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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은주의 계획

남조선에 오마니가 있어.

by 예담




”고거이 뭐이네? 일기가?"


어느 날 은주가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나는 흠칫하며 일기장을 품에 안고 고개만 끄덕였다.


”우와 공책을 기케 만드니 이쁘다요. 한번 봐도 되갔어?“


은주는 꼬치꼬치 질문을 해댔다. 공책을 보여주며 내심 기분이 좋았다. 은주는 나에 대해 묻더니 묻지도 않은 자기 얘기를 해주었다. 선천성 난청질환을 앓고 있다고 했다. 그게 뭔지 물었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귀에서 무언가를 빼더니 또랑또랑 설명을 이어갔다. 보청기라고 했다.


은주의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 동무들은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은주는 해맑게 웃었다. 은주의 밝은 얼굴에 우리들은 은주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마치 손에 작은 상처가 나서 밴드를 붙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함께 웃었다.


내가 태어나 만난 어떤 사람보다 멋있었던 은주는 내가 꿈꾸던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동무였다.


"아바지는 오마니를 만나러 중국을 통해 남조선으로 가려하다가 잡혀서 체포되었어. 오마니는 몇 년 전에 먼저 남조선으로 가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갔다고 했는데 어케 되었는지 모르갔고... ”


어느 날 은주는 해맑게 웃으며 절망적인 말을 했다. 여느 때처럼 해맑은 웃음인 줄 알았는데 너의 웃음 속에 스쳐 지나간 슬픔이 너무 선명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도 아픔이 있었구나. 은주와 나는 금세 친해졌다. 지난했던 어제와는 달리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감사했다.


"우리 교환일기 하자우. 하루가 끝날 때마다 교환하는 거다요 “


너는 그렇게 말하곤 활짝 웃어 보였다. 그때부터다. 우리의 기록이 시작된 것은.


선잠에 깬 일요일 아침에 창문가에 앉아 있던 새들을 보는 것이나 양지바른 곳에 누워 여유를 부리는 고양이를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을 줄이야. 은주와 매일밤 일기를 바꿔 읽고 쓰는 행복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냐고 묻는다면 내가 그렇게 기다리던 일요일 아침을 잊을 정도였다.


질 나쁜 종이에 꾹꾹 눌러쓴 글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일기를 마주하면 미소 짓게 되었다. 일기를 통해 너의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럴수록 어쩐지 너에게서 초조함이 비쳤다. 무엇이 은주를 그늘지게 하는 걸까.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며 너는 말했다.


”내래 탈북할기다.”


헛소리를 하는 은주를 보며 실소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너의 그 단단한 눈빛은 날 소름 돋게 만들었다. 고작 15살 아이가 탈북이라니. 그렇게 쉽게 말하는 은주가 돌연 가벼워 보였다.


“진짜이다. 남조선에 가서 반드시 오마니를 만날 거이네.”


은주에게서 그런 비장하고 차가운 표정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적어도 농담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기카다가 걸리면 어칼려고 그러는 거이가?


탈북이라니. 열다섯이 탈북을 하다니. 그것도 혼자.


은주가 안전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그래서 계속 말리며 회유했지만 은주의 결심은 확고했다. 정말 은주가 고아원에서 탈출하는 건 아닌지 매일밤 걱정했다. 창문을 다 잠그고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서 선생님께 혼이 나기도 했지만 뭐가 대수랴. 밤마다 은주를 지켜보았다.


은주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나뿐인 동무이자 가족이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던 내가 믿었던 유일한 사람. 닿을 수 없고 금지된 곳에 너는 대체 왜 가고 싶은 걸까?


“내래 오래전에 남조선에 가기로 오마니랑 약속을 했어. 오마니가 남조선에 가면 내 귀를 낫게 해줄 수 있다고 기랬어. 오마니가 정착해 있으면 아바지와 가기로 했는데 모든 게 엉망이 되었지만 가야 되갔어. 아바지는 어케든 탈출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기랬으니 나는 아바지를 믿어.”


은주의 눈은 별처럼 반짝이며 허공을 응시했다. 순간 은주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오마니가 진짜로 남조선에 있다는 기야? ”


“기래. 어쩌면 실패하셨을 수도 있지만... 내 기케 믿어. 내가 직접 찾을 기라요. ”


너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흐리던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혹시 같이 가고 싶으면 가자우. 거기 가면 학교에서 노동도 시키지 않는다고 했어.”


“기딴걸 믿으라고? 일없어. 큰일 날 소리 하지 마라.”


너는 떨리는 두 손을 한 손으로 맞잡으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흔들리지 않는 너의 눈을 보며 나는 세차게 흔들렸다. 탈북에 성공한다 해도 그다음은 어찌할 건지. 남조선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은주에게는 어떤 계획이 있는 걸까. 은주의 미래를 생각하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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