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smile
아버님의 인지능력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을 때, 이미 치매는 꽤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가족이 아니면 전혀 치매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상으로 보였고, 지극히 정상적으로 행동하셨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병의 속도가 그렇게나 빠를 줄은 짐작 못했다. (아니,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짐작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죄스럽고 송구하기만 하다.)
치매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것은 극히 자극적인 치매의 일부이다. 치매는 인지능력이 차츰 저하되면서 나중에는 본성만 남게 되기에, 드라마에서 그렇게나 밥을 먹고도 "밥 달라" "어서 달라" "내가 언제 먹었냐" 하는 대사가 나올법했던 것이다.
아버님은 치매라고 하기엔 너무나 점잖으셨다. 신사처럼 예의 있게 웃는 낯이셨다. 다만 말수가 적어지고 행동이 차츰 느려지셨다.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시고 허허 웃으시던 아버님은 이제 묻는 말에도 대답이 없으시다. 그저 바라보고 웃으신다. 깊고도 멍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그토록 다정하게.
나는 그 눈빛이 외로워서, 말간 웃음 속의 슬픔에 자꾸만 눈이 따가워졌다. 눈물을 참느라 껌벅거리면 목구멍이 뜨거워져 마른침을 몇 번이고 삼켜댔다.
검사를 받으러 간 대학병원에서, 보통 치매와는 다른 점들이 몇 가지 있어서 교수님께서도 특이한 경우라 논문에 쓰고 싶으니 추가 검사를 몇 개 더 해도 될지 물으셨다고 했다. (물론, 비용은 본인이 부담하시겠다고.) 일반적인 치매와 다른 뇌가 쪼그라들고 있는 경우라고 했다. 진행상태도 빠르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착한 치매. 본래 점잖고 성품이 바르신 분이기 때문에 리셋이 되어도 남아있는 본성이 그런 것이었다. 같은 치매 증상이더라도 성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그저 말수가 줄어든 보통의 할아버지 같아 보이는 정도랄까. 표정도 늘 평온하시고 감정의 변화가 크지 않았기에 우리는 더러 헷갈렸다. 낫고 있는 거라 믿기도 했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치매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아버님의 뇌는 그렇게 작아지고 오그라들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허둥대는 마음들 사이에도 아버님은 온화하게 웃고 계셨다.
언제나 만나면 하시는 첫마디가 있었다. " 아버지 어머니는 다 건강하시지?" 변치 않고 들을 줄 알았던 그 인사가 끊겼던 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실감이 나자 목이 잠기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대화가 줄어가고, 지금은 거의 듣기만 하신다. 말귀는 알아들으시지만 대답이 없으신 아버님을 뵈면 마음이 아려왔다. 손주들이 오면 미소를 머금으시며 뒷짐을 지신채 바라보시는 눈빛은 이따금씩 생기가 돌았다. 아이들이 할아버지에게 장난을 걸 때도 한결같이 웃으신다.
그저 웃어주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아이들은 말한다.
"할아버지는 왜 웃기만 해요?"
그럼 다시 할아버지는 대답하시지. 웃음으로.
그러니 아이들은 치매 걸린 할아버지가 두렵지 않다. 되려 곁에서 장난치고 말을 걸며 머무는 이유는 할아버지의 웃음이 아이들을 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후회가 사무친다. 코로나가 오기 전에 아버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걸. 증상이 시작되기 전에 여행이라도 다녀올걸. 함께 한 여행이 몇 번이었는지 손꼽아보며 남편과 뒤늦은 회한을 나누었다.
그래. 그때 여행에서는 아버님이 참 정정하셨는데, 영원할 줄 알았지.
먹을 갈며 서예를 즐기시고 그림실력도 출중하셨던 아버님은 건강에도 큰 문제가 없었기에 별다른 걱정 없이 노후를 보내리라 믿었었다.
준비되지 않은 정신적인 이별은 그렇게 우리를 덮쳤다.
요양병원은 절대 보낼 수 없다는 어머님의 뜻에 따라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을 보내고 계시지만, 별일이 없어도 불안과 걱정에 흔들리고 휩싸인다.
첫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몸조리 중에 아버님께 왔던 엽서 한 장.
이렇게 다정하게 사랑을 주는 분이셨음을 늘 잊지 말아야지.
"아버님 덕분에 몸조리하며 마음이 따뜻해졌었어요. 행복은 만들어가는 거라던 말씀을 잊지 않아요 "
멍한 눈빛 속에 힘껏 생기를 담아 웃어주시는 아버님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찐득한 뜨거움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른다. 부디 천천히 오래 함께 있어주시길.
다만 우리는 웃는다.
슬픔 속에도 웃으며, 사랑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