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까상에 다시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팍세로 가는 버스를 찾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곳엔 시장 한편에 서있는 트럭 한 대가 전부였다. 그것은 동남아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트럭을 개조해 만든 일종의 버스 개념인 썽태우였는데, 우리는 툭툭을 타고 국경을 넘으며 마셨던 흙먼지의 악몽이 떠올라 이번만큼은 창문이 달려있는 차를 타고 이동을 하고 싶었다. 돈뎃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계셨던 아저씨를 그곳에서 다시 만나 여쭤보니 지금 팍세를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 썽태우라고 했다. 말을 마친 그는 익숙한 듯이 썽태우에 올라탔다.
썽태우 기사 아저씨는 어디서 정화조로 쓸법한 큰 플라스틱 통을 가져오더니 낑낑대며 썽태우 위에 싣기 시작했다. 나는 '저걸 저기에 실어서 뭐 하려고 그러나...' 하며 쳐다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밑에 있던 사람들이 아저씨에게 하나둘씩 자기 짐을 전달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저씨는 사람들에게 짐을 받아 하나씩 차곡차곡 그 플라스틱 통 안에 쌓아나갔다. 그렇다. 그것은 승객들의 짐을 보관하기 위한, 말하자면 트렁크 같은 개념인 거였다. 트럭 하나를 가지고 알뜰살뜰하게 공간활용을 하는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박수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양옆으로 긴 좌석이 마련되어 있는 썽태우에 나란히 앉아 또다시 흙길을 달렸다. 출발할 때만 해도 널널하던 좌석은 썽태우가 몇 번씩 멈춰서 길가에 있는 사람들을 태우고 나자 금세 꽉 차버렸고, 우리는 전선 위에 다닥다닥 앉은 참새들처럼 서로의 엉덩이를 붙여가며 끼여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양 옆 사람들과의 거리가 어찌나 가까웠는지 내 왼쪽과 오른쪽 궁둥이로 옆사람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옆사람의 체온과 체취로 불쾌함을 느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나는 반쯤 나간 영혼과 함께 썽태우에 그렇게 실려갔다.
중간중간 잠깐 쉬느라 썽태우가 멈춰 설 때면 빠짐없이 먹을거리를 파는 길거리 상인들이 몰려와 너도나도 물건을 파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구운 닭고기, 닭내장 같은 것들을 사서 찰밥과 함께 썽태우 안에서 식사를 했다. 나는 이 상황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신기해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는데, 그들은 내가 그들을 배가 고파서 쳐다본다고 생각을 했는지 자꾸만 나에게 자기들이 먹는 것을 나눠주려고 해서 나는 웃으며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사실 나도 먹고 싶긴 했는데 그들이 먹는 게 남아서 내게 주는 게 아닌, 자기가 먹어야 하는 것을 나에게 양보하는 것 같아서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그들의 그런 순수한 호의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렇게 썽태우를 타고 4시간쯤을 달려 우리는 팍세에 도착했다. 팍세는 랏다가 나고 자란 도시이자 전에도 한 번 놀러 왔던 곳이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이 있었다. 근처의 호스텔에 짐을 푼 나는 저녁에 랏다네 집에 가서 그녀의 가족들을 만날 계획이었다.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에서 일을 하느라 팍세에 자주 오지 못한다는 그녀가 어차피 가족들도 다 너를 알고 있으니 자기 집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랏다없는 랏다집 놀러 가기] 미션이 시작되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를 3년 만에 처음 보는 그녀의 가족들이 나를 보자마자 "어머,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요즘엔 뭐 하고 지내니? 일은 하고 있니?" 같은 질문들을 쏟아낼 거라고 예상했던 건 나의 오산이었다. 그들은 마치 내가 옆집 사는 이웃인 것 마냥 "왔니? 거기 잠깐 앉아있어. 곧 밥 다 될 거야." 라며 어제 본 사람처럼 대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 느낌이 귀찮다거나 성가시다는 느낌이라기보단 나를 진짜 가족처럼 편하게 대하는 느낌과 가까웠다. 밥상 앞에서 그녀의 할아버지까지 이 요리가 이곳에서 유명한 물고기 요리라며 나와 가까운 쪽으로 밀어주는 것만 봐도 그들이 나를 챙겨주는 마음은 예전에 방문했을 때와 변함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이 것이 그들의 표현 방식인 것 같았다. 괜한 오지랖을 부리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챙김 받는 게 나는 어쩐지 더 좋았다.
