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은 말이 안 통해."
아이가 문을 열고 나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복기해 보기로 한다.
어김없이 수학이 시초였다.
며칠 전부터 방학이라 학원숙제가 많다며 불만을 쏟아내고 발을 까딱거리며 삐딱한 자세로 꾸역꾸역 숙제를 했다. 어제는 하루종일 짜증을 내면서 숙제를 하고 끝난 뒤엔 또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하며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며 공치사를 하길래 받아주었다. 동생은 누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책을 읽고 나는 참을 인을 새기며 모르는 척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주었다. 자신이 정한 오늘의 할 일이 다 끝나자 혼자 마음이 풀려서 생글거리며 동생과 농담을 하는 아이를 보고 짠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럴까 싶어서 공부를 조금만 줄이는 게 어떻냐고 물었더니 강펀치가 날아온다.
-지금 공부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니야 어려워서 그렇지
-어려울 수밖에 없지. 선행인데 어떻게 쉬울 수가 있어. 천천히 해.
-아니 다른 애들은 다 잘 따라 간단 말이야. 나는 이해가 안돼서 혼자 집에서 인강 듣고 가는 거야. 두배로 해야 되니 양이 많은 거야
-방금 전엔 많아서 그런 게 아니라 어려워서라며.
-내가 언제? 안 어려운데? 할 게 많다고!!
대충 이런 대화의 도돌이표이다.
이틀을 참았고 대충 엄마의 인내하는 모습이 보이면 아이는 각성하고 스스로 잠잠해져서 잘하곤 했다. 사춘기가 되고부터 이인忍 삼온穩을 되뇌며 들숨과 날숨을 고르고 있다. 이틀을 참으면 삼일은 평온해지기에 일주일 중 이틀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나만의 사춘기 매뉴얼이다. 일 년째 행하고 있는 결과, 아이가 유순해지고 스스로 뭔가 잘하려는 변화가 보였다. 부모가 믿어준다는 마음에 응답하려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은 매뉴얼을 어김으로 화를 자초했다.
아침부터 심기를 살살 긁었다. 아니다. 아이는 비슷했고, 오늘 내가 긁힌 이유는 내 안에 있었다. 해야 할 것이 있었고 집중해야 했는데 보란 듯이 어제와 같은 행보를 보이는 아이에게 화가 났다. 아니지, 집중이 안 되는 나에게 화가 났다.
-너 자꾸 그렇게 화내면서 공부할 거면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와. 데려다줄 테니까 옷 입어.
-내가 뭐 했는데?
-엄마가 어제도 참고 넘어간 거 너 알지? 그런데 오늘 또 이렇게 행동해? 공부하기 힘든 건 이해해.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기분대로 행동하는 게 맞아? 수학문제 푸는 게 원래 신나고 즐거울 일이 아니잖아. 게다가 선행을 하는데 어떻게 쉬울 수가 있어. 어려운 게 당연하고 틀리는 게 맞잖아. 틀리는 데 스트레스받지 말고 그냥 털어버려. 틀려도 돼. 엄마가 그러잖아. 문제집은 틀리는 게 남는 장사라고. 틀려야 두 번 풀어서 알아가는 게더 많을 거 아니야.
말이 길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이는 듣는 등 마는 둥 인상을 쓰며 구시렁거리고 있다.
-엄마가 하는 말이 다 맞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하지 마. 좋게 말하면 뭐 해. 말이랑 직접 하는 거랑 같아??
엄마가 학원 가고 학교가? 그리고 라떼얘기하지 마. 엄마가 학교 다닐 때는 어쩌고 그거 시작하지 마.
글로 쓰니 또 별게 아닌 것 같은데, 그때의 상황은 긴박했다.
-그리고 엄마가 뭘 참아줬는데? 겨우 어제 참은 거 가지고 그래? 하려면 오늘도 참아줬어야지. 내가 일 년 동안 그래? 지금 선행하면서 방학 때 잠깐 그러는 거잖아. 왜 s가 그럴 때는 달래주고 힘내라고 하면서 나한텐 다르게 해? 차별하지 마.
