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라는 호칭에는 예의와 존중의 마음이 담겨 있다. 가르치는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 선생님이고, 타인을 높여 이르는 말, 어떤 부분에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아저씨' '저기요''아줌마''아가씨''할머니''할아버지'같은 호칭 대신, 잠깐 지나치는 타인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중의 호칭을 붙여 말을 건넨다는 것은 말을 하는 이의 인격이다.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크게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 정도는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소한 언행들도 '선생님'은 달랐으면 한다. 일상으로 돌아간 모습과 학교에서 보이는 모습이 극적으로 다르다 할지라도. 특히나 초등학생들에게 보이는 선생님의 모습은 과장하자면 하나의 사회이자, 그들의 대통령이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엄마의 품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아이는 자라서 유치원, 학교를 거치며 나름의 관계를 맺게 된다. 차츰차츰 성장해 나간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을 하며 태어나서 느껴 본 가장 큰 긴장감을 가지게 된다. 더불어 약간의 좌절감도. 세상의 중심은 우리 가족이고 나는 무엇이든 최고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훌륭한 친구들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내가 노력을 했지만 잘되지 않는 것도 있음을 자각한다. 좌절과 함께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좌절하고 의기소침해지기도 하지만 극복해낼 수 있는 힘과 의지는 어디에서 나올까?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보고 배운 부모의 삶의 태도에 체화되어, 혹은 타고난 성향과 환경에 의해서 저마다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결국은 시간차이고 언젠가는 모두 극복해내겠지만 유독 힘든 아이들이 있다. 좌절의 경험이 부족했던 아이들,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들은 작은 일에도 쿵쿵 뛰는 심장을 달래 가며 갈팡질팡한다.
선생님이 필요한 순간이다. 집에서는 느슨한 마음이었기에 부모가 보지 못했던, 아이의 표정과 마음들은 집밖에서 마주친 수없이 많은 순간들 속에 반짝이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잘하고 싶어.' '칭찬받고 싶어.' '선생님이 다정하게 말해주면 좋겠어.' '친구들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나도 열심히 했는데 또 졌어.' '사실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마음속에 눈물이 맺힐 때 토닥여줄 수 있는 선생님이 있다면 괜찮다. 어느 때고 일어설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이 정도쯤이야 뭐. 하는 단단한 마음이 기분 좋게 자리 잡는다. 선생님이 나를 보고 웃어준다면.
나의 실수에 등을 토닥이며 웃어주는 선생님이 있다면 실수는 실패가 아닌 성공의 디딤돌이 되고야 만다. 작은 성공에 크게 환호해주는 선생님이 있다면 작은 동그라미는 번지듯 커지고, 더 성실히 잘 해내고 싶다는 의지가 생긴다. 스치듯 지나갔던, 나의 부끄러움이 묻어서 젖어버린 발표를 탁탁 펼쳐서 잘했다고 곱게 말려주는 선생님이 있다면 부끄러움도 차츰차츰 사라져 간다. 언제 그랬냐는 듯 소리를 높여 나의 생각을 전할 수 있게 된다.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런 선생님을 만난 일년은 행복하고도 그 후로 오랫동안 힘들 때마다 꺼내어 들이킬 수 있는 에너지 드링크가 되어준다.
나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이원회 선생님, 박노찬 교장선생님, 중학교 3학년 때 정원희 선생님. 소중한 선생님과 함께하는 일 년은 아이의 마음을 성장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성적도 향상시킨다.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 더 좋은 내가 되고자 하는 긍정의 마음 덕분이다. 선생님은 공부를 가르침과 동시에 긍정의 마음을 심어주셨다. 그 작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다시 작은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을 때, 교육서적을 읽을 때, 몇 번이고 선생님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되었음을... 흉내 낼 수 없는 진심의 순간들은 마음 구석구석 박혀서 언제고 찾아왔다. (각 선생님에 대한 글은 따로 써야지. 귀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이니까.)
너무나 멋져서 '우와'하며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게 되는 어른보단 수더분하지만 따뜻해서 기대고 싶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쉽게 말 걸 수 있는 선생님, 시답지 않은 이야기도 들어주는 선생님, 아이들의 점수가 아닌 각자가 지니고 있는 장점을 기억하고 북돋아주는 선생님, 왼손잡이에게 오른손 쓰기를 강요하지 않는 선생님, 점수를 매길 때 틀린 표시를 크게 하지 않는 선생님, 규칙을 어긴 아이를 훈육할 때 감정을 담지 않고 담백하게 말하는 선생님, 반대로 칭찬을 할 때 감정을 가득 담는 선생님, 내가 되고 싶었던 어른이자 선생님은 그런 모습이었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 요즘은 아이들에게 친절한 어른을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말을 걸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어른이 있으면 피하거나, 주위의 다른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메마른 가르침이 달갑지 않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둥글게 둥글게 손을 잡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동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사나운 늑대가 나쁘고, 순해 보이는 양이 반드시 착한 것만은 아니야. 외모와 내면은 너의 예상과는 다를 수 있단다. 외모를 보고 상대를 평가하지 말고, 너에게 친절하다고 반드시 믿어서도 안되고, 퉁명스럽다고 꼭 나쁜 사람도 아니야."
고작 그런 말들을 아이들에게 해주며 마음이 한없이 흔들렸다. 바람이 불어 흔들리더라도 잠잠해지면 다시 제자리를 찾는 코스모스처럼,
좋은 어른의 기준에 대해 아이들에게 어떻게 알려주면 좋을지 아직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이들은 내가 어렸을 때처럼 각자의 이상적인 어른이 어렴풋하게 그려졌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터지지 않는 풍선이 가득해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면 언제든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오늘도,내일도 따뜻한 풍선을 불어줘야지.
그치만 감정풍선을 잘 지키는 건 언제나 너의 몫이야.
바로 가장 작은 것, 가장 나지막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한 번의 숨결, 순간의 눈길, 이처럼 작은 것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다. 쉿!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