제비

생치저비 | 사진제공: (재)궁중음식문화재단

생치저비는 꿩, 즉 생치의 살을 발라 수제비처럼 끓여낸 궁중의 보양 음식입니다. 밀가루 반죽 대신 꿩 가슴살을 얇게 저며 메밀가루와 녹말가루를 입혀 익혀낸 것이 이 음식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꿩 뼈에 대파와 생강을 더해 우려낸 육수에 부드럽게 익은 꿩 고기 수제비를 넣어 끓여내면,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의 국물이 완성됩니다. 귀한 식재료인 꿩을 뼈부터 살까지 알뜰히 활용하면서도 소화와 영양을 함께 고려한 조리법에서, 옛 선조들의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만두, 바다의 살결로 빚은 만두

어만두 | 사진제공: (재)궁중음식문화재단

어만두는 밀가루 만두피 대신 제철 숭어살을 얇게 포 떠 사용한 여름철 별미입니다. 얇게 저민 숭어살 위에 소고기와 표고버섯, 미나리, 숙주로 만든 만두소를 올려 빚은 뒤 녹말을 묻혀 쪄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특히 한 번 쪄낸 만두를 찬물에 식힌 뒤 다시 녹말을 입혀 한 번 더 찌는 조리 과정은, 만두의 쫄깃한 식감을 살리는 동시에 겉면을 투명하게 만들어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더해줍니다. 생선살의 담백함과 풍성한 만두소가 어우러진 어만두는, 맛과 멋을 모두 고려한 조선시대의 고급 요리라 할 수 있습니다.


산삼좌반, 산의 기운을 담은 보양 반찬

산삼좌반 | 사진제공: (재)궁중음식문화재단

산삼좌반은 더덕을 삶아 두들겨 편 뒤 간장에 재워 말리고, 그 위에 양념한 다진 소고기를 붙여 구워낸 음식입니다. 더덕 특유의 쌉싸름한 향과 고기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깊은 풍미를 만들어내며, 필요에 따라 밀가루즙을 입혀 지져내기도 합니다. 산삼에 버금가는 기운을 지녔다 하여 이름 붙여진 이 음식은, 음식을 통해 몸을 보한다는 약식동원 사상이 잘 드러나는 사례입니다. 일상적인 재료를 활용하면서도 건강과 의미를 함께 담아낸, 조선시대 식탁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별미입니다.


잡병, 여러 재료를 품은 달콤한 떡

잡병 | 사진제공: (재)궁중음식문화재단

잡병은 메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은 반죽을 삶아 꿀과 다양한 고물을 묻혀 먹는 전병류의 음식입니다. ‘잡(雜)’이라는 이름처럼 밤, 대추, 석이버섯, 잣 등 여러 재료를 고물로 사용해 다채로운 맛과 색을 냅니다. 삶아낸 떡을 꿀에 버무려 윤기와 끈기를 더하고, 준비한 고물을 골고루 묻혀 찬합에 담아내면 보기에도 화려한 한 상이 완성됩니다. 단순한 간식을 넘어, 자연에서 얻은 다양한 재료를 조화롭게 담아내려 했던 조선시대의 미적 감각이 잘 드러나는 음식입니다.




11.jpg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된 이미지입니다.


지금까지 《산가요록》이 품고 있는 여섯 가지 특별한 미식의 세계를 거닐어 보았습니다.


숭어의 담백함을 투명하게 감싼 어만두부터, 귀한 재료를 아끼면서도 영양을 더한 육면과 생치저비, 그리고 자연의 색과 맛을 한 그릇에 담아낸 잡병까지. 소개한 음식 하나하나에는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을 넘어, 재료 본연의 가치를 살리고 먹는 이를 배려했던 옛 선조들의 깊은 지혜와 정성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570여 년 전, 어의 전순의가 남긴 이 꼼꼼하고 따뜻한 기록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삶의 지침서가 되어줍니다.


저희가 미처 다 소개하지 못한, 기록 속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조선의 맛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이 짧은 만남이 옛 기록 속의 지혜와 여러분의 오늘 식탁이 다시 만나는 뜻깊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글로 된 설명만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분들을 위해 특별한 영상을 소개합니다. 네이버문화재단과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 원장님이 함께한 프로젝트로, 《산가요록》의 230여 가지 기록 중 엄선된 11가지 음식의 조리 과정을 고스란히 재현했습니다. 전문가의 손끝에서 되살아난 조선의 맛을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 보세요.


https://tv.naver.com/tastybud

또한 여기서 미처 다루지 못한 음식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요리가 궁금하신 분들은, 궁중음식문화재단 홈페이지를 방문하셔서 관련 정보를 확인해 보세요.

http://www.koreanroyalcuisine.org/food/board.php?board=fo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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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 이상민, 공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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