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컴퓨터가 없어.

컴퓨터 대신 공 사주는 엄마

by 예담


"다른 애들은 다 있단 말이야. 나만 없어."


엄마를 자극하는 말. 아빠의 지갑을 한없이 열리게 만드는 저 문장은 아마도 대부분의 아이들의 18번이지 않을까. 내 아이가 뭐가 부족해서? 큰일이라도 생길까 봐 조바심을 내며 지인들에게 물어보고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며 당장이라도 사야 할 듯 종종걸음 칠 일이 절대 아니란 말이다.

전혀 불쌍할 일도 아니고 따돌림받을 일도 아니거니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아이의 투정과 긁어대는 무수한 말들을 견디고 넘기는 것이다. 담담하고 우아하게 목소리 드높이지 않고.


: 응 그래. 그렇구나. 다음에 필요할 때 사줄게. 지금은 쓸 일이 있을 땐 엄마노트북을 사용하도록 해.

(노트북은 컴퓨터용 게임이 안된다. 사양이 안된다고 한다. )


그게 쉽냐고? 무지무지 어렵다. 아이들은 지치지 않고 긁어대기에.

그렇다면 지치지 않고 견디면 된다. 포기하고 사주면 그 순간이야 모두의 기쁨이겠지만 기쁨은 다가올 전쟁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사줘 놓고 못하게 하는 아이러니는 말이 되지 않지 않는가.

사줬으니 지켜서 조금만 하라? 호르몬이 날뛰는 사자 같은 사춘기에게 가당치도 않다.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좀비가 될 것이다.


그렇다. 워킹데드의 광팬인 엄마이지만 현실에서는 좀비와 마주하기 두렵다. 눈이 퀭한 좀비와 닫힌 방문, 환기되지 않아 텁텁한 공기에 질식하고 싶지가 않다. 컴퓨터의 본체가 뜨거워지는 속도와 엄마의 혈압은 정비례할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가 없다. 나와 너를, 우리의 지금을 지켜야 한다.


[집중의 뇌과학]이라는 책에서는 뇌의 휴식을 중요시하고 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을 때 뇌는 디폴트 모드에 들어가고 작동할 준비를 마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시뮬레이션하거나 뇌가 사물의 연관관계를 더 잘 파악하며 지금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반면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지면 전전두엽이 관장하는 고차원적 사고능력은 떨어지고 주의력과 집중력이 동시에 감소하며 뇌의 노화까지 가속화된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에 노출되는 것은 뇌가 디폴트 모드에 돌입하지 못하게 해 결과적으로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든다.


공부를 하다가 잠깐 쉬는 명목하에 컴퓨터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면 결국은 쉴 틈이 없어지고 공부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쉬는 시간에 할 일이 없어 거실에 나왔으면 좋겠다. 기지개를 켜며 어슬렁거리거나 바닥에 드러누워 멍하게 있다가 '심심한데 뭐 하지.' 중얼거리며 할 것을 찾는다면, 시시콜콜한 일들에 대해 엄마에게 조잘댄다면 꽤 괜찮은 쉬는 시간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를 사달라고 노래를 부르던 아들이 통하지 않자 태세를 전환하고 공을 사달라고 했다. 우리 집에 공이 5개도 넘는 것 같은 데 또 다른 공이란다. 중고등 피구공식볼. 내가 보기엔 똑같아 보인다. 다만 가격이 다를 뿐. (몇만 원이나 하는 피구공에 멈칫했지만)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공을 주문해 주었다. 아들은 심심해지면 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피구공을 들고나가 친구를 만나고, 또 어떤 날은 야구공과 글러브를 들고나갔다. 집에서 심심해지면 거실카펫 위에서 공을 차며 놀았다. 하여 거실용으로 쓸 소리 안나는 유아용 공을 주문해 주었고 아들은 만족하는 눈치였다. 기분이다! 귀멸의 칼날 대형 퍼즐도 함께 사주었다. 방학 내내 아들은 공과 퍼즐, 그리고 전자책과 친구가 되어 시간을 보냈다. 물론 핸드폰도 한다. (일주일에 사용해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스스로 아껴서 한다. )


컴퓨터도 게임도 관심이 없는 (호랑이도 안 데려간다는 중2) 딸아이는 방학중 무료한 시간에 갖가지의 취미활동을 한다. 스퀴즈 만들기를 하다가 물감을 꺼내 인물화를 그리고 패드로 일러스트도 그린다. 소설을 쓰는 것은 오랜 취미이고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온갖 책들을 꺼내서 읽기 시작한다. 취미부자인 이 소녀는 학원 숙제 때문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입을 삐쭉 내밀기 일쑤다. 언제 봐도 무언가에 몰입 중이다. 어느 날은 방청소를 하겠다며 반나절에 걸쳐 정리정돈을 깨끗이 해 놓아서 깜짝 놀란적이 있다. (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다시 엉망이 되니 지금 칭찬을 퍼부어 줘야 한다. )


아이들이 6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장을 한 권도 버리지 않고 모아둔 여러 상자들은 이사할 때도 첫 번째로 챙기는 나의 보물이다. 중학생인 딸아이는 일기 쓰는 것을 멈췄지만 아들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직 일기를 쓴다. 언젠가 여행짐을 싸고 있던 중에 내가 한 말에 아이는 이렇게 답했다.

"일정이 바쁠 테니 짐은 최소화하자. 일기장이랑 필통은 챙기지 말고 책만 한 권 넣어."

"엄마 일기를 써야 나는 하루가 끝이 나. 마음이 편해져. 그래서 쓰는 거야. 매일 씻는 것처럼."

아이들은 가끔 일기장을 꺼내어 거실 중앙에 쌓아놓고 만화책을 읽는 것 마냥 낄낄거리며 읽는다. 추억을 거스르며 미소를 머금는다. 그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나에게 와서 종알거리기도 한다. 사춘기를 관통하며 소원해진 남매 사이에 밝은 불이 켜지고 서로를 마주 보고 웃으며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봄의 꽃 같은 순간이다.



행복은 항상 충만에 머물지 않는다. 결핍 속에서 행복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야.

시간이 흐르면 실은 그 순간이 오롯이 충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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