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환한 조명이 비추고 있는 무대였다. 무대에 서서 처음으로 핀조명을 받아보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눈이 부셔서 순간적으로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눈이 적응된 뒤 찬찬히 살펴보니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두세 명쯤. 나의 예상보다는 훨씬 적은 숫자였다. 그중에서도 무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이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기소개를 요청했다.
정석대로 연기를 배워보지 않아서 그런지 워낙 타고나길 엉뚱해서 그런지 나는 참신한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오디션 때도 어떻게 하면 좋은 방향으로 나에 대한 기억을 많이 남길 수 있을지를 많이 고민했었다. 그러다가 생각했던 것이 '내가 가진 강점을 최대한 어필해 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땐 중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강점으로 퍼뜩 생각이 나는 게 바로 중국어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 자기소개에 앞서 따로 중국어로 자기소개 멘트를 준비했었다.
느닷없이 중국어가 쏟아지자 내 앞에 있던 그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고선 다시 찬찬히 서류를 살펴보더니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했네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연기에 대한 열정과 나의 넘치는 끼를 썩히기 아까워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연극 무대에 도전해 보았다고 당차게 대답했다. 그는 나의 자신감을 좋게 보는 눈빛이었다. 그는 내가 준비한 연기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준비했던 연기를 가감 없이 선보였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신감만큼은 최고치였던 상태로 연기를 했던 것 같다. 준비했던 연기가 끝나자 그는 앞에 놓인 대본을 보면서 연기를 해보라고 했다. 내가 오디션에 지원한 역할의 대사였다. 나는 대본의 내용을 대강 훑어 내용을 파악하고서 자신 있게 연기를 선보였다.
모든 연기가 끝이 나자 그는 오디션에 불합격하면 따로 연락이 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수고했다는 말로 내 순서를 슬슬 마무리 지으려는 기색이었다. 그러면서도 오디션에 만약 합격을 한다면 공연 연습 일정과 지방 공연 일정은 이러이러하니 참고하라는 설명이 나에게는 큰 위로처럼 다가왔다. 그래선지 갑자기 불쑥 이런 자신감이 솟아났다.
저, 죄송한데 제 순서는 이제 끝난 건가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요.
혹시 제 연기에 대한 코멘트를 한 번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 나자 '아차' 싶었다. 여기는 상업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를 뽑는 자리이고, 그는 내 연기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피드백을 줄 의무가 없었다. 어쩌면 이런 나의 요청을 '경우 없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단칼에 잘라 거절을 당하고 욕을 먹는다 할지라도 나는 정말 내 연기에 대해 지적이나 평가를 해 줄 프로의 시선이 간절히 필요했다. 그런 나의 간절함을 안 걸까. 그는 입을 떼어 나의 연기에 대한 평가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일단 연기를 배워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기본적인 부분, 뭐 발성이라든지 호흡, 움직임 같은 건 전공자와 비교해 봤을 때 크게 떨어지는 부분은 없다고 느껴져요. 다만 너무 평범해요. 연기를 하는 데에 있어서 본인이 가진 강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연기는 어떤 건지를 잘 생각해 보고 연습해 봐요. 오늘 이 자리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절대 주눅 들거나 포기하지 말고요. 자기만의 개성을 더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세요."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오늘 이 오디션에 떨어진다고 해도 나는 절대 슬프지 않을 것 같았다. 그에게 들은 평가로 이미 소득은 충분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본기가 부족하지 않다'라는 평가가 나에게는 '너도 할 수 있어'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당장 연기 때려치우라는 소리를 들을까 겁이 났는데 그런 얘길 듣지 않은 것만 해도 나는 감사했다. 나는 그에게 거듭 감사하다고 배꼽인사를 드리고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극장을 나섰다. "나도 할 수 있대, 흐흐". 집으로 가는 내내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