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이는 어제의 (E북) 영어 독서량을 확인했다. 순위가 내려갔다. 어제는 할머니 병원에 함께 다녀온 날이었기 때문에 할 시간이 부족했다. 당연히 평소에 하던 분량보다 권수가 적었음을 아이는 알고 있지만 괜찮다 했다. 할머니 병원에 함께 간 것도 아이의 선택이었고, 하루에 해야 할 공부의 양과 숙제는 스스로 정하고 책임지기에 나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는다. 분명히 어제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아침에 표정이 샐쭉하다. 어제 하지 못했던 학습량으로 순위가 떨어졌음을 확인하자마자 다급히 책상에 앉았다.
( 순위가 무엇이냐 하면, 영어독서 후에 내용에 따른 학습을 잘 완료하면 포인트가 주어진다. 책은 잘 읽었지만 내용을 잘못 이해했거나, 줄거리 순서 및 내용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포인트를 받지 못한다. 그러니 집중해서 영어독서를 해야 하고, 모르는 부분은 노트에 적어가며 애쓰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렇지만 감이 최고다. 독서의 시간이 적금처럼 쌓이고, 자연스레 영어독서에 대한 감이 생긴 아이는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유추하여 뜻을 알아내고, 단어량과 내용의 깊이에 맞추어 정독을 하기도 속독을 하기도 했다. 물론 즐기면서 탐독을 할 때 가장 눈빛이 빛났다.)
사과를 깎아서 접시에 예쁘게 담고, 미역국에 밥을 말아서 식탁에 놓고, 그 옆에 식사 후 먹을 비타민과 유산균을 가지런히 두고, 미리 챙겨둔 아이의 옷과 양말을 재차 확인했다.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다. 눈을 비비고 나와 화장실에 가서 씻고, 옷을 입고, 식탁에 앉는 게 자연스러운데.. 오늘은 어째 자고 일어난 아이의 눈이 또렷하다. 눈을 반쯤 감은채 비비고 나와 흐느적거리며 화장실을 향하지도 않는다. 목적이 분명한 내비게이션처럼 책상으로 직진한다.
오 마이 갓!
거실 시계로 눈을 돌려보니 30분 남짓 남았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인데 앙다문 입술로 의지를 밝히며, 기어이 책상에 앉아 영어독서를 시작한다. 아아아~~ 나는 뜨거운 기운이 치밀고, 뜨거웠던 미역국은 먹기 좋게 식었다. 지금 먹어야 딱 좋은데 너는 오지 않겠지. 나는 너에게 잔소리를 열 번쯤 하고 싶지만 말을 하면 오늘의 기분이 망쳐질까 봐 몇 번이고 꿀꺽 삼켜냈다. 그때까진 정말 괜찮았잖아 우리!
촉박한 시간 탓에 아이는 정독을 할 수 없었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학습 포인트를 얻지 못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아침을 먹지 않겠다며 미역국을 거절한 아이와 거절을 거절하고 싶은 나, 우리 사이엔 싸늘함이 감돌았다. 초등 2학년 남동생은 차가운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어제완 다르게 슥슥 삭삭 모든 학교 갈 준비를 스스로 끝냈다. 뾰족한 말은 하지 않았으나 우린 화가 나 있었고, 내뱉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서로를(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터덜터덜 학교를 걸어가며 아이는 말이 없었다. 요즘 들어 아침에 한 번씩 그러는 버릇을 고쳐줄 테다! 나도 고집을 부리며 두 모녀가 입을 앙다문 채 학교를 향했지만, 뭐 결과야 뻔하지 않나. 교문 앞에 다다라서야 아이를 안아주었다. "학교 잘 다녀와. 학교 다녀와서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너 좋아하는 책 읽기만 실컷 해. 치아바타에 크림치즈 잔뜩 발라놓을게. 좋은 하루 보내기야. 엄마도 좋은 하루 보낼게." 아이는 내 허리에 손을 감고 조금 울먹이더니 웃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응! 엄마"라고 말한다.
알지. 왜 모르겠어. 너는 아기 때 너를 키워 준 할머니를 하늘만큼 사랑하니까 할머니의 병원에 같이 가서 기다려주고 함께 손잡아주고 싶었지. 그렇지만 반에서 영어독서 1등을 놓치지 않고 있는 자신을 좋아하기에 매일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 유지하고 싶어 하는 너의 마음도 알 것 같아. 너는 네가 바라는 너의 모습을 세심하게 그려나가고 한 발짝씩 매일 걸어 나가지. 하루쯤 더디게 가도 괜찮은데, 그건 나의 생각이고 너는 너의 속도를 유지하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독서는 너의 밥이니까 고팠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런데 아침시간은 가족 모두의 시작이라서 우리는 때론 서로의 기분이 묻은 채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단다. 모두 하얀 종이에 예쁘게 하루를 그리고 싶은 마음은 비슷해.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니까 이해하고 나눌 수 있어. 괜찮아. 그럴 때도 있어.
너의 마음에 충실하며, 곁에 있는 이들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불어오는 바람마저 감사해. 여행지에 있지 않아도 바람의 농도와 햇살의 흐름에 따라 공기의 밀도가 바뀌고, 찰나를 날아오르지. 가만히 가라앉는 순간도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도 삶의 페이지마다 너무나 소중하단다.
괜찮아. 그런 날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