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함에 몸서리를 쳤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세차게 때리고 이내 메말라 있던 땅에 다시 새싹이 움트듯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죄책감과는 별개로 스미는 평온함에 몸서리를 쳤다.
여기 오면 행복할 수 있다고 그렇게 웃었잖아. 내 곁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무너져 내린다. 지금 은주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결국엔 남조선에 왔지만 은주가 없다면 다시 북으로 돌아가도 상관이 없었다. 차라리 은주의 영혼이 머물러 있을 북으로 돌아가고 싶다.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리 내지 않고 끅끅 울음을 토해냈다.
"그래. 그래. 얼마나 힘들지 알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안타까운 상황이 분명 있었겠지."
아줌마는 부드럽게 내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고집스럽게 울기만 했다. 꽉 잠겨버린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태어나서 단 한순간도 어른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는데. 고집부린 적도 없고 항상 고분고분한 나였는데. 상실감에 무너진 고작 열다섯의 나는 내가 보기에도 낯설었다.
온몸의 모든 수분이 빠져나온 듯 기진맥진한 나에게 아줌마는 기다렸다는 듯 따뜻한 국과 밥을 내어 주었다. 소담한 쟁반에 밥과 된장국, 닭알요리와 시금치, 소시지와 김치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던 푸짐하고 정성 가득한 음식들이다. 닭알요리는 평양에 사는 고위층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들었다.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주린배를 달래 봤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저를 잡은 뒤였다. 역시 소문대로 말하는 밥가마가 지은 밥은 윤기가 잘잘 흐르고 꿀맛이다.
"그래 좀 입에 맞니? 입맛이 없어도 먹어야 한다. 천천히 먹어."
아줌마는 웃었다. 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쉬며 아줌마의 미소는 모래성 무너지듯 곧 흐트러졌다. 그리고 까만 눈을 몇 번 파르르 떨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멍한 얼굴로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 치우면서도 귀에 맴도는 다정한 말에 홀린 듯 천천히 꼭꼭 씹었다. 이건 무슨 느낌일까. 은주가 이런 날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애초에 나랑 친해졌다는 게 후회스럽겠지.
이내 찾아든 은주의 생각에 든든해졌던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줌마가 틀어놓은 에미나이들이 쌈짓거리를 하는 이상한 드라마를 쳐다보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남조선 드라마를 보다가 홀려서 잡혀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밖에는 지나가는 차들이 많았다. 줄을 지어 달려가는 멋진 차들은 북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풍경이라 넋을 놓고 보았다.
까만 승용차는 고위간부가 타는 차이기 때문에 잘 볼 수도 뿐더러 내 옆을 지나갈 때 바른 자세로 서서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야 했다. 인민학교에서 선생님이 강조하면서 가르쳐주신 예의범절이었다. 그런 차들이 수도 없이 달리고 있다.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된다. 자세히 보게 된 것은 처음이다.
미세하게 모든 것이 달랐다. 게다가 텔레비전 크기가 엄청나다. 거실의 중앙에서 커다랗게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커도 너무 큰 텔레비전은 아줌마의 허름한 옷과 어울리지 않는다. 헛웃음이 나왔다. 평양사람 중에서도 고위층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남조선은 정말 다르구나. 그것이 실감 나서 가슴이 작게 떨렸다.
어두운 밤이 되니 상점 불빛으로 거리가 예쁘게 물드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반짝거리는 조명이 아주 많았다. 멍하니 밖을 관찰하다가 내가 가져온 손가방을 챙겼다. 모르는 사람의 집에서 밤이 될 동안 경계의 끈을 놓고 있었단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큰일 날 뻔했다.
아줌마는 웃으며 드라마에 눈을 붙인 채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 무섭게 변하는 어른의 모습을 상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이라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그랗게 나를 에워싸고 추궁할 것만 같다. 뒷덜미에 소름이 쫙 돋아서 황급히 현관으로 종종 걸었다.
"너 어디 가니? 필요한 것 있으면 아줌마가 가져다줄게."
누가 들어도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얼음이 된 듯 멈추어 섰다.
"많이 다쳤는데 병원도 싫다고 해서 못 갔잖니. 오늘은 아줌마랑 여기 있자."
다행히 총이 스치긴 했지만 상처가 있고 여기저기 가시에 긁혀서 온몸이 엉망인 상태였다. 그래. 나에게 무슨 해를 끼쳐도 상관없을 것 같다. 어차피 은주가 없는 세상에서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반쯤은 포기한 상태로 아줌마가 내어 준 방과 포근한 이불속에서 날이 밝고 머리가 띵해질 때까지 한없이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