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 적응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큰 아이는 멀미도 심하지만 후각과 청각에 민감했다. 그렇다고 시각이나 촉각엔 덜한 것도 아니구나. (미각은 선방함. 엄마의 미미한 요리실력덕분에.)여러모로 잘 듣고 잘 보고 잘 맡으며 일상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아이인 걸로.
둘째를 임신하고 예외 없이 엄청난 입덧이 시작되어 구역질을 해대는 나를 본아이는 (화장실을 못 가게 옷깃을 잡아당기며)질색을 했다. 그리하여 첫 어린이집행이 결정되었지. 노란 차를 타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이 울었는가 떠올려보면 수많은 추억들이 고개를 든다. 여느 부모가 그렇듯 애달픔과 믿음, 불안, 걱정, 안도와 후련함 사이를 부유하는 순간이 있었다. 한 줌의 자유를 꽉 쥐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잡고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펼쳐진 손을 보며 이제야 안도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셋이 함께 보내는 시간들에 익숙해졌다. 둘이었을 때 남편은 출장이 잦았고 셋이었을 땐 쏟아지는 업무량에 어김없이 바빴다. 산후조리원에서 신랑 없이 혼자 잠들었던 산모가 나야 나. 아이가 입원했을 때 홀로 병실에서 밤새 꼬인 수액줄을 살피며 아이들을 돌보던 엄마도 나야 나.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다정한 남편 앞에선 어쩐지 부정적인 감정이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했거니와 일찌감치 육아에 독립해서 이기도 했다.
의지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 독립성을 가지고 하는 사랑은 유연하여 배려가 쉬워진다.
주기적으로 집안의 가구배치를 바꾸며 기분전환을 하고, 대청소를 하는 걸 즐기는데 침대와 책장, 소파 따위를 혼자 옮기는 건 이제 일도 아니다. 귀퉁이에 야무지게 마른걸레를 깔고 밀고 들며 뭐든 쓱쓱 움직인다. 퇴근한 남편은 처음 몇 번은 놀란 표정이더니, 햇수가 늘어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반사가 되니 이제는 그러려니 통달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는다. 더러 위치가 바뀐 지도 모를 때도 있으나 그냥 넘어간다.
뭘 따지고 물으며 스무고개를 하는 시절은 지나갔다.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 닦달하지 않으며 잔잔하게 지낸다. '더해빙'처럼 지금 가지고 있는 마음에 집중하려 한다.
예전에 친한 동생이 그런 말을 했었다. "언니, 언니는 보호자가 필요한 것 같아요." 늘 덜렁대는 나를 챙겨주는 남자친구를 보고 한 말이었다.
회식이 끝난 자정이 넘는 시간에 두 시간 거리를 데리러 오는 남자친구를 본 직장상사가 - 택시 불러서 가면 되지. 요란하다. - 웃으며 다음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이렇게나 부끄럽다.
정확히 하자면, 위에 언급한 이들은 각각 다른 이들이고 지나간 인연이다. 나는 사랑을 한 걸까. 그저 갈급한 외로움을 채우려 곁에 누군가를 두려 한 걸까. 추앙의 언저리에서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떠나기도 싫은 그 정도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위태로웠고 독립적이지 못했던 미완의 청춘은 생기 있게 퍼덕이면서도 나약하여 변수가 많았다. 겁 없던 모순의 날들이었다.
우리 셋, 지하철을 타고 영재수업에 다녀오던 어느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서두른 데다 수업을 마친 후 서면으로 가서 서점에서 책도 사고 점심도 해결하며 느적느적 시간을 보내다가 무거운 짐을 메고 지하철에 탄 참이었다. 피로가 몰려왔다. 눈을 크게 뜨고 앉아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둘째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엄마!"
정신을 차리려 눈을 깜박이며 어깨를 펴는 나에게 아이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엄마! 주장이 자면 어떡해. 우리 주장인데."
"아! 엄마가 주장(主將)이야?"
"응. 우리의 주장이잖아."
뭘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차올라서 침을 꼴깍 삼키며 찰랑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이는 이렇게 뜬금없이 귀하게 특별함을 전해준다. 가치를 찾아서 친절하게 말해준다. 잠을 깨우고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데엔 일타강사다.
자연스레 삶의 침식과 퇴적을 거치며 동글동글 유연해지고 단단해짐을 거쳐가고 있는 중이다. 사랑에 대한 책임감은 삶의 이유가 되어 매 순간 나를 각성시킨다.
이왕이면 다정하고 든든한 주장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아이를 보고 웃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전반전도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