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8. 은주의 죽음

차라리 널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by 예담




“후딱 손전지 비춰보라우.”


바닥에 바짝 엎드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하얀빛 속에 나는 갇히고 말았다. 곧이어 군인들의 얼빠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빠르게 일어나 미친 듯이 내달렸다.


본능적이었다. 그 거대하고 위협적인 총이 너무 무섭게 보였다.


“쏘라우. 뭐 하네. 빨리 쏴. ”


탕!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피부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아.

설마 나 총에 맞은 건가. 죽는 건가.


모든 것을 포기할 때쯔음 머리털이 쭈뼛 서는 공포감에 한 다리로만 우스꽝스럽게 뛰었다. 너무 아프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흘낏 내 다리를 봤을 때 뜨거운 피가 공중으로 튀는 끔찍한 장면을 보고 토할 뻔했다. 거의 숨이 멈출 지경이었다. 아니, 차라리 숨이 지금 멈추어준다면 고통과 두려움이 사라질까.


피보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며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무작정 뛰었다.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지만 숨을 만한 곳을 찾아 몸을 숨기고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았다. 주머니에 든 손수건을 꺼내서 상처부위를 꽁꽁 묶었다. 손수건이 이내 붉게 물들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내가 아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그 와중에도 피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린다.


그치지 않는 피가 땅을 적시고 비릿한 피냄새에 처음 월경을 시작한 몇 달 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때 상병 한 명이 손전지를 높게 치켜들어 비추었다. 아까보다 더 눈부신 빛이 온 사방을 비추자 외마디의 탄식과 함께 어찌할 바 모르는 은주가 사정없이 드러났다. 다급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은주를 구해야 한다. 여기서 지금 나가야 한다. 나 때문에 드러난 은주를 구해야 했지만 내 몸은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뭐이가? 아이 아닙네까?”


누군가가 짧게 탄식했다.


“뭐 하네? 쏴라우! 퍼뜩 쏴라!”


상병 한 명이 총을 들고 놀란 듯 서 있자 뒤쪽에 서 있던 턱이 길고 광대가 튀어나온 군인이 얼굴을 부라리며 총을 치켜들었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 끔찍한 광경을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탕!


허리가 뒤틀리고 은주는 격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곧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그 충격으로 죽을 듯 아팠던 다리의 고통이 사라졌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나보다 수백 배 수천 배 고통스러울 은주가 눈앞에 있다.


군인들은 조금의 주춤거림도 없이 곧 나를 찾겠다며 뒤편으로 사라진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처참히 누워서 피를 흘리고 있는 은주를 안고 소리 없이 운다. 눈물이 연분홍색 은주의 옷에 떨어지기도 전에 핏물이 먼저 자리를 점한다.


분홍색 니트는 은주가 가장 아끼던 옷이었다. 나는 내 옷깃을 그러모아 은주의 피를 닦아내며 엉엉 울었다. 눈물이 당도한 부분은 아직 분홍색이었다. 나는 은주의 옷에 핏빛이 없어질 때까지만 울 것이다. 그러면 너는 눈을 뜨고 여봐란듯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겠지.


-괜찮아 어서 가자.


거짓말이면 좋겠다. 네가 죽은 것도, 탈북을 결심한 것도.


차라리 널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세상을 잃은 기분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7. 세상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