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표현할 때 유독 '신발'과 관련된 표현들이 많다. '신발을 선물하면 그 신발을 신고 다른 사람에게로 떠난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군인 남자 친구를 둔 여자는 '곰신', 전역까지 성공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면 '꽃신' 등등. 우리는 왜 굳이 많고 많은 물건 중에 굳이 '신발'에 이토록 가치를 두는 것일까?
얼마 전 두 달 내내 신고 다니던 치앙마이 야시장에서 7천 원 남짓한 돈을 주고 산 슬리퍼를 버렸다. 뚜벅이 배낭여행객의 신발로 간택된 가혹한 운명이었지만 그 슬리퍼는 버려지기 직전까지 너덜너덜한 걸레 행색으로도 끝까지 본인의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내었다. 나 또한 그 슬리퍼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높게 사 오래도록 함께 하려고 했지만, 코팡안 바닷물의 짠맛을 보고 나서 군데군데 녹이 슬고 모래 범벅이 된 그 슬리퍼를 도저히 다음 목적지까지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쉽지만 그 슬리퍼와 눈물 어린 이별을 했던 것이다.
그 슬리퍼를 보내고 나서 나는 새로 쪼리를 하나 사서 신었다. 겉보기엔 비슷비슷한 싸구려 슬리퍼인데, 새 쪼리는 처음 개시한 날 착용감이 조금 불편하다 싶더니 이내 다음 날 내 발 군데군데 물집을 만들어 놓았다. '더 편해 보이는 신발이 있으면 바꿔야겠다.'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바쁜 일정 탓에 실천으로 옮기기까진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또 어느새 물집이 난 자리가 아물고 딱지가 앉아 더 이상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또 그 신발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다 오늘 또 하염없이 내리쬐는 동남아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힘없이 터덜터덜 걷던 내 시선의 끝에 그 신발이 걸렸던 것이다. 어느새 내 발과 한 몸이 된 것처럼 편안해져 버린 그 신발을 보니 지난 내 인연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누군가를 만나 익숙해지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적응하는 과정이 꼭 신발을 대할 때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지금 신고 있는 신발에 적응이 되고 익숙해지면 권태로움이 찾아온다. 우리가 새 신발을 사는 것은 신발이 망가져서 더 이상 신을 수 없게 되었을 때도 있지만 그저 질려서, 새로운 신발이 더 마음에 들어서 갈아 신을 때도 있다. 오랫동안 한 신발을 신다가 다른 신발을 신으면 내 발 모양이 변했나 싶을 정도로 어색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고통도 수반해야 하는-적응 기간이 끝나면 또 전에 신던 신발처럼 익숙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새로운 신발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두려워 신던 신발을 평생 벗지 못하기도 한다. 그 신발이 낡고 떨어져 더 이상 신을 가치가 없음에도, 새 신발 때문에 발에 물집이 잡히고 아파야 하는 과정을 견딜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평생 새로운 신발만을 고집한다. 진열대에 놓인 새 신발은 항상 욕심이 나기 마련인데, 막상 본인이 신게 되면 바로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지만 새 신발에 적응하는 일이 내게는 퍽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지금 신고 있는 이 쪼리가 오래도록 나와 함께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