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극 오디션을 마치고 나는 타악 퍼포먼스팀원 모집 오디션에도 지원을 넣었었다. 간절했던 연극에서는 끝끝내 합격 연락을 받을 수 없었지만 오히려 별 기대 없이 지원했던 타악퍼포먼스팀에서 덜컥 합격소식이 도착했다. 그때의 나는 무대에 설 수 있고 그로 인해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결원으로 차질이 생긴 한 달 뒤에 있을 공연에 땜빵역할로 바로 투입이 되었고 공연 연습에 매진하느라 연기의 길을 잠깐 잊은 채 시간을 보냈다.
한 달여 죽기 살기로 노력했던 공연팀은 나의 예상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 연습 페이를 따로 챙겨줄 수가 없으니 식비만큼은 책임지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팀대표는 식사 때마다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고, 그녀가 약속했던 것들을 받기 위해 따로 얘기를 하면 언젠가부터 나는 눈치 없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결국 나는 첫 공연이 마지막 공연이 되어 팀대표에 의해 공연팀에서 하차하게 되었고, 이 바닥에서 공공연하게 자리 잡은 무대에 간절한 사람들을 제대로 된 보수도 주지 않고 자신의 입맛대로 조종하려는 그들의 악랄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잠시,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려 연극 오디션에 지원을 넣기 시작했고 심기일전한 덕분인지 이번엔 대학로 연극판에서도 한 손안에 꼽힌다는 소위 메이저급 공연에서 서류 합격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길로 나는 바로 오디션 준비에 매진했다. 다행히 전에 관람한 적이 있던 공연이어서 내가 지원한 캐릭터에 맞는 자유연기를 준비하는 부분은 전보다 조금 수월했다. 나는 지난번에 받은 피드백을 반영하여 어떻게든 기억에 남는 연기를 선보이고 싶어서 다른 작품에서 인용하는 그런 흔한 연기가 아닌 실제 상황인 것처럼 도입부를 꾸며 보기로 했다. 대략 "아, 잠시만요. 급한 전화라..." 하며 뒤를 돌아 전화를 받는 척하며 시작하는 연기였다. 나는 이것이 꽤 괜찮은 전략인 것 같았다.
고대하던 오디션 당일. 이전의 오디션 경험이 있으니 이번엔 무리하게 일찍 출발하진 않았다. 대충 30분 정도 일찍 도착해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니 이 극장은 일단 규모도 크고 건물의 외관과 인테리어는 깔끔했으며 으레 소극장들이 그렇듯 지하에 위치한 것이 아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야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올라탄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 뒤따라 보이던 장면은 아직도 잊지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극장 밖 복도에 빼곡히 서서 준비해 온 대본을 읽거나 읊조리며 서로를 경계하던 눈빛들, 위아래로 훑던 시선들, 그리고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와 웃음기 하나 없던 딱딱한 분위기. 평소 긴장을 잘하지 않던 나였지만 그 순간과 그 공간의 여배우들 사이 보이지 않는 기싸움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우선 내 이름을 말하니 진행요원이 나의 순서를 알려 주었다. 이름 가나다순으로 진행하다 보니 최 씨인 나는 자연스레 뒷 순서여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아직 시간이 많이 여유로웠다. 하는 수 없이 두리번거리고 주변을 관찰하고 있는데 대충 상황을 보니 들어갔다가 바로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게 인사만 하고 준비한 연기도 다 보여주지 못한 채 나오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열심히 준비한 연기조차 끝까지 보여주지 못할 수도 있구나'. 나는 점점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때 왜인지 계속 시선이 머무르는 익숙한 얼굴이 하나 있었다. ‘누구 많이 닮았는데...’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마자 딱 떠오르는 얼굴. 초등학생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녔던 어린 시절 단짝 친구. 근 10년간 회상해 본 적도 없는 오래전 일이었지만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불현듯 그 친구의 이름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바로 이름 목록이 적힌 종이 앞으로 가서 그 친구가 맞는지 명단을 찾아보았는데 세상에, 거기에 진짜로 그 이름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 친구의 이름이 불리자 정말로 그 사람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맙소사, 초등학생시절 단짝을 여기서 우연히 만나다니!
어린 시절의 단짝 친구를 오디션장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그 친구에게 가서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혹시 나를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나 혼자만 친했다고 생각한 거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을 하는 사이 그 친구가 오디션을 마쳤는지 극장을 빠져나와 짐을 챙겨 엘리베이터에 바로 오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망설였다가는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그 친구와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날릴 것 같았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급하게 달려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리고는 뻘쭘하게 문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혹시 ㅇㅇ초등학교 다니셨나요?"
"어, 네... 어? 너 ㅁㅁ이 맞지?"
"나 알아보는구나! 너 △△이 맞지?"
우리는 그렇게 10여 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었다. 그동안 연락이 끊긴 채 지냈던 터라 서로 궁금한 게 너무 많았던 우리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듯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고 답하기 바빴다. 내가 기억하던 이 친구는 어렸을 때도 참 똘똘하고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는데 어떻게 연기를 하게 되었냐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대학교는 공대를 전공했는데 우연히 동아리로 시작된 연극과의 인연이 자기를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했다. 나 또한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근황을 전하자 친구 역시 솔찬히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는 근처 카페에서 내 오디션 순서가 끝난 후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은 채 잠시 헤어졌다.
그리고 시작된 내 오디션은 시원하게 말아먹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기대만큼 큰 기량은 펼치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나는 준비한 연기는 끝까지 보여줬음에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기며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바로 향했다. 2019년 12월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떠들며 함께 울고 웃었다. 다가오는 내년에는 무대 위에서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