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에게든 배울 수 있다.
"아이에게 뭘 배워요?"
한 여배우가 제작발표회에서 정색을 하며 던진 말이다. 입을 쩍 하고 벌어지게 만들었던 이 기사가 진짜인지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심정으로 검색을 하며 영상을 찾아냈다. 기사로 짐작했었지만 표정과 제스처는 굉장히 극적으로 보였다. 다수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드라마의 제작발표회였기에 옆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입을 꾹 닫고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배우의 대답이 발단이 되었다. 아이들과의 촬영이 어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답변했다. "오래 기다려야 하는 씬들이 많았는데 아이들이 잘해줬어요. 잘 기다리고 열심히 하는 모습에 오히려 제가 배웠어요. 아이들한테 배우며 촬영을 하고 있..."
"잠깐만요! 내가 이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니까."
다급히 말을 끊고 끼어든 선배 여배우이자, 주연의 그녀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곤 상기된 표정과 격앙된 목소리로 그 말을 뱉어냈다.
"아이에게 뭘 배워요? 뭘 잘해도 아이는 아이인 거죠. 아이한테 배울게 뭐가 있어요? 어른이면 잘 가르쳐야죠!" (이하 생략.)
위풍당당한 주연 여배우의 기세에 눌려 공기마저 텁텁할 것 같았던 그곳엔 침묵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어른들 속에 어깨가 움츠려 들어 억지웃음을 짓던 아이들이 있었다.
"어른은 잘 가르쳐야죠." 분명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잘 가르친다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위계와 나이,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일방통행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잘 가르치겠다는 마음만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상대를 가늠하지 못한다. 잘 가르치려면 잘 들어야 한다. 때론 내가 가진 지식과 삶의 연륜을 무색하게 만드는 민낯과 마주해야 한다. 가르치며 배우고, 배우며 가르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테다.
배움의 문턱을 낮추어 함께 바라보며 의견을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고, 가르치며 의문이 생기기도 하며, 배우며 다른 생각을 말할 수도 있다. 어떤 아이들은 배우며 종종 샛길로 들어서서 엉뚱한 답을 하곤 한다. 그럴 때 "그냥 거기서 나와!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가던 길만 집중해."라고 가르치려 든다면 아이들은 더 이상 여러 길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다. 어릴 때부터 시행착오가 긍정의 신호가 되었다면 뭐든 포기하지 않고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을 어른들이 더 많지 않았을까.
워킹데드에서 한 어른이 아이에게 그런말을 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옳은 길을 제시하려고 애를 쓸 순 있지만 앞장서서 이끌어 줄 순 없단다. 길은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거야." 올바른 답을 듣고 안전하게 생각을 정하기 위해 질문을 하였으나, 돌아온 어른의 대답은 스스로 경험하고 시행착오를 거치게 했다. 아주 잘 가르치겠다는 의지보단 그저 생각과 지식을 전하는 사뿐한 마음이 필요하다. 돌아가는 길은 위험하고 멀겠지만, 안전한 하나의 길만 보는 대신 수많은 길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든 배울 수 있다. 다만 누구나 가르칠 순 없다.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는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 파블로 피카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