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늦었니?
"왜 이렇게 늦었니?"
아줌마가 달려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화들짝 놀란 나는 아줌마의 품을 벗어나려 몸을 베베 꼬았다.
"길이 어려웠습네다. 골목을 잘못 들어서 기랬디요. "
”그랬구나. 고생했다. 자 손 씻고 밥 먹자. “
아줌마는 자초지종을 묻지 않고 서둘러 주방으로 가더니, 새하얀 밥을 소복이 담아 팔팔 끓는 찌개와 갖가지 반찬들을 함께 식탁에 차렸다. 내 입에 음식이 들어가기만을 하루종일 기다린 사람처럼 신이 나서 나의 끼니를 챙기는 아줌마가 나를 포동포동 살찌워서 정말 중국에 팔아버리는 상상을 하니 으스스하다. 그게 아니라면 왜 처음 보는 북한아이를 이토록 귀하게 대하는 건지, 나에게 잘해주는 진짜 이유가 뭔지 찾아야겠다.
학교에서 먹은 급식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은 터라 입에 침이 잔뜩 고였다.
"잘 먹겠습네다."
인사를 하고 밥을 떠먹었다. 따뜻한 밥과 국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입맛이 돌아 황급히 밥을 먹어치웠다. 아줌마의 요리실력은 언제 봐도 놀랍다. 물론 아줌마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먹어본 음식 중 단연코 일등이다. 아줌마의 밥을 먹고 있을 때는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힘든 기억들과 오늘 하루의 고단함, 그리고 내일의 걱정 같은 것들이 모두 잊히고 오롯이 몸과 마음이 따뜻하게 부를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애야"
나지막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순간 수저를 놓칠 뻔했다. 목소리에 파장을 그려본다면 아마 은주와 같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내 이름을 부르는 음정과 억양, 말투에 묻어있는 온기들이 너무나 닮아서 자꾸만 섬뜩하며 놀래곤 한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우리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르잖니. 괜찮다면 탈북을 어쩌다가 하게 되었는지 내게 말해주겠니? 네 처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거든."
아줌마의 밥에는 무엇이 들었길래 내 마음을 이렇게 약하게 만들까. 내가 입을 닫거나 퉁명하게 대답하지 못하도록 밥을 먹여서 구겨진 마음을 펴놓은 뒤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줌마의 술수다. 나는 언제나 그 술수에 무장해제 되어버린다.
"고저 동무가 하자고 해서 따라나선 거였습네다...그 동무는 저에게 전부였으니까요.. ”
"친구는 남조선에 왜 가려고 한 거니? “
”오마니가 있다고 했습네다. 아바지는 탈북가족이 있다는 것이 발각되어 잡혀가고 동무는 고아원으로 왔습네다. 오마니가 했던 것처럼 낚싯배를 타고 탈북을 하갔다고 했습네다. 부모가 없으면은 중국에 팔려갈 수도 있다고 아바지가 어케든 도망갈 기회를 엿보라 했다고 기켓습네다. 기칸데 제가 다 망쳐버렸습네다.."
내가 남조선에 와서 이렇게 말을 길게 한 적이 있던가. 줄줄줄 말이 이어졌다. 아줌마한테는 다 말하고 싶었다. 말을 하면서 마음 한편에 고여있던 눈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다 털어내고 싶어서 훌쩍거리며 허겁지겁 말을 이어가는 데 뭔가 이상하다.
아줌마는 내가 말을 할 때면 꼭 중간중간에 추임새를 넣어 주시거나 등을 쓰다듬어 주셨었다. 말도 체할 수가 있으니 천천히 해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런 아줌마가 굳어있다. 눈빛은 넋이 나가있고 입은 반쯤 열린 채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아줌마?”
내가 몇 번을 부르고서야 아줌마는 고개를 돌리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 그렇구나. "
아줌마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일 뿐이었다. 뭔가 넋이 나간 듯 불안해 보였지만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멈춰준 아줌마 덕분에 나는 숨통이 트인 듯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아줌마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아줌마의 마른 입술이 몇 번이나 옴짝달싹하며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는데 나의 착각인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줌마도 말하기 힘든 사연이 있을 수도 있기에 입을 다물고 꽤나 오랫동안 앞에 앉아있어 주었지만 아줌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