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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남조선의 동무

낡은 구멍가게

by 예담



이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갈 때 나는 종종 길을 헤매었다.


아줌마는 길을 알려주고 끈질기게 혼자 오라고 했다. 적응을 시키려는 뜻인 걸 알았지만 도저히 비슷하게 생긴 많은 골목을 한 번에 통과할 수가 없었다. 액세서리 상점 앞에서 한참을 구경하고 큰 문구점에 들어가서 아줌마에게 받은 용돈으로 필통과 메모지를 샀다. 길고양이를 보며 쫓아가다가 모퉁이에 미용실이 있는 골목을 지나쳐버렸다. 날은 저무는데 골목을 아무리 돌아도 파란 지붕이 나오지 않자 긴장과 함께 조급해졌다. 내내 혼자이고 싶었는데 막상 혼자이니 너무 무섭다.


해가 저물고 어두컴컴해지자 가게들이 달라 보여서 더 길을 찾기가 어렵다. 지수빈이 사는 아파트는 학교 바로 앞이라 길을 잃을 걱정은 없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근처에 있는 불이 켜져 있는 가게로 무작정 들어갔다. 손전화를 빌려서 아줌마한테 연락을 해야겠다.


낡은 구멍가게에서 눈앞에 마주한 간식거리들과 식자재들을 보니 이곳은 내가 살던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 들어 여기저기 둘러보며 안정을 찾으려 했다. 가게 구석구석을 살펴도 누군가가 보이지 않아 그냥 나가려고 하는데 가게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수빈아 손님 왔다. 나가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미줄에 걸린 작은 날벌레라도 된 듯 이곳을 벗어나려고 허둥지둥거렸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반장 지수빈이다. 식은땀이 흘러내려서 모른 척 가게를 나가려는데 그 아이가 한발 빨랐다.


"너 영애 맞지? 여기서 뭐 해? 뭐 사러 온 거야?"


첫날과 다름없이 또 대답은 듣지도 않고 한 번에 여러 개의 질문을 빠르게 던졌다. 신경이 곤두섰지만 숨을 크게 쉰 뒤 말을 이었다. 뒤죽박죽 섞여버린 일들을 남조선의 언어로 간단하고 재치 있게 설명하는 것은 지금 나에겐 무척 까다로운 일이었다.


"거 미안한데 내래 손전화기가 없어서 빌려주갔어?“


”왜? 무슨 일 있어?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들이밀며 다가오는 저 아이는 아마 내가 말해줄 때까지 물어볼 것이다.


”사실은 집으로 가는 길을 잘 모르갔어."


"아 그 주택골목. 알아. 근처인데 같이 가자."


수빈이는 옅게 웃었다. 수빈이를 따라서 걸었다. 쓰레기봉투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샛길을 지나자 낯익은 골목이 보였다. 찾았다. 파란 대문의 아줌마 집!


바로 앞에 두고 못 찾았다니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수빈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르겠으면 언제든 말해. 내가 여기서 오래 살았거든 지리에 빠삭하다구!"


수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되던 마음이 풀어지며 편안해졌다.


"깜깜한데 혼자 갈 수 있갔어? 내 이제 길 알았으니 상점까지 같이 가자우."


"뭐??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어서 들어가. 내일 봐 영애야 "


수빈이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재빨리 뛰어갔다. 참 특이한 애였다. 유일하게 나를 편견 없이 대해주는 남조선의 동무. 수빈이는 굳건하게 닫혀진 내 마음의 문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열 수 있는 동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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