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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줌마와 아저씨

은주와 닮은 사람

by 예담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뒤틀린 듯 아파와서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새벽 1시. 식은땀을 흘리며 또 은주꿈을 꾸었다. 느릿느릿 걸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묶고 세수를 했다. 붕대를 감은 다리가 불편하다. 깨끗이 몸을 씻고 뜨거운 탕 안에 몸을 담그는 상상을 해본다.


아줌마와 아저씨가 문 앞에 둔 가방과 학용품을 흘깃 보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꿈을 꾸지 않기를 바라며.


“영애야 일어나.”


아줌마가 퉁퉁 부은 얼굴로 나를 흔든다.


잔뜩 긴장한 채 일어난 내 앞에는 책가방이 있었다. 아줌마가 알려주는 대로 교복을 입고 머리카락을 올려 묶었다. 촌스러워 보이진 않을까 잔머리를 몇 가닥 빼어서 자연스러운 척해본다.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보았다.


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마음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들자마자 은주에게 미안해져 고개를 떨군다.


“뭐 하니. 어서어서 많이 먹어.”


아줌마는 답답하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 내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섰다. 살을 포동포동 찌워서 팔아먹을 기색이다. 아줌마는 아침부터 야채와 고기를 다져 넣은 볶음밥을 뚝딱 만들어주셨다. 이게 꿈이 아닌가 싶을 만큼 맛있다. 옥수수속대죽 같은 걸 먹을 때는 주린배를 채우기에만 여념 했지만 지금은 맛을 음미해 본다.


아주 천천히 씹으며 황홀함을 느꼈다. 고기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데다 간을 했는지 달고 짠맛이 동시에 난다. 애호박은 달큰하고 당근과 양파는 볶음밥을 풍요롭게 한다. 게다가 그 위에 닭알을 덮었다. 사치의 끝이다. 이 아주매는 정치를 하는 고위간부일지도 모른다. 조심해야겠다. 그런데 지나치게 맛있으니까 또 은주가 생각나서 풀이 죽는다.


“또또또 왜 그렇게 울상이니? 이젠 웃어도 된다. ”


연신 숟가락을 놀리며 잘 먹으면서도 울상인 나를 걱정하며 등을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정성 가득했던 밥은 급하게 먹었음에도 속에서 잘 소화되었다. 아줌마와 학교를 향해 걸으며 기묘한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를 주위로 잘 둘러있는 방파제.


그 바다를 본 순간 은주가 말했던 아름다움의 뜻을 알았다. 방파제 주위로 자박자박 걷다 보면 오밀조밀한 가게들이 몰려있는 골목이 나오는데 그 골목벽에는 거대한 고래와 작은 바다생물들이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연파란색의 고래옆으로 바다생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게 왠지 모르게 멋있어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래의 색이 남색이 아니라 연한 파란색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다 와간다. 네가 말을 안 하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얼마나 슬픈 일이 있었을까. 하지만 탈북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잖니. 너같이 어린애가 함부로 이런 일을 벌이면 안 돼. 그래도 하늘이 도왔지 뭐니. 너의 용기에 하늘이 도왔나 보다.”


“그러면 은주는요?”


하늘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길을 잃은 듯 입안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나는 은주처럼 간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라던 남조선에 와서 엄마를 만나 행복해져야 할 사람은 은주였다. 백번 물어도 그렇게 말할 거다. 몇 번을 혼자 연습해서 풀숲을 통한 길조차 외워둔 은주였다. 두려움에 떠는 날 다독여주고 절망 앞에서 언제나 희망을 불러낸 사람도 은주였다.


그런데 은주는요? 어떻게 하늘은 나를 도와요? 은주를 도왔어야죠. 원망 어린 눈으로 유독 파아랗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골목 몇 개를 더 지나서 학교에 도착하게 되었다. 인민학교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멋진 건물에 웅장한 운동장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북에서 공사를 할 때 과제로 노동을 하러 다니던 날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놀림을 받아도 괜찮다. 한겨울과 한여름에 건설노동만 시키지 않는다면 다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잘 다녀오렴, 분명히 잘할 거야. 아, 7반이야. “


참 긍정적인 사람이다. 아줌마가 지닌 밝고 활기찬 말투와 긍정의 언어는 은주와 참 많이 닮아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또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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