팍세에서 이틀을 머물고 나는 곧장 타케크라는 도시로 향했다. 버스를 예매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실랑이가 생긴 나는 어쩔 수 없이 랏다의 이모에게 통역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내 전화를 받은 그녀는 바로 나에게 오더니 오해가 되었던 부분을 설명해 주고 버스 티켓까지 직접 결제하는 것도 모자라 버스 출발까지 시간이 조금 남는다면서 나를 태우고 집으로 데려와 마지막까지 밥을 챙겨 먹였다. 나는 마치 그녀에게 돈을 내달라고 눈치를 주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버스 티켓을 끝까지 사양했으나 그녀는 별거 아니라면서 끝끝내 내 돈을 받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을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게 나는 너무 감사했다.
타케크로 향하는 버스는 침대버스였다. 예전에 랏다와 함께 타본 적이 있어서 그 컨디션에 놀라지는 않았는데 굳이 꼽자면 3년 전과 비교했을 때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게 놀라웠다. 라오스의 침대버스는 한 칸에 한 명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칸을 두 명이서 사용하게끔 되어 있는데, 그 말은 즉 오늘 처음 만난 생판 모르는 남일지라도 서로 살을 부대끼면서 같이 누워서 이동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웬만하면 동성끼리 자리를 배정하는 것 같았는데 운이 나쁘면 혼성이 한 침대를 같이 써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여자와 함께 같은 침대를 쓸 수 있었다.
사람이 꽉 찬 침대버스는 남중하는 태양의 열을 그대로 받아 안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에어컨은 고사하고 미지근한 바람을 뿜어대는 선풍기조차도 없었다. 침대칸 한쪽에 딱딱한 하얀 널빤지 같은 것들이 쌓여있길래 저게 뭔가 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그걸 하나씩 들고 열심히 부채질 중이었다. 나도 냉큼 널빤지 하나를 주워 부채질을 해댔다. 시원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 바람을 만들고, 바람을 만드느라 다시 땀이 나고, 그 땀을 식히려 또다시 부채질을 하고. 가만히 있는 게 더 나은건지 이러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던 버스는 한참을 멈춰 서고 한참을 더 달려서 10시간 만에 나를 목적지에 내려주었다. 때문에 초저녁쯤 도착해서 현장에서 숙소를 구해야겠다는 내 계획은 산산조각이 나버릴 수밖에 없었다. 황량한 터미널에는 어딜 가든 달라붙던 툭툭기사들도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터미널 한쪽 구석에서 해먹을 치고 잠을 자고 있던 툭툭 아저씨를 깨워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흥정을 해도 여전히 비싸게 느껴졌지만 지금 시내로 이동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터미널 벤치에서 노숙을 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결국 툭툭에 올라탔다.
그때까지만 해도 흥정이 가장 큰 문제인 줄 알았는데 툭툭을 타고 길을 가다 보니 한적한 도로엔 차들도 사람도 없었고 아저씨가 향하는 곳이 맞는 방향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면서 주의를 한다고 하는데도 혹시라도 이 아저씨가 마음먹고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그대로 당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끝까지 경계를 놓지 못하는 상태로 아저씨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그날은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늦은 시간에 인적 드문 길을 이동하는 일은 삼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툭툭 아저씨는 그렇게 나를 내려준 후 내 페이스북을 물어보시더니 만나자는 메시지를 가끔 보내곤 했다.
내가 가려고 했던 호스텔은 이미 굳게 문이 닫힌 뒤였다. 간판에는 24h라고 쓰여있었는데 역시 코로나19 전에나 그렇게 운영했던 것 같았다. 호스텔 바로 옆에는 작은 호텔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그 거리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곳이었다. 들어가서 가격을 물으니 1박에 15달러라고 했다. 내 예산을 초과하는 금액이었기에 아쉬웠지만 나는 그곳을 다시 나왔다. 그리고 구글맵에 나오는 호스텔들을 모두 싹 들러보았는데 하나같이 문이 굳게 닫혀있거나 이미 폐업한 상황이었다. 나는 결국 한 시간 정도를 길거리에서 허비하고 다시 그 호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거금 15달러나 주고 들어온 호텔방은 아늑했다. 침구는 깨끗하고 부드럽고 향기가 났다. 얼마 만에 이렇게 좋은 방에서 묵는 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 시간을 10분 남기고도 나는 이 호텔방을 벗어나는 게 아쉬워서 뽕을 뽑겠다는 심산으로 11시가 다 될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었다. 의도치 않은 호사스러운 하룻밤이었지만, 나는 다시 또 도미토리 라이프로 돌아가야 했다. 언젠가 이때의 2만 원짜리 호캉스에도 온마음 가득 기뻐했던 때가 그리울 날도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배낭을 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