산으로 간다. 참았어야 했다. 왜 매번 끝은 동생과 비교하며 차별운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시작은 달라도 끝은 항상 똑같다. 동생과 똑같이 사랑하지만 어떻게 같을 수가 있나. 기대가 다르고 행동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모든 게 다르니 엄마가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지 않겠니. 사랑은 같아도 키우는 방식은 다를 수가 있는 거야. 똑같은 그릇에 밥을 담아주는 보육이 아니라 교육을 할 때는 엄마도 이해를 좀 해줘.라고 했어야 하지만 나는 분명히 차가운 표정으로 매정하게 말했다.
-그럼 너는 s처럼 엄마한테 애교도 부리며 다가와서 다정하게 하지 않잖아. 엄마가 팔짱 끼고 말 걸고 친한 척 해도 시큰둥하고. 너도 동생처럼 좀 살갑게 해 봐.
틀렸다. 이놈의 입을 막았어야 했는데. 너무 유치하다.
고양이에게 강아지처럼 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사춘기아이는 절대 참지 않는다. 엄마가 미끼를 던졌으니 물어뜯을 차례다.
-뭐? 그럼 왜 낳았어? 다정하고 애교 많은 s만 키우든가. 나는 나갈래.
가방을 메고 현관으로 나가서 정말 문을 열고 나갔다. 철컥. 쾅.
닫히는 문소리를 듣고 쿵쿵거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사태를 파악한다. 옷을 뭘 입고 나갔더라. 지금 갈 곳이 어디가 있지. 오늘 온도가 몇 도였지? 전화를 해볼까? 따라 나가서 잡았어야 했나? 좀 더 두고 지켜볼까?
어쩔 생각인거지.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 일층에서 서성이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몇 발짝 가지도 못하고 겨우 로비에서 저러고 있는 모양새가 딱 고양이다. 우리 집 고양이 여기 있었네.
나를 보고 다시 걸어 나가려는 아이에게 집에 가자고 했다. 싫다며 할머니집으로 갈 거라고 고개를 돌리지만 어쩐지 풀이 죽은 모양새에 마음이 쓰라린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잘못했다고 꼭 안아주었다. 처음 엄마뱃속에 들어온 너는 나의 영원한 첫사랑이라고.
너무 사랑해서 자꾸만 마음이 넘쳐버리고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하지만 그것은 돌이켜보면 사춘기 아이의 탓이 아니었다. 나의 결핍에서 기인한 불완전함이 너의 어딘가에 숨어들까 두려운 내가 자꾸만 완전한 너를 그리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집에 돌아와 각자 조용히 할 일을 했다. 아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아이는 해야 할 과제들을 바른 자세로 앉아서 해내고 어지럽던 책상정리까지 스스로 했다. 먹던 과자봉지와 컵도 싱크대로 가져다 놓고 핸드폰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바뀐 태도로 잘못을 인정함고 반성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이의 성향은 그런 것이었다. 작은 아이는 정확히 말로 표현하고 시작과 끝을 맺음 하며 감정을 잘 다루는 편이고 큰 아이는 말로 다 하지는 않지만 작은 행동하나하나로, 표정으로 달라짐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과라고 생각한다. 종용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이이니까. 하나하나 잘못을 고치기 위해 서로의 꼬투리를 잡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저 서로를 이해한다. 말이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때론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마음이 더 귀할 때가 있다. 우리 집에는 큰 고양이와 작은 강아지가 산다. 강아지가 거실에서 애교를 부리면 고양이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할 일을 한다. 필요한 것은 강물처럼 온유하고 넓은 시각이다.
예기치 못한 어느 조급한 날엔 어김없이 망각하겠지만 이렇게 계속 쓰면서 자각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