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같이 놀고싶은 잼민이
장장 반년이 넘는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소녀는 장편소설을 탈고하고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글을 쓸 때는 한자리에서 다섯 시간도 끄떡 않고 앉아서 물아일체가 된다. 나중에는 엉덩이가 배겨서 일어서나 했더니만 방석을 여러 개 가지고 포개어 앉고 또 쓴다. 몇 시간이 지나면 꼬리뼈가 아프다고 일어나서 소파에 앉아 패드를 들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잠시 기어이 못 참고 글을 쓰러 간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또 영감이 떠올라서 써야 한단다.
남동생은 볼멘소리를 한다. 누나는 이제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맨날 글만 쓰고.
누나가 중학생이 되니 별로라고 한다. 성질만 괴팍해졌다고.
그렇다고 너와 앉아서 소꿉놀이할 군번은 아니지 않으냐.
[아들의 국밥] 편에 나왔던 아이는 아이클레이로 사람을 만들고 레고로 상황을 연출하여 연극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직 순수한 영혼. 하지만 누나는 사춘기가 시작되고부터 말을 하는 게 귀찮으니 이를 어쩔 것이냐. 재잘재잘 상황극을 하고 싶은 동생은 누나에게 다가가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저리 가. 좀 말 좀 시키지 마. 집중이 안되잖아. 잼민아."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은 타격받지 않고 기가 죽지도 않는다.
"어 어디서 꼬릿한 향이 나는데? 아 누나의 방귀냄새였군. 핑크돼지의 냄새가 집안을 잠식했다!"
이라며 도발한다. 정말 잼민이의 스토리는 변하지 않는다. 도발의 주제는 일 년 내내 방귀다.
잼민이의 패턴을 외우고 있는 누나는 반응도 없다. 나는 그 와중에 "잠식"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아들에게 물었다.
"잠식이란 단어는 어떻게 쓴 거야? 어디서 읽은 거지. 와 멋져!"
사춘기딸이 드디어 반응을 한다. 엄마의 동생 칭찬은 못 참지.
"아 엄마! 삼국지나 마법천자문이나 뭐 그런 데서 보고 따라 하는 거겠지 오버 좀 하지 마. 저 단어 사용하는 게 대단할 정도가 아니야. 객관성을 가져!"
"와 말 잘한다. 우리 딸은 아나운서 해도 되겠어."
칭찬공격을 하는 나를 돌아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대꾸 없이 다시 이어폰을 낀다. 그러고 보니 이어폰을 끼고도 우리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네. 조심해야 되겠다.
아이가 탈고한 소설의 제목은 [열다섯 탈북]이다. 첫 장편소설을 기념하여 브런치북에 올려두었다. 아이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수없이 자료를 찾으며 연구했고 북한에 대한 뉴스를 모두 정독하며 메모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북한 아이들의 실태를 알고 충격받고 분노하며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그러한 과정이 필요했다.
허구의 소설이지만 주인공이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아이에게 서평을 전해 주었고 아이는 수줍은 듯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살짝 웃더니 한 템포 올라간 목소리로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를 더해주었다.
표정에는 자부심이 가득했고 자신이 만든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했다.
소설을 완성하는 것은 높은 언덕 위로 커다란 돌 하나를 밀고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지난하고 외로운 혼자만의 레이스를 결국 완주한 아이는 분명 성장해 있었다. 아이는 투고책을 빌려 읽더니, 도서관에 가서 방향이 같은 출판사를 하나하나씩 메모했다. 그리고 투고를 하며 부푼 꿈을 안고 설레어했다.
나는 현실과 꿈의 간극에 대해 말해줘야 했다.
출판사에 투고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나 대단한 일이다. 투고를 함으로써 출판사에서 너의 원고를 읽고 검토한다는 것 자체로도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한 번에 오케이 되어 술술 풀리는 일은 흔치 않다.
요즘은 자비출판사가 많아서 언제든 자비로 출간이 가능해진 시대이다. 그러니 출간 그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영광을 꿈꾸며 취하지 말고, 다만 너의 목표가 무엇인지 잘 생각하고 계속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된다.
일상을 감탄하며 잘 들여다보는 습관을 가지면 바람결에 무엇이 너를 툭 건드릴 거야. 그것이 영감이니 잘 주워 담아서 공들이면 너만의 이야기가 될 거야. 계속하여 새로운 글을 쓰고 네가 원하는 출판사에 투고를 하고 기다리는 일 대신, 또다시 쓰는 것이다. 출간작가가 되어 영광을 누리는 것이 작가가 도달해야 하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를. 읽고 쓰는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글짱이 되어 있지 않겠어.
햇살이 아무리 쏟아져 들어와도 그 햇살을 더욱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덧창이 있어서다. 나만의 시선은 덧창이다. 햇살은 덧창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진다.
- 도시인의 월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