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방학숙제

방학이몽

by 예담


"엄마 제주에 가고 싶어!"


방학을 2주 앞두고 체험학습을 내고 제주로 훌쩍 떠났다. 방학 때 가도 되었지만 깜찍한 얼굴로 아이들이 입을 모았다. "방학을 쓰는 건 좀 아까운데, 방학 전에 가면 엄청 신날 거야. 엄마 "

한마디로 땡땡이를 향한 굳은 의지다. 알지 그 마음.


요즘은 옛날과 달리 개근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사라졌고,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체험학습을 내고 학기 중에 가족여행을 다니곤 한다. 예전에는 인형이나 장난감, 고급 악기 같은 재화들로 아이들이 어깨를 으스댔다면, 이제는 경험을 자랑하는 시대이다. 내가 경험해본 것, 내가 다녀온 곳,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높아진 자존감을 느끼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다. 꼭 다양한 체험을 한다고 해서 아이가 더 많이 성장하고 똑똑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야가 넓어지는 건 분명하다.


거리낌 없이 도전하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면 그뿐인 좌절 내구성이 강한 아이들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수없이 견뎌본 아이들이다. 아주 행복한 날 뿐만이 아닌, 힘든 날도, 슬프고 기쁜, 무수한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보며 지난한 날들을 견뎌본 아이들은 강하다. 오늘이 가뿐하고 내일이 설렌다.


고백하건대 우리 아이들은 그리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로는 겁쟁이 엄마를 들 수 있겠다. 겁보인 엄마는 세상살이에 적합하지 못했으나 태어났고, 어쩌다 보니 결혼을 하고 호기롭게 아이 둘을 낳았다. "네가 아이 둘을 낳을 줄은 정말 몰랐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왜냐면, 나는 겁보니까! 나도 몰랐다.


남편은 많은 식겁 대잔치를 경험했다. 막달에 내진을 하러 간 산부인과에서 기겁을 하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 지르며 나오는 이상하고 예민한 산모를 어쩔 것이며, 백 미터 앞에 작고 귀여운 개가 있어도 오백 미터를 돌아서 가는 여자 친구는 또 어떠하리!


인사를 드리러 찾아간 예비 시댁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보고 사색이 된 채 한걸음도 떼지 못하던 나에게 "괜찮아. 안 물어. 순해."라는 진부하고 성의 없는 멘트를 날리지 않고 신속한 행동을 취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비행기 공포증 때문에 이륙할 때 땀을 뻘뻘 흘리는 건 또 어떤가! 남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양손에 주먹을 꽉 쥐고 참아내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걱정 대신 장난을 치며 웃겨주었는데, 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듯 실실 웃어주는 남편 덕분에 불안함이 가시곤 했었다. 유머는 심각한 상황에서 약이 될 수도 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을 느슨하게 하여 터질 듯했던 신경을 유연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제는 그 역할을 아들이 해주고 있다. 열 살 아들은 내 옆에서 종알거리며 웃음을 준다.


공중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바보도 같은 인물이었지만 아이를 키우고는 제법 적응하고 변해갔다. 아이들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데 "차에 타. 집으로 가서 화장실 가쟈."라고 할 순 없으니 말이다. 날 닮은 딸은 청결하지 못한 화장실에 민감했기에 휴대용 소독제, 물티슈를 늘 상비해서 다녔다. 먼저 들어가 변기를 한번 닦고 깨끗한지 확인한 후 아이를 들여보내는 나를 보고 친정엄마가 한마디 했다.

"더러운 화장실도 사용해봐야 해. 학교 화장실은 어디 깨끗하니? 중학교 가면 여자화장실이 더해. 그럴 때마다 어디 호텔 화장실로 뛰어갈 거냐? 공중화장실에 적응을 시켜!"


엄마는 언제나 맞는 말 대잔치! 백번 들어도 백만 번 옳은 말이라서 따갑고 감사하고 짜증이 난다. 그래 봤자 시간이 흐르면 짜증 따위는 다 걸러지고, 큰 알맹이로 남는 건 엄마의 조언임을 알기에 가벼이 듣지 않는다.

시나브로 적응하고 있다. 비위생의 세계에 적응하는 연습이라니!


더불어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고생하는 경험을 꾸준히 하고 있다. 하여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나가서 부딪히며 돌아다니기도 하고, 오랜 시간 차를 기다리며, 몸을 비틀어 짜다가 툭 튀어나온 입이 코를 앞지를 때쯤 되면 목적지에 도착해 가쁜 숨을 몰아 쉬기도 한다. 그럴 때 내뱉는 숨은 얼마나 시원한지, 들이마시는 숨은 또 얼마나 맛있는지, 달달한 디저트가 함께라면 그야말로 행복이 심신으로 충족된다.


자라는 아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를 토닥여 일으켰던 순간이 많았다. 어떤 이에게는 쉬운 일들이 다른 누구에게는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일이 되기도 하지만, 회복할 수 있음을. 어디든 휘리릭 떠나진 못하더라도 마음을 가지런하게 정돈하고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못할 것도 없어진다.


[행복의 감각]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는 것, 바로 더 많은 추억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망각곡선을 앞질러라."


아무튼 제주에 다녀왔고, 아이들의 청량한 웃음소리와 소란함이 가득한 여름방학이다. 방학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과 모래알 같은 마음들을 두 손 모아 담아내어 기록하는 것이 나의 작은 여름방학 숙제이다.




마이크 비킹의 [행복의 감각] 중

처음 (누구나 첫 경험을 기억하게 된다.)

오감 (감각은 기억을 주관한다.)

관찰 (온몸으로 집중하기.)

유대 (의미 있는 순간 만들기)

감정 (경험을 마음에 새기기.)

시련 ( 좌절도 성취로 만들기.)

서사 (기억을 직접 설계하다)

기록 (잊지 않고 기록해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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