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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Jul 22. 2022

새 신을 신는다는 것의 어려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표현할 때 유독 '신발'과 관련된 표현들이 많다. '신발을 선물하면 그 신발을 신고 다른 사람에게로 떠난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군인 남자 친구를 둔 여자는 '곰신', 전역까지 성공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면 '꽃신' 등등. 우리는 왜 굳이 많고 많은 물건 중에 굳이 '신발'에 이토록 가치를 두는 것일까?


 얼마 전 두 달 내내 신고 다니던 치앙마이 야시장에서 7천 원 남짓한 돈을 주고 산 슬리퍼를 버렸다. 뚜벅이 배낭여행객의 신발로 간택된 가혹한 운명이었지만 그 슬리퍼는 버려지기 직전까지 너덜너덜한 걸레 행색으로도 끝까지 본인의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내었다. 나 또한 그 슬리퍼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높게 사 오래도록 함께 하려고 했지만, 코팡안 바닷물의 짠맛을 보고 나서 군데군데 녹이 슬고 모래 범벅이 된 그 슬리퍼를 도저히 다음 목적지까지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쉽지만 그 슬리퍼와 눈물 어린 이별을 했던 것이다.


 그 슬리퍼를 보내고 나서 나는 새로 쪼리를 하나 사서 신었다. 겉보기엔 비슷비슷한 싸구려 슬리퍼인데, 새 쪼리는 처음 개시한 날 착용감이 조금 불편하다 싶더니 이내 다음 날  내 발 군데군데 물집을 만들어 놓았다. '더 편해 보이는 신발이 있으면 바꿔야겠다.'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바쁜 일정 탓에 실천으로 옮기기까진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또 어느새 물집이 난 자리가 아물고 딱지가 앉아 더 이상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또 그 신발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다 오늘 또 하염없이 내리쬐는 동남아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힘없이 터덜터덜 걷던 내 시선의 끝에 그 신발이 걸렸던 것이다. 어느새 내 발과 한 몸이 된 것처럼 편안해져 버린 그 신발을 보니 지난 내 인연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누군가를 만나 익숙해지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적응하는 과정이 꼭 신발을 대할 때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지금 신고 있는 신발에 적응이 되고 익숙해지면 권태로움이 찾아온다. 우리가  신발을 사는 것은 신발이 망가져서  이상 신을  없게 되었을 때도 있지만 그저 질려서, 새로운 신발이  마음에 들어서 갈아 신을 때도 있다. 오랫동안  신발을 신다가 다른 신발을 신으면   모양이 변했나 싶을 정도로 어색한 느낌이  때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고통도 수반해야 하는-적응 기간이 끝나면  전에 신던 신발처럼 익숙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새로운 신발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두려워 신던 신발을 평생 벗지 못하기도 한다. 그 신발이 낡고 떨어져 더 이상 신을 가치가 없음에도, 새 신발 때문에 발에 물집이 잡히고 아파야 하는 과정을 견딜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평생 새로운 신발만을 고집한다. 진열대에 놓인 새 신발은 항상 욕심이 나기 마련인데, 막상 본인이 신게 되면 바로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지만 새 신발에 적응하는 일이 내게는 퍽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지금 신고 있는 이 쪼리가 오래도록 나와 함께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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