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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사춘기, 서막이 열리고.

사춘기 순한맛.

by 예담


"엄마 나 친구들이랑 피씨방에 가도 돼?"


올 것이 왔다. 침묵하는 나에게 아이는 답을 재촉하는 듯 말을 이어갔다.


"다른 친구들은 다 피씨방에 간단 말이야. 나만 못 가봤어."


우리 집엔 컴퓨터가 없다. 남편과 나는 노트북을 사용하고, 노트북에 게임은 설치할 수 없다고 못 박아 두었기에 아들은 또래친구들처럼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할 수가 없다. 컴퓨터 게임을 모르는 아이는 피씨방에서 하는 게임을 접해본 적이 없다. 물론 해보고 싶거나 궁금할 때도 있었겠지만 쉽게 적응하고 다른 놀잇거리를 찾는 것이 아이들의 특징 아니던가. 그래서 아들은 책을 곧잘 읽었다. 심심하니까. 하여 기꺼이 결핍을 선물했던 터였다.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중2를 관통하고 있는 누나의 뒤를 이어 남동생의 사춘기가`도래하고 있다.

아니, 키가 누나와 엄마를 진즉에 뛰어넘어 173이 된 6학년 아들은 누나의 사춘기 기세에 눌려 그간 마음속으로 홀로 사춘기 호르몬을 감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왜?"


"몰라."


나는 아들에게 높은 밀도의 감정을 쓰고 아들은 나에게 감정을 거두고 있는 시기임을 자각하자 일순간 헛헛해졌다. 어느 집의 막둥이가 그렇듯, 둘째는 살갑고 순순하며 다정함을 지닌 우리 집의 엔돌핀이자 강아지이다. 첫째처럼 기대를 심어놓고 매일 들여다보며 얼만큼 자랐는지 사랑을 핑계로 부모의 욕망을 갈구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큰 기대와 자잘한 조바심이 없으니 일희일비하며 키우지 않게 된다.


예컨대, 큰 아이가 영어말하기 대회나 학교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아오고 시험을 잘 쳤을 때의 기쁨과 둘째 아이가 학교 쪽지시험에서 백점도 아닌 80점을 받아왔을 때의 기쁨의 형태가 달랐다. 큰아이에게 가졌던 기쁨과 격려는 나도 모르게 더 큰 기대감을 안고 힘을 실으며 칭찬해 주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저 오롯이 방긋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다른 시선으로 복기해 보면, 큰아이에게 전해졌을 기쁨과 기대가 아이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겠고, 둘째에게 전해졌을 가벼운 기쁨이 나름의 열과 성을 다했을 아이를 머쓱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도 든다. 아이들은 안다. 부모의 표정, 선생님의 말투와 미묘한 표정에 담긴 의미를 추측하고 어떤 씁쓸함과 기쁨, 때론 무안하고 실망하며 칭찬받고 뿌듯해하는 무수한 감정들을 짊어진다. 작은 어깨에 짊어진 가방의 무게보다 오늘 느낀 감정의 무게가 더 무거운 날들이 있을 것이다.


사춘기가 되면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이 혼란이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한 시간에도 몇 번씩 감정이 뒤엉키는 게 사춘기라 했다.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고치고 싶지만 동시에 엇나가고 싶어지고,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모른 척하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이 가차 없이 아이들을 뒤흔든다.


미국의 세포 생물학자 브루스 립튼 박사는 신념과 생각이 세포의 물리적 상태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념과 생각이 변하면 사람은 달라진다. 내가 나로서 어떤 모습을 가질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현재의 나의 몫이고 미래의 나는 거들뿐이다. 그러니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책에서 읽고 메모해 둔 글귀이다.


극과 극으로 평행을 이루며 달리면 우리는 만날 수 없게 되기에 피씨방을 노래 부르는 아들의 마음을 담아보기로 했다. 단, 엄마와 먼저 가보자고 제안했고 아들은 수락했다. 처음 가보는 피씨방에 아이는 사뭇 놀란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피씨방 환경이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세련된 인테리어와 눈에 보이는 청결을 제외하곤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피씨방에 머무는 어른들의 눈빛과 언행을 아이가 보게 될 것이 두려웠다. 은어와 비속어가 자연스러운 곳에 아이가 오래 머문다면 분명 영향을 받을 것이다.


피씨방을 못 가게 (또래의 문화를 무턱대고 막지도), 그렇다고 허락하기도 싫은 이기적인 양가의 마음을 저울질하며 아이대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염려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먼저 물은 뒤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걱정하는 건 피씨방의 환경이다. 너를 믿지만 사람들이 게임을 하며 욕을 하거나 담배냄새를 풍기거나 하는 요소들이 걱정이 된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그럼에도 피씨방을 엄마가 허락해 주면 어떤 규칙을 스스로 정해두고 갈 것인지 네가 기준을 정해보겠냐 했더니 잔뜩 움츠러들어 눈치 보던 표정을 거두며 빙긋 웃는다.


"엄마 토요일 오전에만 친구들이랑 만나니까 딱 두 시간만 피씨방에서 놀게. 토요일 오전에는 어른들이 거의 없고 우리 학교애들이 많아. 그리고 친구집이나 밖에서 놀 때는 엄마한테 어디 있는지 연락을 할게. 매주 가는 건 아니고 친구들이 모일 때만 갈 거야. 음... 한 달에 두 번이나 세 번? 나쁜 말은 절대 안 따라 해. 걱정하지 마. 조심할게. "


가만있자. 근래 이렇게 말을 길게 했던 적이 있었던가? 흠.


변화를 감지하고 받아들이고 귀 기울이려 한다. 유년기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선례이다. 앞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해 나가야 할 아이들에겐 일구어내는 힘이 필요하다. 변화에 당황하고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되면 아이들은 포기하거나 무모하거나 입과 귀를 닫는 또 다른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는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저 내가 경험했던 유년과 지금의 아이를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내 앞에 서있는 아이를 통해 타임머신을 타보면, 그 무엇보다 간절한 것이 어른이 주는 믿음과 안정감일 테다.


아들은 그 이후에 다섯 번 정도 친구들과 피씨방에 갔다. 토요일 오전, 두 시간 약속은 잘 지켰으며 피씨방에 갔다가 놀이터에서 놀고 친구집에 가거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돌아다니다 채 5시간을 넘기지 않고 식초냄새를 폴폴 풍기며 집으로 귀가했다. 요즘은 뜸하길래 물었더니 피씨방에서 게임을 하면 멀미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고 (총 게임이 1인칭 시점이라 그런 듯했다. ) 냄새도 좋지 않다고 했다.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아이의 흥미를 앗아갔고 관심사는 절로 옮겨갔다. 사춘기는 그런 것이었다. 쉬이 변하고 쉬이 불이 붙는.

그래서 끝이 아님을 안다. 물론 내 생각대로 될리야 만무하다. 다만 두려워말아야지.


주위가 어두워지고 아득해지는 순간에 찰나를 참아내며 작은 빛을 발견해 낼 참이다. 이윽고 시야가 트이면 분명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늘 원점은 공!

공으로 돌아온 아이는 농구를 하고 피구를 하고 배구를 한다.

지치지도 않고 공을 가지고 하루 종일도 놀 수 있는 체력과 에너지가 부럽다. 뻘뻘 땀을 흘리고 들어와 샤워를 하고 개운한 표정으로 포카리를 들이키며 수학도둑 만화책에 빠져있는 너의 쨍한 여름이 아름답다.

너는 피어오르고 나는 무르익어. 우리는 그런 계절을 성실히 지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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