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쿠프에서 나는 비행기를 타고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항상 플릭스 버스만 이용하던 내가 비행기를 타게 된 이유는 유난히 그 항로가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이었는데, 여태껏 아무 문제없던 기내 반입용 짐에 대해 느닷없이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는 바람에 페널티를 물게 되어 결국은 낼 돈 다 내고 이용한 격이 됐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운이 나쁘게 이런 일을 겪게 되면 몇 푼 안 되는 돈에도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안 좋은 기분으로 도착하는 바람에 첫 스타트부터 기분이 나빠서였는지는 몰라도 부다페스트는 폴란드에서의 나쁜 기억을 무마시켜 줄 만큼 친절한 도시는 아니었다. 금요일 밤의 부다페스트 한복판은 술과 마약에 취한 사람들로 정신없고 시끄러웠다. 온갖 치장을 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큰 배낭을 멘 동양 여성이 혼자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미심쩍게 보는 시선들도 더러 있었다. 여기저기 시끄럽게 울려대는 클럽 노래를 뒤로하고 나는 부지런히 호스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다페스트의 호스트는 만나기 전에 연락을 주고받을 때까지는 아무 낌새 없었는데 만나고 보니 이상하게 퀭한 구석이 있었다.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그는 주기적으로 대마를 흡연하는 사람이었던 거였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대마를 습관적으로 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는데 대게 아주 다운되어 있거나 아주 하이텐션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았다. 진한 쌍꺼풀에 긴 속눈썹을 가진 그는 나와 대화를 하는 동안 그 예쁜 눈을 반밖에 뜨고 있지 못했다. 대마를 하는 사람이 모두 위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약간 쎄한 촉이 와서 그날 하룻밤만 그의 집에서 머물고 바로 다음 날 숙소를 호스텔로 옮겼다.
부다페스트는 주로 부유층이 거주하는 부다지역과 관광객과 젊은 층이 모여드는 페스트 지역이 합쳐져 형성된 곳으로 활기차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하지만 클럽이 상당히 많이 포진되어 있어 외출할 때마다 마약상을 마주쳤던 페스트 지역은 아무래도 치안이 좋지 못한 편이었다. 헝가리식 찹쌀 튀김인 랑고쉬와 파프리카 가루를 넣고 뜨끈하게 끓여낸 수프 굴라쉬는 맛있었지만 홀로 여행 중인 내게 부다페스트는 그 이상의 매력은 주지 못했다. 며칠 뒤 나는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로 향했다.
브라티슬라바의 호스트 카롤은 괴짜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우체부 일을 하고 있다는 삼촌뻘의 그는 첫날 나를 위해 오븐에 구운 오리 요리를 대접해 주었는데 식사를 하는 동안 엄청난 양의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국제 정세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그가 한국인에게 북한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던 거였다. 나는 폭발하는 그의 호기심을 받아주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는 기분으로 밥을 먹었다.
다음 날 나는 혼자 브라티슬라바의 번화가를 구경하러 나갔다가 카우치 서핑을 통해서 연락이 닿은 중국인 친구 동위를 만났다. 동위는 나와 2살 차이가 나는 오빠였는데, 부모님을 따라 20살 때 브라티슬라바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까지 해서 슬로바키아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했다. 나를 이 근처에서 가장 맛있는 한식집으로 데려다주겠다던 그는 배낭여행 중인 나에게 돈을 아끼라며 호방하게 한 턱을 냈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 티비에 나온 류승범 배우가 슬로바키아 한식 맛집이라며 그곳 이야기를 한 걸 보게 되었을 때 왠지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동위와 나는 말이 잘 통했다. 키는 크지만 통통한 체형이라 솔직히 말하면 별로 내 취향의 외모는 아니었는데 생면부지의 타국에서 동포들이 아닌 현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아는 나이기에 그걸 실천 중인 그가 퍽 멋있게 보였던 건 사실이었다. 중국의 대기업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이직한 지금의 직장에서 꽤 높은 직급과 봉급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씀씀이도 컸지만 쉬고 싶으면 당일 아침에 상사에게 전화 한 통을 하는 것 만으로 자유롭게 휴가를 얻었다. 그렇게 얻은 자유시간을 그는 나와 함께 데이트를 하며 보내곤 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만난 우리는 그다음 주말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다시 만났다. 한국의 여행프로그램으로부터 섭외 연락을 받은 나는 촬영을 위해 곧 크로아티아로 넘어가야 했는데, 촬영을 마치면 다시 슬로바키아로 돌아오라며 그가 어울리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와 함께한 브라티슬라바와 빈에서의 시간들이 즐거웠기 때문에 다시 그를 만나러 돌아오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내 결정을 듣고 나서 뛸 듯이 기뻐하며 일주일의 휴가를 내고 여행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의 절친이 모두 모인 조지의 생일파티를 시작으로 슬로바키아의 반스카슈 티아브니차, 헝가리의 죄르를 거쳐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안 좋은 마음으로 도착해서 안 좋은 마음으로 홀로 떠났던 그 도시를 이제 누군가의 손을 잡고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혼자 거닐 땐 쓸쓸하게만 느껴졌던 그 도시가 이제는 더 이상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유와 향락이 가득한 그 도시를 함께 즐길 누군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꽤나 컸다. 나는 나중에 행복했던 이 순간을 떠올릴 수 있는 책갈피를 꼽아놓는다는 심정으로 그와 함께 그 도시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곳에서 와이파이를 쓰며 함께해서 행복했던 우리였지만 현실의 벽 앞에 우리는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먼저 일터에 복귀하기 위해 부다페스트를 떠났고 홀로 남겨진 나는 다시 호스텔의 지박령 신세가 되었다. 열흘 가까운 시간 동안 붙어있느라 아무 고민 걱정 없이 그를 따라다니기만 했던 나는 갑자기 혼자 남겨지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배를 채우러 근처의 프랜차이즈 패스푸드점에 갔다가 공허한 기분에 핸드폰만 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그곳에 혼자 남겨진 채로 창밖을 바라보는데 길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하고 즐거워 보여서 나는 점점 더 우울해졌다.
인생과 여행은 모두 롤러코스터와도 같다. 좋은 날이 있으면 안 좋은 날도 있고, 웃는 날이 있으면 우는 날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독 부다페스트에 있었을 때에는 그 감정의 오르내림이 들쭉날쭉 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하루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르면서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던 기억들 말이다. 하필이면 그때가 또 서울 이태원에서 큰 참사가 있었던 2022년의 할로윈 데이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접한 나는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경험 끝에 남은 교훈은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을 살면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쏟는 걱정은 의미가 없다는 거였다. 한 끗 차이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최선을 다해 각자의 삶을 살아내는 우리들은 현재의 행복에 집중할 자격이 있다. 설사 그게 폭풍전야처럼 불행 전의 짧은 행복이라고 해도, 나는 오늘의 행복에 감사하렷다.